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곳.

지리적 고립뿐 아니라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던 곳.

히말라야 산맥과 높은 고원에 둘러쌓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에서 중국의 탄압과 달라이 라마의 독립 운동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

오체투지로 사원 순례를 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불심이 가득한 나라.

티베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이다.

 

<모독>은 고 박완서 작가님이 20년전에 방문했던 티베트 여행기이다. 지금은 중국화로 변한 티베트 모습이 아닌 그 이전의 모습을 그려낸, 척박한 땅을 발판삼아 이어간 티베트의 자연과 바람과 불심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모독>은 1997년 출간되어 15년이 넘도록 도서관과 책 수집가들 사이에서 희귀본으로 보관되어 왔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소문으로만 전해오던 귀한 작품이라고 하니 2014년 재출간된 작품을 결코 놓칠수가 없다.

 

'너무도 엄혹한 자연환경 때문에 내 생에서 가장 고된 여행이 되었다. 노구를 이끌고 다닐 데가 아니로구나. 자주 나이를 의식해야 하는 것도 괴로웠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장소의 특성상 무척 고된 여행길이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도 호기심의 일부이지만, 무엇보다 예순 중반의 작가가 고산병을 감수하며 그 곳을 디디고 봤던 그것을 남겨놓은 여행기이니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독자라면 당연한 것 아닐까. 작가에 대한 열렬함이 덜하더라도 작가의 담담함 글세계를 읽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모독>을 펼쳤다.

그 속에 담겨진 티베트의 사진은 함께 여행을 한 민병일님의 사진이 가득하다.

비록 사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 적막함과 광활함에 감탄만 저절로 나온다.

늘 뒤에 처지는 민 시인을 기다리며 몰래 사진 찍다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연환경에 대해서야 그런 제약이 없지만 너무 자주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바람에 구박도 받아가며, 그러고는 매일같이 코피를 흘리고 다닌 시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쓰럽다 -작가의 말 중에서-

얼마나 고된 여행이었나라는 생각을 담고 사진을 보노라면 그 진한, 파란 하늘과 화려함이 압도되는 부처상과 진한 티베트 사람들의 피부색이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하늘에 가까이 있는 죄(?)로 식물한계점을 넘은 산은 녹색을 거부한 오로지 짙은 흙빛만으로 첩첩 산중을 이루고 있다. 그 산이 주는 황량함은 마치 온 산을 벌목으로 깍아 내다 못해 뿌리까지 캐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이다.

산이라면 푸르름이 가득한 그것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티베트의 산은 풀 한포기 안보이는 천연의 갈색, 천연의 땅 색, 벌거숭이 산 그 자체로 여행객에게 자신을 보여준다.

식물한계선을 넘은 높이에 있는 이곳 산은 눈을 이고 있지 않으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맨몸이다(p49)

 

하지만 그 뒤의 느낌은 또 다른 감탄을 연발하게 한다.

흙 산과 맞닿은, 우리나라의 높은 가을 하늘보다 더 높고 새파랗게 깊은 하늘이 그 끝에서 시작된다.

극과 극의 풍경이다.

티베트의 하늘은 그때의 우리 하늘빛보다 더 가깝고 더 깊에 푸르다. 인간의 입김이 서리기 전 태초의 하늘빛이 저랬을까? 그러나 태초에도 티베트 땅이 이고 있는 하늘빛은 다른 곳의 하늘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p128)

 

바람 또한 어떠한가.

천지를 자욱하게 한 바람에서도 작가는 단순히 먼지 모래라는 것보다는 태초의 혼돈을 떠올린다. 나뭇잎도 없고, 휴지조각도 섞이지 않은 광활한 대지에서 부는 바람에 먼지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이 모습은 마치 생명 이전의 땅덩어리만 존재했던 그것 아닐까라고 말한다.

 

책의 곳곳에 있는 불상의 화려한 모습과 하늘로 치솟은 사원은 모습에 화려했을 옛 역사를 가늠하게 하지만, 반면 자연과 어울리는 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수수해서 한편으로 남루하다는 느낌일 들 정도의 그들의 삶은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것이 티베트의 모습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들은 꾸미기를 좋아한다. 자신들의 머무는 집의 창문이며, 그들이 키우는 야쿠에게도 장식으로 꾸미고 있다. 그들의 부처님과 사원도 꾸밈의 극치를 보인다.

이런 모습은 티베트가 극과 극의 나라가 아닐까라는 질문도 던져본다.

 

예전에 TV 교양프로에서 티베트의 오체투지 순례자의 모습을 보았었다.

온 몸을 바쳐 부처님께 귀의하는 뜻의 오체투지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참 놀라웠다.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길바닥에 온 몸을 내던져 한 발 한 발 부처님께 다가가는 모습은 나의 모든것을 부처님께 맡긴다는 의미도 알겠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감히 누구도 못하는, 이를테면 성직자 정도의 사람들이겠거니, 아니면 신심이 무척이나 강한 사람들이 하겠거니라고만 생각했었다.

광활한 대지의 먼지와 때로 온몸에 딱지가 앉아도 그들은 오롯이 오체투지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온 몸을 던져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오로지 신심으로 부처님께 다가가고픈 그 마음뿐이라고 해도 그 불심에 대해 경외로우면서도 의아스러움이 앞서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몸에 걸친 것이 전부이고 자연에서 얻는 것이 전부인 이들의 불심의 결과는 너무 거대하고 화려해서 바라보는 이들이 더 혼란스럽다.

그들의 사원은 황량한 땅에 어떻게 그렇게 크고 화려하게 솟았을까, 그들의 삶은 먼지속에서 야크똥을 말리고 불피우면 살아가는 소박함에 살고 있으면서도 부처님 발아래 버터기름을 쏟아붓고, 찬란한 비단으로 꾸미는 그 화려함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자신들의 삶은 어떻게 되던 오직 불심만 챙기면 된다는 뜻일까.

불심을 챙겼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의 삶은 그럭저럭 살아도 내세를 보장 받을 수 있을거라는 믿음 때문일까.

 

<모독>에서도 말한다.

부처상의 붉은 입술은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 하는 듯하고, 온몸을 금빛으로 두르고 있는 것은 힘이 넘쳐 보인다. 부처님 주변의 대좌나 기물들은 귀한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고, 여기저기 늘어진 휘장과 칸막이, 부처님을 둘러싼 것은 울긋불긋한 비단 천으로 감싸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합환상은 우리네의 무념무상의 사찰과 비교를 한다면 놀랍고 민망할 지경이다.

 

<모독>에서 사람이 오히려 더 부처같고, 부처가 사람같은 모습을 한것은 아닌가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나같이 무욕하고 겸손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이곳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부처와 인간, 성(聖)과 속(俗)이 헷갈렸다. 내가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저 사람들이 부처로 보이고 절 안의 부처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들이 부천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그리도 겸손하게 갈구하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적인 욕망을 초극하려고 몸부림치듯이 저들은 저절로 주어진 성자 같은 조건을 돌파하려고 몸부림치는 게 아닐까 하고.(p47)

 

'불교는 티베트의 모든 것이다'라고 한다.

티베트인에게 불교는 삶의 전부이고 불교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물질적 만족은 순간이며 온전할 수 없다는 가르침과 전생과 내(來生)을 믿는 신앙이기에 내생을 준비하려면 종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민족이다.

이런 티베트를 중국은 가만히 두질 않는다. 중국은 서남공정을 통해서 티베트를 속국으로 만들려하고, 티베트는 유혈시위까지 불사하기도 한다. 중국의 이민정책으로 티베트에는 중국의 한족이 유입되었고, 자본을 발판삼아 티베트에서 그들은 거만한 삶을 살고 있다.

달라이 라마가 외국에서 망명을 하며 독립 운동을 하고 있고, 중국이 내세운 또 다른 법왕이 있는 현실, 중국이 티베트를 중국화 하려는 것때문에 티베트는 고스란히 희생될 수 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외신에서 종종 보곤 한다.

 

<모독>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 아닐까?

외부의 사람들이 티베트라는 울타리를 넘지 않았더라면 그들 나름대로 자연에서 얻고,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을진데,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순례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괜한 경제의 얄팍함을 전한 것은 그들의 삶에 대해 모독을 한 것이고,

관광객들에게 애어른 할 것 없이 떼거지로 구걸하는 모습은 타국인이 니들보다 잘산다라고 그들을 모독하는 것일테고.

중국을 등에 없고 남의 나라에 버젓이 들어와서 마치 그들을 거지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한족 역시 티베트 민족을 모독하는 것이다.

순수의 땅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 경제의 변화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땅을 침범한 것, 천연 자연의 경험이라는 거창한 제목아래 그들의 삶과 그들의 문화를 신기한 듯 빤히 바라보며 구경하는 것.

이것이 작가가 느꼈던, 티베트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처음에는 베일에 쌓인 티베트를 바라봄이 신기했다.

그런데 신기하다라는 말이 오히려 그들에게 모독이 되는 것 아닐까 조심스럽다.

그들은 신기하지 않다.

그들은 그대로 살고 있었고, 그들의 불심으로 그렇게 표현했었고, 그들의 삶조차 신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타인이, 타국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감히 척박하다, 남루하다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책의 후반부에 있는 <모독> 꼭지를 읽으면서 과연 티베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는가 나에게 되물어 본다.

거창한 결론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개가 숙여진다.

그들에게 어떤 모독을 줬는가.

어떤 생각이 과연 그들을 모독하고 있는가.. 

 

그들은 오래전 이어오던 그들의 문화와 삶을 위해서 감히 목숨까지도 던지는 치열한 전쟁위에 있다. 그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다는 경쟁력으로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책 후반부로 갈수록 안타까움이 든다.

굶고 살았던 적이 없던 그들은 관광객에게 떼거지로 몰려들어 구걸을 하고, 그들의 터전에 느닷없이 파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보시도 아닌, 적선도 아닌, 먹다 남은 음식을 섞어서 던져주는 한족 여자의 거만하고 오만한 행동의 글에서는 인간이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분노도 공감하게 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티베트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들의 불심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티베트를 지켜주는 방법이 아닐까.

 

티베트에 아련함은 히말라야의 최고봉 초모랑마와 자본주의에 물들어가는 네팔 여행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달라이 라마 망명후 티베트를 떠난 사람들은 네팔의 카트만두에 정착해서 난민촌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카펫 공장을 세워서 2세들에게 조국의 전통과 문화를 전승하고 있단다. (사실 티베트에 대한 느낌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어서 그 뒤의 네팔의 자유로움, 여유로움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알아서 읽기를 바란다.)

 

가보지 못한 나라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하면, 가보지 못한 나라와 그 사람들에 대해 예의를 갖춰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어찌보면 무척 단순하고 소박한 그들이지만 또 어찌보면 살아남기 위해, 후손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남기기 위해 어느 곳에선가 싸우고 있을 그 순박한 사람들을 감히 상상해본다.

 

선생님이 남긴 짧은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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