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주실록 -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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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관점에서 남겨진다. 그러한 이유로 왕이나 세자의 경우가 역사속에 남겨지며 왕비가 역사에 남을 경우는 남성 위주의 정치 사회에서 정면으로 대립한 경우만 기록에 남게 된다. 이런 인식속에서 공주와 옹주의 삶이 제대로 남겨질 리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공주"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이었을까? 아니란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사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조선시대의 왕과 왕실 문화를 연구해온 작가 신명호 교수가 사실적 근거에 의해 다시 보여주고 있다.

공주란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딸이다. 또한 전국의 처녀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간택에서 최종 선택된 왕비의 딸이다. 여기서 '공주'라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 알고 가자. 본디 '공주'란 중국 황제의 딸들을 혼인시킬 때 '삼공三公이 주관主管'했기에 생겨난 말이다. 곧 공주란 말은  '삼공이 주관해서 혼인시키는 여자'였던 것이다. 황제의 딸들을 혼인시킬 때 '삼공이 주관한' 이유는 공주가 그만큼 존귀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나라에서 주관할만큼 공주는 국보처럼 존귀한 존재이나 반면 그녀들의 삶은 언제든지 수단화될 수 있었다. 국익이라는 이름아래 개인적 삶이 희생되는 운명의 여인들이었다. 조선왕조 500년간 재위한 왕은 27명이며, 추존된 왕은 5명이다. 재위한 27명의 왕에게는 35명의 공주와 77명의 옹주가 있으며, 추존된  5명의 왕에게는 3명의 공주와 1명의 옹주가 있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공주 38명과 옹주78명, 총 116명이다.
이 중에서 왕의 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삶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7명의 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조선공주실록>에 적혀있다.

정선공주(태종의 딸), 경혜공주(문종의 딸), 정명공주(선조의 딸), 효명옹주(인조의 딸), 의순공주(효종의 딸), 화완옹주(영조의 딸), 덕혜옹주(고종의 딸)의 삶을 읽다보면 공주의 삶은 결국 개인의 삶이 우선이 아니라 남성의 정치에서 풀지 못하는 미묘한 권력간의 이견을 여성인 공주를 앞세워 풀어나가는 정치의 비정함에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부의 아들과 결혼한 정선공주의 부마는 태종의 권력에 전혀 해가 없는 집안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공주의 신분에서 노비의 위치로 살아야만 했던 경혜공주는 삼촌에게 동생 단종을 잃는 그 험한 시간을 겪고 출가를 하게 되지만 자식을 위해 세상에 나온 것도 정치적인 한면을 보여준다.

선조와 그의 아들 광해군의 갈등이 심할 때 태어난 정명공주는 태어난 자체가 불운이었고, 광해군측의 노골적인 적대를 받으면서 자라야 했다. 효명옹주의 경우는 인조를 뒤에 업고 조 귀인과 김자점이 측근의 인물을 부마로 간택한다. 이 역시 권력의 핵심이 되고 싶은 자들의 조작이었다.

나라의 치욕스런 자리에 있었던 경우도 있다. 효종의 딸로 알려진 의순공주는 엄격히 따지면 효종의 11촌 고모뻘이 되는 여인이다.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배우자를 조선의 여인으로 정하겠다는 칙서에 의해 조선은 발칵 뒤집힌다. 모든 아비들이 딸이 없다고 숨기기 바쁜 상황에 금림군 이개윤은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딸을 내놓는다. 후세는 이개윤이 딸을 팔아 재산을 챙기려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이개윤의 충절을 비꼬아 말하는 자들의 기록이고 이는 순수한 효종과 나라를 위한 충성이 틀림없다고 적고 있다.

효종은 이런 국가 상황에서 고모뻘의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아 도르곤의 배우자로 보내기로 정한다. 의순義順이라는 봉작명은 나라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대의에 순종했음'을 높이 기리자는 의미로 의순공주봉작명에는 금림군의순공주에 대한 효종의 미안한 마
음과 고마운 마음이 담겨 있다.

그뿐이랴. 망국의 옹주라고 일컫는 덕혜옹주.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모든 사랑을 받은 옹주였지만 식민지였던 조국의 힘없음으로 인해 이름조차 처음부터 옹주라 불리지 못했다. 고종의 승하와 함께 그녀의 삶은 불행이었고, 조선의 딸이라는 자존심을 지켜내기에는 그녀는 힘이 없었다. 정략 결혼의 희생이 되고 자신의 소생과 남편과도 인연이 끊어지고 뒤이어 깊은 병을 앓게 된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조국으로 돌아오지만 남은 것은 세월의 흔적뿐이었다.

<조선공주실록>에서는 가슴아픈 공주와 옹주의 파란만장 삶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공주 개인사에서 끝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변을 설명하기 위해 알려지는 당시의 정치 상황과 공주의 생활을 통해 관련된 궁중문화 즉, 부마간택의 방법이나 전통혼례의 순서등 역사적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는 점은 독자로써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왕비에 대한 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역사에서 이렇듯 공주와 옹주의 삶을 찾아 정리하고, 이것을 독자들에게 읽혀진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됨이 부끄러워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더욱 지나 이것조차 시도하지 못했다면 그 많은 불운한 조선의 공주와 옹주의 삶은 또다시 세월 속에 묻혀 오랜 시간을 지났을 것이다.

고귀한 인생을 희생당한 조선시대 공주들과 옹주들에게 이 책이 작으나마 위로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한 작가의 말처럼 역사적 진실을 조금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은 조선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독자로서의 작은 의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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