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나만...살아남아서...미안해..."



초등학교 6학년의 여학생의 독백은 스무 살의 아가씨로 성장할 때까지 하나의 습관처럼 남아 버렸다.

독자는 왜 미안해야만 하는지, 그럴 필요 없다고 위로를 하고 싶어하겠지만 어쩌면 그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주인공은 늘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위축된 것 아닐까..그런 가날픈 마음으로 독백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표지에서 보이듯 무표정의 얼굴에 금방 소리 없는 눈물이라고 흘리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바로 살아남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세상에 남겨져서 미안하다는 또 다른 사람이다.

 

어느 날 가족은 살해당한다.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가족의 참혹함을 확인하기 위해 수학여행지 되돌아오는 가나코의 시간은 멈춰버린다.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끔찍한 사건이 바로 가족의 죽음이다. 죽음에서 살아남은 가나코는 또 주어진 시간을 살아간다. 전혀 다른 사람인 듯, 때론 전혀 감정이 없는 듯, 그리고 때론 슬픔과 충격과 고통에서 벗어난 듯 살아간다. 단지 사건의 잔상은 가끔 찾아오는, 갑자기 찾아오는 4시간의 잊혀진 시간을 몸으로 떠올리는 기억뿐이다.

사는 듯, 죽은 듯, 20대의 시간을 보내는 가나코는 우연히 가해자의 딸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의 행적을 추적한다.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 내 가족을 뺏어간 가해자의 딸이라는 것 말고 무엇을 찾아보고 싶었을까?

 

어쩌면 가나코는 가해자의 딸에게 또다른 가해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나보다 더 못 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지나온 그 고통의 시간을 조금은 보상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가해자의 딸을 발견하고, 그녀의 삶 속에 조금씩 다가가면서 가나코는 이 모든 원인,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가족 중에 한 명임을 차츰 알아간다. 결국, 자신도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의 딸 역시 자신의 가족에 의한 피해자임을 무언중에 알게 된다. 

 

살아가야 하는 날이 많은 20대의 미래가 오히려 더 먼저 죽은 이보다 괴롭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족이 끔찍한 인연과 죽음으로 세상과 이별했을 때 함께 하지 못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을 회색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들의 바람일 뿐이다. 그 고통과 끔찍함을 벗어나서 다행이라는 것은 순전히 독자들의 요구일 뿐이다. 오히려 가해자와 또 다른 가해자, 피해자와 또 다른 피해자처럼 똑같은 결말을 함께 하는 것이 오히려 이 두 소녀에게는 오히려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살인에는 독백이 남아 있었다.

피바다에 주저 앉아

등을 웅크리고 온몸으로 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남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저 자신의 목숨도...

깎아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굳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선을 긋는다는 것이 오히려 미안해지는 결론을 보여준다.

누가 누구를 두둔하고, 탓한다는 자체가 독자의 건방진 시선이라는 생각만 들게 한다.

슬픔을 극복한 듯한 그 모습은 가해자의 가족이나 피해자의 가족이나 똑같지 않을까?

세상에 대해 무덤덤한 시선을 보내는 그 모습이 어쩌면 나와 거울 속의 나처럼 똑같지 않을까?

삶 속에 숨겨야 하는 어두운 두려움, 그것을 작가는 들여다보았다. 세상의 사람들이 떠드는 살인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보다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두 소녀의 모습을 먼저 보고, 그들을 감싸 안고 있다.

 

글 속의 두 소녀는 늘 회색빛을 띤다. 기쁨도 슬픔도 그저 무덤덤한 소녀들이다. 독자로써는 당연히 갑갑함에 책을 몇 번 덮어버리지만 그래도 살아남아야 하는 그 본성이 궁금해지는 소설이 바로 『심홍』이다.

이야기 속의 두 소녀는 자살이라는, 그리고 또 다른 복수라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감, 의무감을 무의식중에 부여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고통이라 표현하기도 미안한 그런 고통 속에 사는 두 소녀의 삶을 이어놓고 정작 자신은 자살을 선택한 작가에 대해 궁금해지지만, 뭐..여기까지..더이상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는 없으니까.

사실 일본소설은 반기는 편이 아니다. 좀 극단적인 내용이 많다고 할까? 너무 가볍거나 아니면 너무 무겁거나..

그런 나의 개인적인 평에 비하면 『심홍』은 살아남아야 하는 두 소녀의 처절한 감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점이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게 하는 매력을 준다.

살아남아서 미안해...라는 말이 이젠 점점 더 희미해지기를 바라는 독자의 마음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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