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불 들어갑니다 - 열일곱 분 선사들의 다비식 풍경
임윤수 지음 / 불광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욕심으로 인해 고뇌가 생기고, 고뇌로 인해 굴곡이 생기는 것이 인생이다.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에서 전하는 가르침은 일상에서도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그리고 실행해야 하는 가르침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듯 사람으로 태어나 다시 되돌아 갈 곳은 흙이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 다비식이다. 다비라고 해서 똑같지는 않다. 재료도 다르고 형식도 다르고 연화대의 모습도 다르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열반에 들었던 큰 스님 17분의 다비를 기록하고 있는 현장 취재기이다.
다비(茶毘)란 불교 용어로 불에 태운다라는 말이다. 즉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일컫는 말로 육신을 원래 이루어진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다비식은 가신 ‘님’에 대한 이승에 남은 사람들의 마지막 의식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남은 자의 욕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봉암사 서암 큰스님의 다비에서 부터 백양사 서웅 큰스님, 수덕사 원담 큰스님까지 5년여에 걸쳐 만나게 된 스님의 다비식을 사진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의식으로 보는 다비식이 아닌 살아 생전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그런 기록이기도 하다.

다비식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그저 가신 큰스님들의 자취를 살피고 싶어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남아있는 자들의 세속적인 욕심으로 다비식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이 아쉽다.
큰스님들의 영결식에 무슨 관심을 두려고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 답하려는가.
미물인 인간이 그래도 바라볼 것이 있다는 그 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욕심이 욕심인지도 모르고 팔자타령을 하는 속세의 인간들이 그래도 정화될 수 있는 틈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싶었던 것일까.

큰스님들의 영결식이라고 해서 항상(恒常)이지는 않을 것 같고, 다비라는 목적은 같지만 치러지는 방법이나 방식이 문중이나 절에 따라 다르기에 다비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정리를 해놓은 <스님, 불 들어갑니다>
'거화'라는 외침과 함께 '스님, 불 들어갑니다. 뜨거운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세요'라고 외치는 중생들의 안타까운, 소리없는 절규를 고스란히 느껴본다.
 

연화대는 부처상과 보살상을 앉히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 열반하신 스님들을 모신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게끔 남아있는 자들이 거화를 해드린다. 연화대는 여러가지 모습을 보인다. 돌멩이를 쌓아 올린 석곽 연화대가 있는가 하면, 철궤 연화대도 있고, 새끼줄 타래를 쌓아 만든 새끼줄 연화대, 짚덩이를 쌓아 만든 지푸라기 연화대가 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연화대도 있고 생나무를 쌓아 만들어 가는 생나무연화대도 있다.
그뿐이랴.
스님을 모시는 상여 또한 다 다르다. 아무런 꾸밈이 없는 알관 상여도 있고, 서른두 명이 메는 틀에 상여의 내부까지 생화로 장식한 화려한 꽃상여도 있다. 스님이 열반하시면서 지시하셨으랴..살아 생전 나의 상여는 어찌해라 말씀 하셨으랴..

평생을 수행하시고 또 가시는 길 역시 수행의 끝으로 가셨지만 남아있는 자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여진다. 생각을 한다.
어디까지 스님을 배웅해야 하는 것일까. 작가는 곳곳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거화하는 순간을 지켜봄이 예를 다한 것이라 스스로 구실을 주고 바삐 다비장을 빠져나간다. 많은 이들이 스님을 기억하고자 다비장을 빼곡히 메웠던 추모객들은 어느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에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사람에게 섭섭한가보다.

이런 인간의 욕심과 그에 따른 섭섭함은 미물인 개의 불심보다 못할 때도 있나 보다. 어느 큰스님의 다비식에서는 개 한 마리가 나타나 108라도 올리는 듯 넙죽 엎드린다. 혹여 화상이라도 입을까 쫓아보지만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 타들어 가는 연화대를 바라본단다.
그뿐이랴. 명안 큰스님 다비 때는 키우다 다른 곳에 보내졌던 개 한마리가 명안 스님이 입적에 드신 지 3일 만에 나타나 먹지도 않고 물만 조금씩 먹으면서 밤낮으로 연화대를 지키고 있었단다.

인간의 얄팍한 불심이 꾸짖어지는 부분이다.
무형의 불심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연화대의 과학적인 이야기도 함께 이어진다.
연화대 위에 멍석을 씌우고 연화대 안쪽으로 불기를 가둬 다비를 하는 속불방식도 있고, 아름드리 생나무만 덩그렇게 놓인 곳에 관을 올리고 마른장작과 생나무를 쌓고 두르고 그 위에 마른 솔가지와 생솔가지를 올려 다비하는 방식도 있다.
다비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죽는다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없다. 화려한 꽃상여도 거화한마디에 사그라든다. 인생이란 찰나인 것이다.
아등바등거리고 욕심을 잡어봤자 가야할 일과 해야할 일은 이 세상의 모든 욕심을 놔버리는 일이다.
작가가 말하듯이 '죽은 자에 대한 예'가 의식 절차와 체면치레로 변모하는 모습이 세속인들 뿐 아니라 출가수행자인 스님의 영결식에까지 물들여진다는 사실에 나 역시도 안타깝다.
세속을 떠나 수행의 길에 들어선 그분들에 대한 기대감이 많아서 일까.
세속의 나는 욕심을 부리고 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속세를 떠나 다시 속세에 맞춰야 수행자를 이끌 수 있는 스님들의 모습에 섭섭함이 묻어나는 것은 이 무슨 억지일까.

큰 깨달음을 받으라는 이야기는 없다. 책과 함께 보여지는 사진이 총천연색이었으면..하던 마음도 순간 고쳐먹는다.
이것인가. 비록 책을 통하지만 스님들이 말하고 싶었던 무상을 조금이나마 느낀다면 이것만으로도 기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을 것이다.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태어날 생명이거나 할 것 없이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아등바등 하지도 말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마라. 없는 사람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못한 사람보다 조금 더 출세했다고 거들먹거리지도 말고, 다른 사람보다 가진게 없고, 출세한 사람보다 명예가 없다고 해도 서러워 마라. 영원한 배터리가 없듯 너도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니 겸손하게 살지어다. 이 순간에도 적멸의 순간을 향한 삶의 궤적은 괘종시계의 초침처럼 똑딱거리고 있으니, 사람 사는 것 다 그렇고 그렇다.(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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