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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피는 꽃이 있으랴 - 우리 동네 미륵이 들려주는 39가지 이야기
강영희 지음, 박다위 그림, 남선호 사진 / 아니무스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지치다 너무 지치다 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백지 같은 그런 느낌의 날이 있다.
저 깊은 가슴 우물 구덩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그것이 있다.
'부처님, 하느님, 신령님, 동자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님들..제발 굽어 살피소서...'
이렇게 부르짖으며 몸부림을 칠 때가 있다.
답답한 마음과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나를 조이고 있는 그 무엇을 풀었으면 좋겠다. 떨쳐버리면 좋겠다.
무심히 걷던 발끝에 우연히 미륵의 그림자가 밟힌다. 내가 미륵을 만나러 갔었나? 아니면 미륵이 나를 불렀나? 이상하다. 한적한 시골 길에서 우연히 미륵을 만난다. 사람의 발길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장소에 미륵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소리는 풀소리, 새소리, 물소리밖에 없는 그곳에 미륵이 있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곳에서는 미륵을 볼 수 없다. 주변이 너무 밝아서 안 보이는 건가, 형형색색의 도시 모습에 마음이 빼앗겨서 보이지 않는 걸까?
어찌 보면 동네 후덕한 아낙의 모습처럼 보이고, 어찌 보면 못생긴 총각처럼 보이고, 또 어느 때는 부처님의 쌍둥이 동생 같은 모습을 보이는 미륵을 만난다.
'믿는다' '안 믿는다'를 말할 것도 없다.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아궁이의 불길이 사그라들고 / 가마솥은 조금씩 차가워지고 /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지고
문득 솥뚜껑에 맺히는 / 차가운 물방울
아무도 없고 / 흔적조차 사라진 뒤 / 그제야 피어나는 / 한 송이 눈물 꽃
<슬픔과 하나 되기> 중에서
미륵은 그런 존재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부처를 이어 세상을 구제할 그런 미륵보다는 오랜 세월 소박한 사람들이 손바닥이 뜨뜻해지도록 빌던 그 존재가 아마 미륵일지도 모른다.
미련한 인간이 저 잘났다고 이 세상 저 세상 마구마구 휘젓고 다니다가 형체도 가물가물한 미륵 앞에 서면 그 이 세상 저 세상의 잘남이 부끄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존재이다.
남들이 미련하게 살았다고 위안 아닌 위안을 줄때, 미륵은 그래..너 고생했다..이젠 마음 편함만이 너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아주 기분 좋은 위안을 주는 존재이다.
손잡아드릴까요 / 내가 먼저 할까요 / 당신이 먼저 하실래요
혼자 있다가 / 당신을 보니 / 기분이 참 좋아요
혼자 있어 봤나요 / 누구든지 / 혼자라구요
사실 그래요 / 인간만 그런 것도 아녜요 / 장승도 그런 걸요
***
나무도 그렇대요
***
그러고 보니 / 모두 그렇네요
<혼자일 때만 마주할 수 있습니다>중에서
미륵을 돌로 만든 부처라고 말해도 좋고, 석가모니 다음으로 이 세상을 구제할 부처라고 해도 좋다.
아니다..부처님이라는 말도 어쩌면 규율을 지키고, 법문을 들어야 하는 의무감을 챙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행복하고 내 가족이 행복하고, 큰 굴곡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평범한 바램이다. 이는 나도 갖고 싶은 소망이고, 오래전에 살았던 또 다른 사람들의 바램이기도 하다.
이 소박함을 들어주는 것이 바로 미륵이다.
미륵은 이런 존재이다.
오랜 시간을 소박한 사람들과 두런두런 어울려 오랜 시간을 이어오고 있는 존재이다.
『그냥 피는 꽃이 있으랴』는 미륵이 인간들을 어루만져 주는 힐링포엠(Healing Poem, 치유의 시) 39가지를 싣고 있다. 방방곡곡 숨어 계신 39분의 미륵을 후덕한 아낙의 모습으로 보고,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보고, 푸근한 웃음이 넉넉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보여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픔을 피할 수는 없다.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미움과 불신과 배신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상처를 입은 어른은 어찌 보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싶어한다.
『그냥 피는 꽃이 있으랴』는 그런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런 마음을 달래주고, 그런 눈물을 닫아주고, 그런 하소연을 들어주는 미륵이야기가 있다.
달라진 게 있어요 / 이제 당신은 두 손을 맞잡을 수 있어요 / 놓아버린 손을 모아 / 하늘도 만들고 탑고 만들 수 있어요 / 처음도 만들고 아름다움도 만들 수 있어요
<손을 놓아보세요>중에서
짐을 벗으면 날 수 있어요 / 보세요 / 하늘옷을 입었어요
하늘옷은 얇아요 / 몸을 가리기만 할 뿐 / 바람처럼 날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남기지 마세요 / 사랑도 미움도 고통도 기쁨마저도
<마음자리>중에서
창문이 꼭꼭 닫힌 방에서도 숨을 쉴 수 있듯이, 닫힌 마음에도 꽃이 피고 열린 가슴에는 따스한 볕이 든다고 『그냥 피는 꽃이 있으랴』는 말한다.
모든 욕심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욕심이 내 눈앞을 가리면 남을 볼 수 없지만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고통과 아픔의 시작과 끝은 서로 맞닿아 어느 순간 사라진다.
다음에 미륵을 만나면 조용히 마주하며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늘 한결같음을 보여준 것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상처를 입었다고 투정을 부려볼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향해 조곤조곤 말하고 있는 미륵의 목소리를 들어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