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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 2009 제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사실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그닥 쉽게 선택하질 않게 된다. **수상작이라는 이름표를 달만큼 뛰어난 수작들이겠지만 '**작품집'이라는 타이틀은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별 흥미가 없는 소재의 글을 의무감(?)으로 읽어야한다는 그 느낌이 싫어서 피한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
우연찮게 <2009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게 되었다.'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란 타이틀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궁금함에 찾아본다.
황순원 문학상은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중앙일보사(주)에서 제정한 문학상이라고 한다. 2000년 9월 황순원님이 세상을 떠난 뒤, '세기가 바뀌고 삶의 양식이 달라진다 해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될 인간성과 한국인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황순원의 문학을 계승하면서 확대·심화시켜 나간다'는 취지 아래 제정되었다.
지난 1년간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중ㆍ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심사위원들의 논의와 토론을 거쳐 그 해의 가장 좋은 작품을 선정한다.
특히 소설가의 지명도나 심사위원의 영향력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 자체의 수준을 기준으로 문단 및 독자 모두가 납득할 작품을 뽑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문학상으로, 시상 대상은 중편소설·단편소설이며, 심사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위해 3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공정성과 신뢰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동감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작가가 바로 박민규이다.
이번 <2009 황순원 문학상>에서 수상작으로 뽑혔다. 그의 이름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란 작품으로 만났기 때문에 어라?? 그 사람이 이 사람이네??라는 시선으로 그의 작품 <근처>를 시작으로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박민규 작가의 수상 소감 눈에 띈다.
독특함과 뚜렷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할까?
그의 작품 <근처>는 오로지 회색의 그 감이 오랫동안 보여주던 작품이다. 읽고 마무리의 마침표까지 확인하면서도 홀로 서있는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스피드있는 회색의 한 획이 계속적으로 눈앞에 남아있다.
죽음이 순서인 사람과 삶이 우선인 사람.
죽음을 앞에 두고 지나간 추억과 잊혀졌던 추억을 끄집어 내는 사람과 살기위해 자신의 속 알맹이까지 끄집어 내는 사람,,서로의 근처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맞닥뜨리는 시간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두고 그저 속아주는 사람과 살기위해 나름의 바둥거림을 보여주는 사람 어느쪽도 뭐라고 타박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근처. 삶과 죽음의 근처, 있는것과 없는것의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아니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후보작으로는 모두 9편이 실려있다.
이야기는 모두 인간을 벗어날 수 없다. 정이 많은 사람이건, 나의 핏줄인 손녀이건, 내가 좋아하는 선배이건, 또는 나와 똑같이 죽어가는 내 누님이건..모든 것을 경험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이다.
실려있는 모든 작품을 통해서 내가 보고 싶었던 이야기. 특히나 내가 보기 싫어하는 어두운 인생의 한 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물론 더럽고 화나고 우울함을 느끼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우울함에 어두움을 직접 겪지 않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글이라는 맛이 여기에 있나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간접 경험으로 나를 이해시키고, 나의 인생의 방향을 다시 잡아보고, 세상의 더럽고 치사함에 대해 단단하게 무장을 하게 되고, 나의 아이들에게는 아름다움만을 그리고 현명하게 살아야함을 콕 짚어서 말해줄 수 있는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글이라 생각된다.
장편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중.단편 소설을 가벼이 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글만큼 그 긴박감과 구절구절 함축되어있는 아름다운 글솜씨는 중.단편의 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장편에서 보여지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모두 제외하고 단편소설이 갖고 있는 세련된 기교에 의한 소설의 특징과 중편소설에서 보여지는 작가가 택한 주제만을 다룬 진지함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