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을 떠올릴 때, 추억을 떠올릴 때 흔히 그 시간의 공간과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느낌과 풍경으로 그려내면서 추억을 더듬고 사람의 기억을 더듬게 된다.

하지만 조금 더 잔잔하게 생각을 해보면 그 속에는 늘 향기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 잊었던 향기에 대한 추억, 향기에 대한 기억을 필립 클로델의 <향기>를 통해서 떠올리게 된다.

 

사르트르와 카뮈, 파트릭 모디아노를 잇는
프랑스 현대문학의 진수, 필립 클로델 산문집
가장 뛰어난 산문에 수여되는 장자크 루소 상 수상!(2013년)

 

영화감독이기도 한 그의 작품을 읽어본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작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프랑스 작가의 산문이라는 점이 궁금하다.

추억을 떠올리는 향기는 어지간하면 좋은 향기, 이를테면 달콤한, 고소한, 향기로운, 꽃향기처럼, 은은한 향수 냄새 등등의 어휘를 떠올리게 된다.

좋은 향기로만 표현되는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싶은 심리랄까?

하지만 향기라는 것이, 추억이라는 것이 좋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정작 그 아름답지 못한 부분에 대해, 때론 부끄러운 부분에 대해 은근슬쩍 숨어버리게 된다.

 

<향기>는 그런 모든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야기의 주체를 알파벳에 맞춰서 떠올리는 향기와 그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푼다.

물론 길지 않게, 간단하게.

때론 독자들이 단어와 작가의 기억을 추리해야 하는 또는 그와 연관된 나의 추억을 꺼내야 하는 노력도 요구하는 그런 산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풍경 속에서 추억을 떠올린다.라는 것보다는

우리는 수많은 향기 속에서, 매일 맡게 되는 향기 속에서 기억 속의 그것을 꺼내본다고 하면 <향기>라는 작품이 설명되지 않을까?

 

꿀벌과는 달리 날개 없는 우리 작은 인간들은 가장 낮은 가지에서 연한 크림색의 무거운 송이들을 찾는다. <중략> 이제, 아주 재빨리, 끓은 기름 속에 넣어야 한다. <중략> 입속으로 봄이 한가득 들어온다. (아카시아 중에서)

 

우리는 갑자기 멘톨과 감귤의 도도한 향기에 습격당한다. 알코올 때문에 더 강렬해진 향기는 공중에서 소용돌이치며 코를 찌른다. <중략> 아버지가 나를 향해 몸을 구부리고 불타는 듯한 두 뺨을 내어주면, 나는 입을 맞춘다. (애프터셰이브 중에서)

 

그 아름다운 옛 아침의 빛 속에서 온몸에 햇살을 받으며, 신선한 공기에 섞인 볶은 커피의 향기를 맡으며 오래도록 보도에 머물렀다. (커피 볶기 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면서 맡게 되는 향기는 아버지의 냄새가 아닌 여자들에게서 나는 냄새와 약 냄새가 풍긴다. 포르말린과 백분, 파운데이션과 장뇌 제품이 혼합된 기묘한 냄새. (죽음 중에서)

 

향기로운 아카시아를 꿀벌보다 더 빠르게 따와서 입안에 그 향기를 물고 있는 것은 어릴 적의 고향의 기억과 엄마의 요리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면도하는 모습과 늘 그것을 부러운 듯 또는 범접할 수 없는 남자의 그 넓음에 매료되는 아이가 떠오른다.

커피의 향기는 배고픈 예술가가 사기꾼으로 전략하기 직전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캠프파이어 횃불의 냄새를 함께 맡았던 친구들과의 여름, 몽롱하고 뜨거웠던 댄스파티와 성적 긴장이 감도는 체육관 특유의 냄새, 낚시를 배우고 함께한 마을 어른들과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 대마초에 탐닉했던 자유분방한 친구들, 잠든 아이의 숨결에서 시작되는 생명의 향기와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집에서 아버지가 죽은 뒤 사라져버린 삶의 향기까지도 라는 말처럼 <향기>는 작가의 모든 것, 삶의 모든 것의 느낌을 전하고 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향기는 어떤 것이 있던가.

어릴 적 엄마와 함께 갔었던 목욕탕의 향기는 엄마가 되어 나의 아이를 데리고 가는 지금의 향기와 똑같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어도 엄마의 옷에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었다. 문득 내 옷장을 열었을 때의 그 향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엄마의 옷에서 여러 가지 반찬 냄새가 풍길 때는 좋지 않지만, 그런 날은 맛있는 요리가 차려진다.

어느 날 문득 스쳐 가는 시어머니에게서 좋은 향기가 아닌 고개를 돌리게 되는 향기가 난다. 이젠 늙었다는 증거일까? 삶의 끝에 왔다는 표시인가?

늘 달콤한 아이 냄새를 풍길 줄 알았던 아들에게서 이젠 남자의 향기가 퍼진다. 때론 좋기도 하지만, 때론 냄새가 고약하다.

이런, 너도 이젠 다 커가는구나.

과자 향이 늘 풍기던 딸아이에게서 향긋한 화장품의 향기가 풍긴다. 너도 이젠 엄마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애프터셰이브의 향기를 풍기던 남편에게서 때론 찌든 담배 향이 더 강할 때가 있다. 이 사람, 이젠 나에게서 더 많은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의 향기는 어떨까?

좋을까? 향기로울까? 아니면 삶에 찌들어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의 그런 찌든 향이 나고 있을까?

내가 나이가 들어서는 어떨까?

나의 후손들이 나에게 안길만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을 건가? 아니면 코를 쥐어짜고 피해버리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것인가?

지금의 나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미래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글이기도 하다.

현재의 향기에서 과거의 기억과 정서를 떠올리게 된다.

참 묘한 매력의 책이다.

가을의 한 켠에서 읽어보는 가을 같은 <향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공기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냄새들은 고스란히 기억과 정서 속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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