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이단아 허균,
살아남기 위해 죽은 듯이 지내야만 했던 광해군
그들은 전라도 부안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전라도의 명기 매창이 있다.
동시대에 살았던, 그리도 너무나도 사람들에게 각인 되어있던 이 세 사람을 '사랑'이란 소재 위에 세웠다.
『나비잠』역사의 인물을 조선사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탄생하게 한 책이다.
KBS 제1회 미니시리즈 공모 당선작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방송 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이란 작가가 자신의 극본을 소설로 먼저 선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유난히 영상미가 돋보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구구절절한 묘사보다 더 눈에 띄는 인물 간의, 장면 간의 간략함속에 보이는 영상미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허균의 능지처참이 첫 장면이다. 까마귀들은 죽음의 냄새를 맡고 도성의 하늘을 맴돈다. 구경꾼들 사이로 황소 다섯 마리가 긴 울음과 함께 끌려나온다. 시대를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사내.
모진 고문으로 온몸이 성한곳이 없는 허균의 주변에 난데없는 한 무리의 나비 떼가 날아든다. 한겨울에 나비떼라..
무엇을 말하고 싶었기에,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나비떼가 날아들까.
군중은 웅성댄다.
또 한 번 시선을 잡는다.
흰 소복의 여인들이 일제히 허균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망측한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부러움을 갖게 하는 장면이다. 여염집 아낙네들과는 다른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또는 세상을 주물러 댈줄 알았던 기생들이 허균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그 사이에 눈에 띄는 여인이 있다.
자넨가...? 허균은 그녀를 향해 모든 것을 말한다. 그녀 역시 눈물로 인사를 한다. 웅성대는 군중 사이에서 고급스러운 비취가 매달린 합죽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선비가 있다.
죽음의 장면에서 서로 눈빛이 부딪히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허균과 광해군과 그리고 매창이다.
그리고 이들과 사랑으로 엮이는, 정으로 엮이는 사람들이 있다. 유희경과 장이, 그리고 능애가 있다.
이들의 관계는 역사와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광해군 10년. 허균은 역모사건과 연류되어 호된 국문을 치루었다. 왕에게 인정받지 못한 왕자였던 광해군은 어렵게 어렵게 권좌에 오르지만 그는 묘호도 갖지 못한 패륜의 왕으로 남았다. 당대 위대한 시인 유희경을 사모하여 그를 위한 시를 짓고 수절했다는 명기 매창의 이야기가 있다.
허균은 여자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인물들을 하나의 스토리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랑'이다. 진부한 사랑도 아닌, 음탕한 사랑도 아닌, 목숨과도 맞바꿀만한 그런 '사랑'말이다.
이런 허균의 생각을 소설 속에서 한껏 빛나게 한다. 신임사또의 수청을 거부해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허균은 그녀를 구명한다. 오해로 기생이 갖고 있던 명성이 바닥을 칠 때 그녀를 제 위치로 올려준 사람이 바로 허균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한낱 사내의 음탕한 농지거리만 보인다. 그만큼 그녀를 아꼈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귀함을 보았을 것이다.
『나비잠』은 어찌 보면 매창을 향한 허균과 그것을 알고 있는 매창의 표현하지 못하고 안타까움이 가득한 로맨스로 보인다. 그러나 기생이란 운명은 만인의 정인이어야 한다. 그 운명에 따른 것일까. 자신이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때, 가장 외로움에 젖어 있을 때 어린 광해군 눈앞에는 또 어린 매창이 있었다. 광해군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못하고 그녀의 마음과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하지만, 천하의 왕위에 있는 광해군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시대를 뒤흔들었던 사내들(괴물 같은 사내들이라는 소개글이 정확하다)과 그들 사이에서 절대로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삶을 꾸려가던 여인을 볼 수 있다. 사랑과 함께 서로 길동무가 되는 연인들이다.
이화우 흩뿌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오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배꽃이 비처럼 흩날리는 봄에 손잡고 울며 헤어진 임
바람 불고 낙엽이 지는 이 가을에도 나를 생각하고 계실까?
천릿길 머나먼 곳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누구를 향한 시일까.
역사 기록에서 해석하는 것은 잊자. 『나비잠』에서는 매창이 허균에게, 광해군이 매창에게 보내는 마음이라 생각해본다.
그리워도 그 그리움이 넘쳐 오히려 가슴이 아픈 그런 이야기이다.
『나비잠』은 매창이 그토록 품고 있던 금홍차를 말하는 것일까..그녀의 머리에 꽂혀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예쁜 비녀일까? 아니면 아이처럼 새록새록 잠든 그 느낌일까..오랜 여운과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한겨울에 죽음을 앞둔 허균을 맴돌던 나비는 사랑을 위해,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날아오른 마음인가.
정신을 놔버린 능애도, 자신의 미래를 버리고 칼끝에 죽어가던 장이도 모두 자신의 사랑을 나비로 날려보냈을까.
사내의 질투에 목숨 하나를 빼앗을 수 밖에 없던 광해군의 마음도 나비가 되었을까.
한겨울의 나비처럼, 잔잔하게 날아가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리라.
오랫동안 깊은 여운이 남는 그런 소설이다. 추후에 나올 드라마도 기대되는 그런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