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은 추리보단 드라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가 잘 쓰는.



4

공을 던진 순간, 아니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손가락 끝에서 공이 떠나기 직전에 ‘아아, 이건 아닌데.‘ 하는 감이 왔다. 이래서는 힘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팔을 뻗었다. 당연히 좋은 볼이 던져질 리 없다. - P279

비록 전력 외 통보를 받은 몸이지만, 구단이 박정하게 굴지는 않았다. 현역으로 계속 뛸 생각이니 연습장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지금 시점에서 야나기사와에게 손을 내밀어 줄 만한 구단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은퇴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남은 기회는 단 하나, 합동 트라이아웃뿐이다. - P280

야나기사와는 속구 투수는 아니었다. 제구력과 공의 배합, 날카로운 변화구로 승부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변화구가 이제는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린대로 공이 곡선을 그려 주지 않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280

남은 공 다섯 개를 모두 던졌지만 만족스러운 공은 한 개도 없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무네타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런 공은 무네타 씨도 던지겠어."
"컨디션이 저조해서 그래. 시즌 동안 피로가 누적된 데다그런 일까지 일어나서 한동안 연습도 제대로 못했잖아."
‘그런 일‘이란 물론 사건을 말할 것이다. - P281

"이 물건에 관해 뭔가 좀 알아내셨나요?"
"돌아가신 부인의 지인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는 분이 없더군요. 몇몇 분이 남편에게 선물하려던 게 아니겠느냐고 말한게 전부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무슨 기념일도 아니고……………. 내용물이시계라고 하셨죠?"
"X선으로 조사해 본 결과 자명종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이상하죠. 제게 뭐 하러 그런 걸 선물하겠습니까." - P282

"이거 야나기사와 씨 겁니까?"
야나기사와가 잡지 제목에 눈길을 주었다. 야구와는 무관한 스포츠 종목이 쓰여 있다. 구사나기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중략).
"아니요, 신경이 좀 쓰여서요. 이건 배드민턴 전문지잖아요. 야구 관계자가 왜 이런 잡지를 읽는지 궁금했습니다." - P283

헤어지기 전에 무네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속는 셈 치고 얘기나 한번 들어 보지 그래? 참고가 될지도모르잖아."
하지만 야나기사와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물리학자인지 뭔지는 몰라도, 배드민턴에 관해 글을 쓴 사람에게 야구에 관해 의논하러 가자니, 가당키나 한소리인가. - P284

5

품격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야나기사와는 목을 움츠렸다.
"문턱이 높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군. 설마 내가 데이토대학문을 들어서게 될 줄이야."
그 말에 무네타가 슬며시 웃음 지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 긴장할 필요 없잖아."
"성격 탓이야 이런 데는 딱 질색이야." - P287

유가와가 책상 밑에서 뭔가를 또 꺼냈다. 이번에는 야구공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야구공처럼 생긴 플라스틱 구체였다.
"구사나기에게 얘기를 듣고 두 분께 설명해 드리려고 만들었습니다. 안에 센서가 들어 있는 공이에요. 서두르는 바람에조잡하게 만들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 의도는 이해할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유가와는 그 공을 야나기사와에게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 P289

"학생들이 장난하는 거라면 야단을 치겠지만 이건 물리 실험입니다. 더구나 두 분은 아마추어가 아니잖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럼 한번 해 보죠."
무네타가 재킷을 벗었다.
"직구와 변화구를 번갈아 던지세요."
유가와가 말했다.
"구종을 적당히 섞으셔도 괜찮습니다." - P290

"야나기사와 씨의 첫 번째 공입니다."
유가와가 설명을 시작했다.
"회전수는 1초에 32.3회, 회전축은 수평보다 오른쪽으로8.7도 기울어 있습니다. 두 번째 공은 회전축이 수직에 가깝고 9.2도 기울어 있고요. 회전수는 1초에 13.5회. 이건 변화구군요." - P291

무네타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말했다.
"호조를 보이던 시절의 투구 폼과 비교해서 뭘 어떻게 교정해야하는지 알아내는 일도 가능할까요?"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야나기사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호조를 보이던 시절의 비디오는 지겹도록 봤어요.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도 잘압니다. 그걸 교정해도 나아지지 않으니 답답한 겁니다." - P292

6

연습장에서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무네타일 것이다.
구사나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나기사와가 투구 연습을 하고 있다. 무네타가 공을 받고 있다는 점은 지난 번과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협력자가 하나 늘어났다. 옆에 놓인 책상에서 유가와가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 P293

봉투 속에 든 것은 카스텔라 사이에 단팥을 넣은 빵이었다.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유가와 교수님의 도움을받은 이래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야나기사와의 투구폼이 그 정도로 망가졌을 줄은 몰랐거든요. 약간만 교정을 했을 뿐인데도 상당히 좋아진 것 같습니다. 큰 공부가 되었어요. ‘관절의 각속도 같은 용어도 처음 알았고요."
무네타의 말이 공치사로 들리지는 않았다. - P294

"사건의 충격이 여전한 모양이군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다소 께름칙한 마음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부인이 야나기사와가 현역 생활을 계속하는 데 반대했었나 봅니다."
(중략).
"부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황이 바뀌었다는 말씀이군요" - P295

(전략).
그렇게 전제한 뒤 구사나기는 야나기사와 다에코가 살해되었을 당시 자동차에 놓여 있던 쇼핑백 얘기를 꺼냈다.
"아닌 게 아니라 묘한 구석이 있군. 그 시계를 누군가에게선물할 작정이었다면 당연히 그 상대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거야?"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 휴대 전화통화 이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빠짐없이 물어봤지만헛수고였지." - P297

구사나기가 입꼬리를 비죽이 내려뜨렸다.
"그걸 뭐 하러 가르쳐 주겠어. 알아 봐야 이래저래 의심만생길텐데."
흠, 하며 유가와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바람을 피운거 아닐까 하고?"
"주부가 대낮에 한껏 꾸미고 외출을 했다. 게다가 그런 사실을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수상하다고 여길걸. 그런 쓸데없는 일을 알려 줄 필요가 있겠어?"
"그래,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 P298

7

운동장을 빠져나온 후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도중에 안면이 있는 기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야나기사와가 전력 외 통보를 받았을 때 은퇴하기에는 이르다는 요지의기사를 써 준 기자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어서 걸음을 늦췄다. - P299

오늘 첫 번째 트라이아웃이 있었다. 전력 외를 선고받은 각구단 선수들이 모여 각자의 실력을 어필했다. 어느 구단의 눈에라도 들면 재고용의 길이 열리겠지만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야나기사와는 세 명의 타자와 경기를 펼쳤다. 실전처럼 주자가 1루에 나가 있는 설정으로, 간간이 견제구를 던져 가며세트 포지션으로 던졌다. - P300

운동장 옆 보도를 남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낯익었다. 속도를 늦추고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틀림없다.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서둘러 차창을 내리고 말을 건넸다.
"유가와 교수님!"
그러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유가와는 고개를 숙인 채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가와 교수님! 하고 다시 한 번 불렀다. - P301

유가와 조수석에 태운 채 두리번거리며 찻집을 찾았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눈에 띄어 그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부러 보러 오시다니, 놀랐습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지."
야나기사와가커피잔에 손을 대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우연히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 P302

(전략).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일단 야구에서 물러나기로 한 이상더는 교수님께 폐를 끼칠 수 없습니다."
야나기사와가 양손을 무릎에 얹고 다시 한 번 깊이 고개를숙였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재기해서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그러기는 힘들 것 같으니 다른 형태로라도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만....... 정말 그만두실 작정인가요? 오늘 있었던 트라이아웃을 보고 어느 구단에선가 손을 내밀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 P304

두 사람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와 야나기사와의 자동차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유가와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죠?"
"아, 그게, 칠이 좀 이상한 형태로 벗겨져 있어서요."
그 말에 야나기사와가 조수석 쪽으로 다가갔다. 유가와의말대로 창틀 조금 아래쪽의 칠이 벗겨진 채 녹이 번져 있었다.
"여기도 그렇군요. 그리고 여기도요."
유가와가 보닛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 P305

"아니요. 사실은 운전이 오랜만입니다. 아마 그날 세차한이후 처음일 거예요. 그 직후에 사건이 일어났으니까요."
"사건이 있던 날 부인이 차를 몰고 나가셨죠?" - P305

"무슨 문제라도...... 녹이 좀 묘하게 슬기는 했지만, 달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안 그래도 이쯤 해서 새 차로 바꿀까 하던 참이었으니 걱정 마세요."
그러자 물리학자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군요.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요. 금속이 이런 식으로 녹슨걸 본적이 없거든요."
"역시 과학자는 관찰력이 대단합니다." - P306

8

(전략).
유가와에게 이상한 질문을 받은 것은 어제저녁이었다. 야나기사와 다에코가 살해된 날 혹시 도쿄 어딘가에서 약제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강알칼리성 약제일 거야. 소화기 분말로 추정되는데."
유가와의 말투로 미루어 급한 일인 듯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유가와는 야나기사와의 자동차 얘기를 꺼냈다. 차에 난 흠집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 P307

호텔에서 발생한 사고란 자동차 사고였다. 지하 주차장 출입구를 대형 트럭이 들이받은 것이다. 높이 제한을 무시해서생긴 단순한 실수였다. (중략). 주차장 출입구 쪽으로 대량의 소화기 분말이 분사된 것이다. 사태를 알아차린 경비원이 스위치를 껐을 때는 이미 3분가량 분말이 분사된 후였다.
구사나기는 유가와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에 관해 말해 주었다. - P308

"소화제가 출입구 부근에서만 분사된 덕에 주차돼 있던 차에는 영향이 없었어요. 다만 분사되는 시점에 몇 대가 출입구를 통과했으니 그 차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는 했는데, 거품 때문에 번호판을읽기 힘들어서 연락을 취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 영상을 볼 수 있을까요?" - P309

자동차 몇 대가 그 거품 속을 통과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유가와가 "잠깐만!" 하고 외쳤다.
"방금 지나간 차 아니야?"
영상을 되돌려 확인했다. 은회색 자동차가 출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번호판은 보이지 않지만 생김새가 야나기사와의 차와 흡사하다. - P310

"소화기 분말의 성분을 알 수 있을까요?"
유가와가 경비원에게 물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
그러고서 경비원이 팸플릿을 찾아왔다.
"역시 수성막포 소화약제로군."
팸플릿을 읽고 난 유가와가 중얼거렸다. - P310

"야나기사와 투수의 부인이 사건 당일에 이 호텔을 방문했던건 확실해 보여."
걸으면서 유가와가 말했다.
"문제는 호텔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건데."
"일단 프런트에 가서 확인해 볼까?"
"아마 소용없을 거야. 밀회가 목적이었다면 유부녀가 프런트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겠지. 남자가 먼저 체크인을 해 놓으면 그 방으로 직접 갔을 거야." - P311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두 사람은 호텔 내부 시설들을 확인했다. 1층에 티 라운지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커피를 주문하면서 종업원에게 야나기사와 다에코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 이분 말이군요."
"기억나십니까?"
"몇 번 오신 적이 있어요. 주로 허브티를 주문하셨던 것 같습니다." - P312

"요즘은 통 안 보이시던걸요. 아마 3주쯤 전에 오신 게마지막일 거예요."
그녀의 기억은 정확했다. 사건은 20일 전에 발생했다.
"그때도 남자분과 함께였습니까?"
"그랬을 거예요. 아, 맞다!"
종업원이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크를 주문하셨어요. 쇼트케이크요. 그러면서 초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 P313

그리고 다음 순간 유가와가 눈을 화들짝 떴다.
"내용물이 시계라고 했지? 그렇군! 그럴 가능성도 있겠어."
"뭐야, 무슨 말이야?"
그러자 유가와가구사나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봐,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좀 해야겠어. 그 남자를찾아줘." - P314

9

(전략).
"급작스레 나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구사나기가 사과했다.
(중략).
야나기사와가 앉자 두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종업원이 다가오자 맥주와 음식을 주문했다.
"차체의 녹슨 부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가와가 물었다 - P315

"사고차량이 소속된 회사에서 배상하겠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다에코 그 사람이 그런 곳에는 왜 간건지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소문대로 맛은 있었지만 야나기사와는 다에코의 의문스러운 행적이 마음에 걸려 느긋하게 음미하기 어려웠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유가와가 "예의 물건은 가지고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 P317

야나기사와는 옆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에서 포장지에 싸인상자를 꺼냈다. 사건 당일 다에코의 차에서 발견된 물건이다.
"내용물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뜯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제가 잠시 보겠습니다."
(중략).
"테이프를 떼었다 붙인 흔적이 있어. 일단 풀었다가 다시포장했어."
"이걸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군."
야나기사와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 P317

야나기사와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흰 요리사 복장을 한 체격이 다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쉰 전후로 보였다.
"부인과 만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양, 이라고 합니다. 대만에서 왔어요. 이 음식점 주인입니다."
"대만......."
야나기사와는 숨을 삼켰다. 다에코가 대만 사람을 만나 내일을 의논하다니…………. - P318

"야구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국외로 진출하는 경우도 각오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될 경우 당황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제게는 은퇴를 권해 왔거든요."
"그게 부인 나름의 독려 방식이었습니다. 어디라도 두말없이 따라가겠다는 태도를 보이면 남편은 분명 마음이 해이해질 것이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고 싶다. 그러시더군요." - P319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지 않았습니다."
"왜죠?"
"대만에서는,"
유가와가 말했다.
"자명종을 남에게 선물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답니다." - P320

야나기사와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께 얘기를 듣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아내의 진심을 알았어요."
"부인은,"
양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남편의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꼭 다시 보고싶다고 하셨어요" - P321

10

(전략).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대만의 관습까지 그렇게 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
구사나기가 말했다.
"대만에는 우수한 물리학자가 많아. 그들에게는 멋진 구석이 있는데, 설사 비과학적이더라도 문화와 인습을 경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시계에 관해서도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어." - P322

양은 휴대 전화가 있지만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 연락하려면 가게로 전화하는 것이 빠른 길이었다. 야나기사와 다에코도 그러한 사정을 알기에 만나자고 약속할 때는 가게로 전화를 걸었던 듯하다. - P323

"투수란 그런 존재야. 그리고 양 씨를 만난 이후로 야나기사와 투수는 확실히 변했어. 내게 새삼 협조를 요청했을 뿐 아니라 연습에 임하는 자세도 크게 달라졌지. 그 결과, 과학적인데이터만 봐서는 전성기와 견주어도 투구에 손색이 없어."
"아니, 그럼 부활할 수 있다는…………..?
그때 쉿, 하고 유가와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마운드에서 야나기사와가 투구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 P324

6장

위장하다

1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지만 융통성이없다는 게 맹점이야."
조수석에서 유가와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산속의 외길만 줄기차게 보여 주잖아.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차라리 다음 분기점이 나올 때까지 꺼두는 게 낫겠어." - P395

"강수 확률이 90퍼센트로군. 예보로 봐서는 곧 비가 올 모양인데, 그것도 꽤 많이 올 것 같아."
"정말이야? 이거 낭패인걸. 우산도 없는데."
"차를 호텔 현관 앞에 세우면 괜찮을 거야."
"주차장이 멀리 있으면 어쩔 건데? 나만 쫄딱 맞으라는 말이야?"
"둘 다 젖는 것보다야 낫지. 재킷이랑 짐은 내가 들고 내릴게.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거야." - P396

구사나기 곁으로 돌아온 유가와는 어느 틈엔가 비닐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 우산은 어디서 났어?"
"방금 그 여자가 줬어."
"여자? 운전하는 사람이 여자였어?"
"응. 젊은 여자였어. 게다가 상당한 미인이던걸 타이어를교체하고 있는 사람이 홀딱 젖은 모습이 안돼 보이더라는 거야.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다니, 아직은 세상이 살만해." - P398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그리운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가와와 마찬가지로 대학 시절 배드민턴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 둘이다.
"이봐, 자네들, 드디어 때가 왔어."
고가라는 친구가 구사나기와 유가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독신은 자네들 둘뿐이라고, 잊지는 않았겠지?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모두에게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해 주자는 약속 말이야." - P399

"멀리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해. 그래도 이 호텔이 음식이 맛있는 데다 온천도 있고 각종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서 꽤 괜찮아. 모처럼 왔는데 다들 느긋하게 쉬다가."
다니우치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와 현청에 들어갔다. 거기서 지역 발전을 위해 일하다가 2년 전에 그만두고 이곳 읍장 선거에 입후보했다. 다니우치의 아버지도 읍장 출신이다. 결과는 단독 후보로 당선. - P400

2

가쓰라기 다에가 방을 나선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중략).
식욕은 전혀 없지만 뭐라도 먹어 둬야 했다. 샐러드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와인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유리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머금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별장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신경이 쓰였다. 질척이는 땅을 걸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우울했다. - P4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을 설득해서 종단을 세우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우혁은 그런 미래를 상상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애당초 소년을 둘러싼 다툼은 새천년파와 조강현이 맞붙는 구도였다. - P113

이쯤에서 만족하는 게 최선이었다. 드라이브를 통해 20년간의 여정이 매혹적인 피날레를 맞이했음을 받아들이고, 이만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형의 말대로, 서른넷은 멀끔한 일상에 뿌리내릴 나이다.......
형이 또라이 기질이라 부른 것도 고쳐질까? - P114

소년이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을 읽고 거절할 준비를 하는 중인가 싶었지만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추적이 붙었다. 검은 그랜저야.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고있어"
"그냥 경로가 겹친 거 아니야? 양양고속도로 타고 내려가는 차가 한둘도 아니고."
"이건 내가 봐서 아는 거니까 말 들어 갓길에 세워라." - P115

"예언 적중률이 애매한데, 추적이 붙었다는 건 알아도 둘중 누구 편인지는 모른다니."
"나도 답답하다만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야. 악령한테 몸을 넘겨주면 반나절은 드러눕게 돼."
자동차가 다시 한 차례 강줄기를 건넜다. - P116

"여기서 가평 방면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 어쩔까?"
룸미러에 비친 소년은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내비게이션 우측 상단의 시계가 43분에서 44분으로 변하는 순간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악령이 뭔가 다른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 더는 말해주지않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몸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건가? 네가 도망치는 중이라서?"
"확실치 않아. 지금 상태가 최선이라 보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부활은 가능하지?"
"나도 도의란 걸 안다. 네가 여기서 개죽음당하게 두진 않아." - P117

사람을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속 180킬로미터의 속도로 충각 돌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방법은, 정확한 각도와 속도로 선공하는 것이다.
우혁은 웃음이 침처럼 질질 새는 것을 느꼈다.
경직된 뺨이 불규칙적으로 경련하며 이가 딱딱 부딪혔다. - P118

"안전벨트 매고 가방 꽉 잡아. 충돌하면 바로 산 쪽으로 도망가고."
우혁은 블랙박스에 녹음되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고,
잠시 심호흡한 뒤 덧붙였다.
"저것들도 부활시켜줘야 된다. 죽으면 과실비율 계산에 불리해."
K5를 피하고, 룸미러로 후방을 살피고, 시속 180킬로미터로 주행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들을 또박또박 늘어놓을 수있었을까?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난 와중에도 이성은 계속 과실 비율을 계산하고 있었단 말인가? - P119

우혁은 헐떡이며 아, 아, 아, 하고 외쳤다.
머릿속 슬롯머신의 세 줄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지며 7.7·7을 띄웠다.
잭팟!
압도적인 속도가 굉음으로 화했다. 제네시스의 전면부가K5의 운전석을 옆에서 들이박았고, 차벽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했으며, 넘쳐흐르는 운동량이 두 자동차의 융합체를 차도 가장자리까지 떠밀어갔다. 철제 가드레일이 바깥으로 휘었다. 우혁은 시간이 느려지며 세계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 P120

휘도는 동전을 향해 뻗는 손이 있었다. 소년의 손이었다.
갑작스럽게도 다른 손이 뻗어나와 소년을 붙들었다. 굵고 억센 손이었다. 조명이 이동하듯 그늘이 슬쩍 물러나며 손의주인들이 보였다. 건장한 남자가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말하고 있었다. - P121

(전략).
"어르신, 남서윤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딸입니다. 가서 보시죠. 이름도 지어주시고요."
"이름은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마지막 날에 현세의것들은 다 소용이 없어지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여덟 달이라도 인간에게는 긴 시간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이름은 세희로 하고, 성씨는 어머니 것을 따서 지어라 남서윤은 애를 가진 줄도 모른 채로 여기에 왔으니 아비 성씨를 물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도 곧 가서볼 테니 먼저 가서 전해라."
"남세희‘군요. 알겠습니다." - P122

그 모두가 소년이 알던 이들, 혹은 아직 모르지만 언젠가알게 될 이들의 피였다.
온 세상 사람 80억의 피…………….
문득 우레 같은 음성이 들려오더니 천사들이 날아와 일곱개의 그릇을 기울였다. 그릇 하나가 쏟아질 때마다 사람들의몸에서 종기가 자라났으며 바다의 모든 생명이 죽었고 강과샘이 피로 변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그 피를 말리더니 구름마저 불태웠고, 왕좌로부터 다시 큰 음성이 났다. - P123

우혁은 눈을 떴다. 우그러진 프레임 너머로 햇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밤새도록 격렬한 파티를 즐긴 후 열일곱 시간짜리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듯 노곤했다. - P123

박살 난 디퓨저 병이 주의를 끌더니 쇠비린내와 샌들우드 향의 불균등한 조화가 니치 향수의 새로운 라인업처럼 느껴졌다. 톱 노트는 피비린내, 미들 노트는탄내, 베이스 노트는 샌들우드 향, 요새 유행은 그런 식인가?
응? 품에서 꺼낸 휴대전화는 액정이 깨졌을 뿐만 아니라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다. 차내 역시 피범벅이었다.
현실적인 긴박감이 신비 체험에서 기인한 고양감을 몰아냈다.
이게 도대체 전치 몇 주짜리야?
병원비는?
하지만 몸을 살펴본바 유리 파편에 찢긴 목덜미가 흉터 없이 아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근육통조차 없었다. - P124

우혁은 변형된 가드레일 바로 앞에 서고서야 자신이 산등성이가 아니라 교각을 지나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칫했더라면 30미터 아래의 개천으로 떨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는물줄기 양옆의 밭과 컨테이너 주택과 비닐하우스가 있는 한적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소년이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 P125

그랜저 운전자의 얼굴을 확인한 우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경찰 아니었네."
일전에 소년이 학원으로 도망 왔을 때 내부 수색을 요구하던 경찰 중 하나였다. 그때도 사칭범일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재회하다니 생뚱맞았다. - P125

우혁은 자신의 존재가 세상 앞에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며수줍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네시스가 아버지 차인지라 사정을 말씀드려야 하는데, 휴대폰이 고장 나서 연락이 안 되네요. 보험도 아버지거로 적용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쪽 담당자 연락처도 모르고요. 이거 보험 처리랑 손해배상이………… 아니, 솔직히 이게제 잘못 아니라는 거 아시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할 말이 없어서 멋쩍은 듯 헤헤 웃었다.
입에서 짠맛이 났다. - P126

#3
이미 그리고 아직
Already but not yet


그랜저 운전자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갓길로 물러나 있던 중년 무리가 다가왔다. 119에 연락했으니 일단 앉아서 기다리라고,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무리할 필요 없다고 했다. 우혁은 자신이 멀쩡하다고 주장했지만 중년들의 입장은 확고했다. 대형 사고를 겪은 직후에는 뇌가 천연마취제를 분비하므로 고통에 둔감해진다는 거였다.  - P129

. 전치 4주라도 얻어내야 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관건은 자동차 보험이 아버지 명의이며 자신은 그 보장 내역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부모님께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나 싶은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상가 부동산을 지나며 얼핏 보았던 매물 사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휘돌았다. - P130

우혁은 부모님의 노후 대비 수준을 검토했고, 아버지가 못난 아들놈을 위해 전세 자금을 빼진 않으리라 판단했으며,
K5에게 과실 비율을 떠넘길 방편을 고민해보았다. 목격자들이 K5의 위협 운전을 증언해주더라도 먼저 들이받은 쪽은 자신이었다. - P130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우혁은 앞으로 자신이 이 대답을 무수히 반복할 것임을 직감했다. 잘 모르겠다는 것 외에 어떤 해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당신네들의 몸이 포도주틀 안에 쑤셔져 들어가 피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았다고? 혹은 요세푸스와 바르 코크바의 환생―그것을 환생이라 부를수 있다면-인 누군가가 30미터 아래로 도망쳤다고? 충돌전 10분간의 블랙박스를 제출하며 K5 운전자의 돌발 행동을 규탄하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게 최선일 터였다.
그렇게 구급차가 왔으며 경찰도 왔다. 질문을 몇 가지 듣긴했으나 그 내용은 의식이 남아 있는지, 신상 명세가 어떻게되는지 가족 연락처를 기억하는지 체크하는 선에서 그쳤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을 감수하고 추천하며]

지능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펼쳐진
인간 뇌의 경이로운 여정

책을 감수하는 과정은 대개 고역이다. 오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다보니 종종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흥미로운 책, 수려하게 번역된 글을 만나면 오히려 즐겁다. - P11

다섯 번의 놀라운 혁신


인류가 지닌 지적 능력의 기원과 진화를 이해하는 것은 뇌과학자들에게도 여전히 도전적인 질문이다. 맥스 배넷의 <지능의 기원>은 이러한 궁금증에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능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디로 향하는지를깊이 있게 탐색하는 탁월한 저작이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철학의 경계를넘나들며 인간 지능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인류 문명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역작이다. - P12

(전략).
이러한 다섯 번의 혁신적 도약은 인간 지능의 복잡성과 적응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맥스 배넷은 이 다섯 번의 혁신이 신경 구조와기능에 중요한 도약을 이뤄냈고 오늘날의 인간 지능을 탄생시킬 수 있었음을강조한다. 이러한 발상이 독창적인 이유는 지능의 발달을 뇌의 진화적 혁신과 환경 적응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 P13

인공지능은 어디로 가는가?

《지능의 기원》은 인간 지능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맥스 배넷은 먼저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비교를 통해 기술 낙관주의에 신중한 질문을 던진다.  - P14

맥스 배넷의 《지능의 기원》은 단순한 뇌과학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신경과학뿐 아니라 진화생물학, 비교심리학,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를 종합해 인간 지능의 기원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다. 이것은 인류 지능의 기원과 진화를 아우르는 사고의 향연이자 우리 자신이라는 지적 존재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 P14

 뇌과학자뿐 아니라 인공지능 연구자, 철학자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적으로 흔들어놓는다. 이 책을 덮을때쯤, 독자는 인간 지능이라는 놀라운 기적에 다시 한 번 경외감을 표하게 될것이다.


정재승(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 융합인재학부 학부장) - P15

[들어가며]

AI의 눈으로
인류지능의 역사를 재구성하다


우주 진출 경쟁, 쿠바 미사일 위기, 소아마비 백신 도입 등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1962년 9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다는 사건들만큼이나 중요한 이정표가 하나 세워졌다. 1962년 가을에 나온 미래 예측이었다. - P18

. AI는 이제 체스나 바둑 같은 게임에서 인간 챔피언을 이기고, 영상의학과 전문의처럼 방사선 이미지에서 종양을 찾아낸다. AI가 자동차 자율주행을 선보일 날도 멀지 않았다. 지난 몇 년동안은 대형언어모델 large language model, LLM*에서 이룬 새로운 발전 덕분에 챗GPTChatGPT 같은 제품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 레이블링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글을 학습하는 인공지능 모델-옮긴이 - P20

AI 발전의 긴 여정에서 사람 수준의 지능을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가까워졌느냐는 질문에 답하기는 늘 어려웠다. 1960년대에 문제해결 알고리즘을만드는 데 성공한 후에 AI의 선구자 마빈 민스키 Marvin Minsky는 이와 같이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앞으로 3년에서 8년 안에 평균적인 사람의 일반지능을갖춘 기계가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P20

이 목표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판단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있다. 만약 AI 시스템이 한 과제에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낸다면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를 그 AI 시스템이 이해했다는 의미일까? 사람보다훨씬 빠른 속도로 계산하는 계산기는 실제로 수학을 이해하는 것일까? - P21

현재 사회 곳곳에 빠르게 확산되는 챗GPT가 출시되기 1년 전인 2021년에 나는 그 전신인 GPT-3라는 LLM을 사용하고 있었다.* GPT-3는 인터넷전체에서 수집한 방대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훈련을 했고, 프롬프트prompt가주어지면 이 말뭉치corpus를 이용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대답을 내놓는 패턴매칭 pattern matching을 시도했다


2024년, 챗GPT는 GPT-3의 오류를 개선한 GPT-40 버전의 기술을 사용한다. 옮긴이 - P21

GPT-3와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 성취와 오류 모두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GPT-3는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똑똑하다가도 어떤 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멍청했다. GPT-3에게 18세기 감자 농업*과 세계화의 관계를 주제로 논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하면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인 논문을 받아볼 수 있다. 그런데 ‘창문 없는 지하실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무엇이보일까?‘라는 상식적인 질문을 하면 완전히 비상식적으로 대답한다.³


* 감자는 관상용 식물로 키우다가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주식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옮긴이 - P22

3. 내가 GPT-3에게 다음의 문장을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창이 없는 지하실에 들어와있다. 하늘을 바라보니..." 그러자 GPT-3는 이렇게 답했다. "빛이 보인다. 나는 그것이 별이라는 것을 안다. 행복하다." 실제로는 지하실 안에서 위를 올려다 봐도 별이 보일 리가 없다. 천장만 보일 것이다. 2023년에 출시된 GPT-4처럼 발전한 LLM은 이런 상식적인 질문에 더 정확하게 대답한다. 이 부분은 22장을 참고하라. - P498

자연의 단서

인류는 비행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했을 때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게오르크 데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은 옷에 귀찮게 달라붙는 우엉열매의 가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찍찍이 벨크로 Velcro를 발명했다.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은 번개가 치는 모습을 보고 전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실마리를 번쩍 얻었다. 인류 혁신의 역사에서 자연은 오랫동안 뛰어난 길잡이 노릇을 했다. - P23

뇌를 연구하다 보면 손에 잡힐 듯 말듯 감질나면서도 짜증이 난다. 눈에서 불과 3센티미터 정도 안쪽에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상이 자리 잡고있다. 그 안에 지능의 본질, 사람과 비슷한 AI를 구축하는 방법, 인간이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은 멀리 있지도 않으며 그 비밀 덕분에 매년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머릿속에서 뇌가 수백만 번 재구성된다 - P24

뇌 박물관 이용하기

나는 AI를 작동시킬 방법은 딱 한 가지, 인간의 뇌와 비슷한 방식⁵으로 연산을 수행하는 것이라 늘 확신해왔다.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202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AI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인류는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원자를 쪼개며 유전자를 편집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바퀴 하나도 발명하지 못했다.
인류의 발명품이 훨씬 많으니까 다른 동물의 뇌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와 달리 너무나 독특하고, 우리를 똑똑하게 만드는 비밀이 특별한 뇌 구조에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P25

5. "토론토대학교 컴퓨터과학자들이 인공지능에서 이룬 혁신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상을 받다(U of T computer scientist takes international prize for groundbreaking work in AI)"
된 힌턴의 말에서 인용. U of T News. January 18, 2017, https://www.utoronto.ca/news/u-t-computer-scientist-takes-international prize-groundbreaking-work-ai. - P498

동물계 전반에 보이는 이러한 뇌의 유사성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유사성이 바로 단서다. 지능의 본질에 관한 단서, 우리 자신에 관한 단서, 우리의 과거에 대한 단서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뇌는 복잡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뇌는 의도가없고 혼란스러운 진화라는 과정으로부터 등장했다. 생명체 번식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형질의 작고 무작위적인 변이 variation가 선택되거나 제거됐다. - P26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뇌를 조사하고 그 작동방식과 그로 인해가능해진 기능들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나아가 인간으로 이어진 계통 안에서 뇌가 점점 복잡해진 과정을 추적해 각각의 물리적 변화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지적 능력을 관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결과로 탄생한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Theodosius Dobzhansky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생물학에서는 진화의 관점으로 비춰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P26

층이라는 미신

인간의 뇌를 이해하기 위한 진화적 틀을 제안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런 틀은 오랜 전통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0년대에 신경과학자폴 매클레인 Paul MacLean이 공식화한 틀이다. 매클레인은 인간의 뇌가 세 개의층(3중뇌 triune brain)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층은 또 다른 층 위에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세웠다. - P28

매클레인은 파충류의 뇌가 공격성, 영토 지키기 같은 기본적인 생존 본능의 중추라고 주장했다. 둘레계통은 공포, 부모 애착, 성욕, 배고픔 같은 감정의 중추다. 새겉질은 인지기능의 중추이며 언어 능력, 추상 능력, 계획 능력, 지각 능력을 부여해준다. - P28

현재 매클레인의 3중뇌 가설은 신뢰를 잃었다. 그 이유는 부정확해서가 아니라(가설이란 것은 모두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뇌가 진화하고 작동하는 방식⁸에 대해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 가설에서 암시하는 뇌 해부도는 틀렸다. - P28

8. Cesario 외, 2020 에서는 매클레인의 3중뇌 모델에 대한 현재의 관점을 잘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그의 3중뇌 모델에서 생기는 문제 대부분은 대중적 성공 때문이긴 하다. 매클레인의 연구를 실제로 읽어보면 그는 자신의 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기꺼이 인정한다. - P498

매클레인의 3중뇌 가설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가장 큰 문제가 남는다. 매클레인이 말하는 기능적 구분이 우리 목표에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의 뇌를 역설계해서 지능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인데, 매클레인의 3중뇌 가설은 너무 광범위하고 각 시스템의 기능이 너무 모호해서 출발점조차 제시하지 못한다.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진화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 P29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Richard Feynman은 죽기 직전에 칠판에 다음과 같은글을 남겼다. "창조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다." 뇌는 AI를 구축하는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며, AI는 우리가 뇌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에게는 뇌에 관한 새로운 진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뇌의 해부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현대적이해는 물론이고, 지능 그 자체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 P30

모험의 이정표

쥐 수준의 AI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그다음에는 고양이 수준의 AI를 만들고
이런 식으로 쭉쭉 진행해서 사람 수준의 AI까지 가보자.⁹
--얀르쿤 Yann LeCun, 메타의 Al 수석 과학자 - P30

9. 얀르쿤 (@ylecun)이 2019년 12월 9일에 이 글을 엑스에 올렸다. - P499

사실 최초의 뇌에서 시작해 인간의 뇌가 진화한 과정 전체를 요약하자면 딱 다섯 번의 혁신이 누적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뼈대다.
이 다섯 번의 혁신이 이 책을 구성하는 지도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각각의 혁신은 뇌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등장해 동물들을 새로운 지적 능력의 포트폴리오로 무장시켰다. 이 책은 각각의혁신이 왜 진화했고 어떻게 작동하며 현재 사람의 뇌에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설명할 것이다. - P31

무엇보다 이런 혁신은 현재 AI 분야에서 알려진 내용에 입각해 이해해야한다. 생물학적 지능에서 일어났던 혁신 중에는 AI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과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 혁신 중 일부는 AI 분야에서 잘 알려진 지적기능에 해당하는 반면 어떤 기능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 P31

나에 대해서

내가 평생을 뇌의 진화에 대해 고민하고 지능을 갖춘 로봇을 만드는 데 헌신해왔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략). 나는 내가 읽고 싶어서이 책을 썼다.
나는 AI 시스템을 현실세계의 문제에 적용하려 시도하면서 사람의 지능과 AI 사이에 존재하는 당혹스러운 차이를 마주하게 됐다.  - P32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당신처럼 뇌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경험을 대부분 정의하는 신체 기관에 매력을 느끼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뇌는 지능의 본질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처럼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답도 제공한다. - P33

《지능의 기원》은 다른 많은 사람의 연구를 종합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이미 마련된 조각들을 한데 모았을 뿐이다. 나는 책 전체에서 실제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에게 공로를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지 못한 부분이있다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 P34

사다리와 우월주의에 대한 마지막 당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전체 이야기의 행간에는 위험한 오해가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오늘날 살아 있는 다른 동물의 능력을 자주 비교하는데, 특히 우리 조상과 가장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동물을 구체적으로언급한다. 다섯 가지 혁신이라는 이 책의 뼈대 자체는 오로지 인간 계통의 이야기, 우리의 뇌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느냐는 이야기에 관한 것일뿐이다. - P34

진화라는 개념이 발견된 이후에도 자연의 위계는 계속 살아남았다. 하지만 종에 위계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잘못됐다. 오늘날 살아남은 좋은모두 말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들의 조상은 지난 35억 년의 진화 과정에서살아남은 존재들이다.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생존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살아남은 생명체는 모두 1등이다. - P36

비둘기, 다람쥐, 참치, 심지어 이구아나도 시각정보를 인간보다 더 빠르게 처리¹⁰할 수 있다. 어류는 실시간 처리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할 때 미로 같은 바위 사이로 물고기가 얼마나 쏜살같이 움직이는지 본 적이 있는가? - P36

10. Healy 1, 2013. - P499

물론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다 보니 자신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고, 인간과 비슷한 AI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나는 인간우월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인간 중심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다. - P37

1.

뇌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능은 있었다


최초의 뇌가 등장하기 전에도 생명은 지구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다. 여기서 ‘오랫동안‘이란 30억 년 정도를 의미한다. 뇌가 처음 생겨나 진화할 무렵 생명은 이미 수없이 많은 도전과 변화의 주기를 견뎌온 상태였다. - P43

 초기의 DNA 유사 분자는 수명이 짧았다. 이 분자사슬을 만든 화산의 운동에너지가 필연적으로 그 분자사슬을 끊어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른 결과다. 이 불변의 물리법칙은 엔트로피 entropy, 곧 한 시스템 안의 무질서도가 필연적으로 항상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P44

수없이 많은 뉴클레오티드 사슬이 무작위로 만들어지고 파괴되다가 행운의 서열이 우연히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자비한 엔트로피의 맹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최초의 반란이었다. 새로 등장한 DNA 유사분자는 그 자체로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생명 출현의 밑바탕이 될 가장 근본적인 과정을 수행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복제한 것이다.² - P44

1. 뇌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능은 있었다


2. RNA 세계RNA World에 대한 논문과 원래 RNA가 단백질 없이도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었다는 중거는 Neveu 외, 2013을 참고하라. - P499

여기서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 두 번의 진화적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보호성 지질lipid 방울이 DNA 분자를 포획한 사건이다. 이 과정은 비누로 손을 씻을 때 비눗방울이 생기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이뤄진다. - P44

세균처럼 가장 단순한 단세포 생명체라도 세포 에너지를 추진력으로 전환하는 모터³가 달린 엔진, 현대의 선박에 달린 모터‘ 못지않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회전 프로펠러 등 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단백질이 있다. 세균은 지각perception을 위해 설계된 단백질도 갖고 있다. 수용체 receptor라고 하는이 단백질은 온도, 빛, 접촉 등 외부환경에서 어떤 특성을 감지하면 형태가 바뀐다. - P45

3. 세균의 편모는 양성자를 동력원으로 해서 회전하는 회전 모터rotary motor ‘로 움직인다. Lowe 외,
1987; Silverman과 Simon, 1974. - P499

단백질 합성 과정의 발달은 지능의 씨앗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DNA를 정보저장매체로 바꿔놓았다. DNA는 더 이상 자기복제하는 생명의 물질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물질을 구성하는 정보의토대가 됐다. DNA는 공식적으로 생명의 청사진이, 리보솜은 그 공장이, 단백질은 그 생산물이 됐다. - P46

지구의 테라포밍

머지않아 이 세포들은 과학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Last universal commanancestor‘, 줄여서 루카LUCA라 부르는 존재로 진화했다. 루카는 모든 생명체의할아버지다(할아버지라고 했지만 성별은 없다). 우리를 비롯해서 현존하는 모든 균류, 식물, 세균, 동물은 루카의 후손이다. - P46

세포를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DNA는 끊임없이 수리해야 하고 단백질은 계속해서 새로 보충해야 하며 세포를 복제하려면 내부의 많은 구조물을 재구성해야 한다. 열수공 근처에 풍부했던 수소는 이런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한 최초의 연료였을 가능성이 높다.⁵ - P47

5. J. L. E. Wimmer 1, 2021. - P499

초기 남세균이 갖춘 가장 인상적인 생물학적 시스템은 단백질 공장이나그 산물이 아니라 광합성 발전소다. 이것은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당분으로 전환해서 저장했다가 세포 에너지로 사용⁷하는 구조물이었다. 광합성은 에너지를 추출하고 저장하는 세포 시스템보다 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했다. - P47

7.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남세균의 조상에서 처음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KL. French 외, 2015 참고 - P4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르디옙스키가 귀국하고 한 달 뒤 그의 아버지가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나이 많은 KGB 요원 몇 명만이 참석했다. - P161

고르디옙스키는 이혼할 때처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혼을 단행했다. 레일라는 1979년 1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겨우 몇 주 뒤등기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곧 부모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했다. 올가는 아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옐레나는 KGB에서 성공하려고 눈만 반짝이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62

고르디옙스키는 제3부의 역사를 집필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과거 첩보 활동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한직이었다. 딱 한번 그는 노르웨이 담당자인 동료의 책상에서 OLT로 끝나는 제목의파일을 본 적이 있었다. 트레홀트의 이름 앞부분이 다른 서류에 가려져 있었다. 아르네 트레홀트가 KGB 첩자로 활동 중임을 암시하는 또 하나의 단서였다. - P163

킴 필비는 이제 고독하게 늙어 가며 자주 술을 마셔 대는 처지였지만, 머리는 옛날처럼 예리했다. 오랫동안 스파이의 이중생활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들키지 않는 법과 첩자를 잡는 법을 필비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KGB 내에서 여전히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 P163

고르디옙스키가 귀국한 직후 필비는 군보르 호비크 사건을 분석해서 잘못된 점을 평가해 달라는 중앙의 요청을 받았다. 그 베테랑노르웨이인 스파이가 왜 체포되었을까? 필비는 몇 주 동안 호비크파일을 열심히 들여다본 끝에, 스파이로 일한 오랜 세월 동안 자주그랬던 것처럼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그 첩자의 존재를 알린 정보는 KGB 내부에서 샜음이 틀림없다.>
빅토르 그루시코는 고르디옙스키를 포함한 고위 요원들을 자기방으로 불렀다. KGB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  - P164

스티그 베릴링은 비밀 요원의 삶을 <회색, 검은색, 흰색, 그리고안개와 갈색 석탄 연기로 탁한 색>⁸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스웨덴 경찰관, 정보 요원, 소련 첩자로 살아온 그의 삶 또한 칙칙한 색이었다.
베릴링은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SÄPO라고 불리는 스웨덴 정보기관의 감시 팀 일원이 되었다.
(중략).
베릴링이 스파이가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무척 좋아하던 돈, 다른 하나는 상사들의 거만한 태도, 4년 동안 그는 소련에 1만4천7백 건의 문서를 넘겼다.




8 AFP, 1995년 6월 28일자 보도에서 재인용. - P165

스웨덴 조사관들이 수사망을 조여 왔다. 1979년 3월 12일, 그는텔아비브 공항에서 스웨덴의 부탁을 받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SÄPO의 예전 동료들 손에 넘겨졌다. 그리고 9개월 뒤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베릴링은 소련의 주인들에게서 상당한 돈을 받았다. 그가 스웨덴의 국방에 끼친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는 2천9백만 파운드가 들 것으로 추정되었다. - P166

고르디옙스키가 지목한 소련 첩자들이 한 명씩 차례로 제거되었다. 그 결과 서방은 십중팔구 더 안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르디옙스키는 아니었다. - P166

KGB 동료들이 면밀히 주의를 기울였다면 고르디옙스키가 경제적 이득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러 새로운 외국어를 익히려고 하는지, 왜 갑자기 영국에 커다란 흥미를 보이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르디옙스키는 두 권짜리 러시아어-영어 사전을 샀다. 영국 문화에도 흠뻑 빠졌다. 어쨌든 소련 국민에게 허용된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그렇게 했다. - P167

코펜하겐에서 돌아와 제1주요부의 싱크 탱크 수장이라는 대단한 자리에 앉은 미하일 류비모프는 그가 <자주 들러 가벼운 잡담을 나누다가 영국에 대한 현명한 조언을 구했다>고 회상했다.  (중략).
류비모프의 제안으로 고르디옙스키는 서머싯 몸의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의 정보 요원이었던 몸은 첩보 활동 중에 겪게 되는 도덕적 모호함을 작품에서 훌륭하게 묘사한다. - P164

제3부에서 영국-스칸디나비아과는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이 영국 쪽으로 발령받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면 누구든 친분을 쌓아 두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 P168

(전략).
빅토르 그루시코는 제1주요부의 차장으로 승진했고, 제3부의 부장자리는 겐나디 티토프가 이어받았다. 전(前) 오슬로 레지덴트로 아르네 트레홀트 담당관이던 그의 별명은 <악어>였다. 영국-스칸디나비아과의 새로운 팀장은 니콜라이 그리빈이었다. 매력적인 인물인 그는 1976년 코펜하겐에서 고르디옙스키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했으나, 그 뒤로 그를 앞질러 승진했다. - P169

한편 센추리 하우스의 선빔 팀도 정확히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있었다. 고르디옙스키에게서 귓속말조차 날아오지 않은 세월이 벌써 3년이었다. 쿠투좁스키 대로의 신호 장소 점검은 계속 조심스럽게 이어졌고, 탈출 계획인 핌리코 작전은 상시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실전 같은 연습이 실시되어, 지부장 부부가 탈출 경로를 따라 헬싱키까지 차를 몰고 간 적도 있었다. - P170

(전략). 그런데 그 덴마크 외교관이 모스크바에서 파티에 참석했다가자신감 있고 건강해 보이는 고르디옙스키를 보았다. 외교관은 고르디옙스키가 재혼해서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PET에 보고했다.
M16에도 이 내용이 신속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PET 보고서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요소이자 선빔 팀을 들뜨게 한 요소는 고르디옙스키가 칵테일과 카나페를 먹으며 던진 한마디에 들어 있었다.
그는 미리 연습한 무심한 표정으로 덴마크 외교관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 P171

6

첩자 붓

겐나디 티토프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제1주요부 제3부의 부장인그는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 KGB 요원을 한 명 파견해야 했지만 보낼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겐나디 티토프에게 반드시 납작 엎드릴 거라고 믿고 보낼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 자리에 필요한 첫 번째 자격 요건인데. - P173

 티토프는 야비하고 교활했으며, 상사에게는 간이라도 빼줄것처럼 굴고 아랫사람에게는 이죽거렸다. 고르디옙스키가 <KGB전체를 통틀어 가장 불쾌하고 가장 인기 없는 요원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한 그는 그러나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 P173

중앙은 풋 사건으로 100명이 넘는 KGB 요원들이 추방된 1971년이후 줄곧 런던 지부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영어가 가능하고 유능한 요원들이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지않았다. - P174

1981년 가을, KGB의 영국 PR 라인 부팀장이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위장해 활동하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의 후임으로 가장 먼저 고려된 후보는 은밀한 활동을 한다는 MI5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외무부에서 거부당했다. - P174

고르디옙스키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는 암시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 P174

(전략).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쪽에서 바로 거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 시도는 해봅시다.」고르디옙스키는 고마움을 넘치도록 표현했다. 하지만 속으로는곧 악어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승진을 앞둔 KGB요원의 아내로서 레일라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 P175

두 사람 모두에게 런던 발령은 꿈의 실현이었으나, 서로 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다.
고르디옙스키에게 외교관 여권이 새로 발급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관에 비자 신청서도 발송되었다. 대사관은 그 신청서를 런던으로 보냈다. - P176

이틀 뒤 MI6의 소련 팀장인 제임스 스푸너가 센추리 하우스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하급 요원 한 명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 선언했다. 엄청난 소식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서류 한 장을건넸다. 방금 모스크바에서 들어온 비자 신청서입니다. 그 문서에 동봉된 편지에는 올레크 안토니예비치 고르디옙스키 동무가 소련대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정부에 신속한 외교관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고 적혀 있었다. - P177

완전히 양극단에 있었다. 티토프와 달리 스푸너는 사내 정치에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아부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혹독할 정도로 일에만 집중했다.
그가 팀을 맡은 뒤 가장 먼저 책상에 올라온 서류 중에 선빔 파일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디옙스키가 조용하고 그와 연락할 길도 없는 탓에 고르디옙스키 작전은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봐도 연락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 P178

고르디옙스키에게 비자를 발급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KGB요원으로 의심받는 인물은 누구든 자동으로 영국 입국이 금지되는것이 원칙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외무부가 먼저 예비 조사를 실시하다가 올레크가 코펜하겐에서 두 번 근무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P179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MI6 입장에서는 고르디옙스키의 영국입국이 지체 없이 무조건 허락되어야 했다. 이민국에 그냥 비자를발급해 주라고 지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 P179

 소식을 들은 PET는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외무부가 곧 고르디옙스키에 관해 문의할 것이라고 MI6가 알려 주자, 덴마크 측은<기록을 마사지>해서 그가 의심받은 적은 있지만 KGB 요원이라는증거는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우리가 적당히 의심스러운 구석을 남겨 둔 덕분에 비자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발급되었다. 우리는 《그래요, 덴마크 측이 그를 점찍은 적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 P179

모스크바의 한 관리는 비자가 너무 빨리 나온 것에 의심을 품었다. 「당신에게 비자가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몹시 이상합니다.」고르디옙스키가 여권을 찾으러 갔을 때 소련 외무부의 한 관리가 음침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 P180

KGB의 관료적 업무 처리 속도는 영국보다 훨씬 느렸다. 3개월뒤에도 고르디옙스키는 소련을 떠나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여전히기다리는 중이었다. KGB에서 내부 감찰을 담당하는 K부의 제5부가 고르디옙스키의 과거를 느긋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문제가 생긴건가 하는 생각이 차츰 들 정도였다. - P180

고르디옙스키의 자리는 영국 팀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635호실에 있었다. 그 방의 커다란 금속 선반 세 개에는 영국 내의 인물 중KGB가 첩자, 잠재적인 첩자, 비밀 접촉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파일이 있었다. 635호실에 있는 서류들은 모두 현재 진행 중인 작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중복된 자료들은 중앙 문서고로 옮겨졌다. - P181

고르디옙스키는 이 파일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KGB가 현재 영국에서 어떤 정치적 작전을 펼치고 있는지 차츰 감을 잡았다. 부팀장인 드미트리 스베탄코는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거냐며 그를 놀렸다. 「문서를 읽는 데 너무 시간을 낭비하지 마. 영국에 도착하면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될 테니.」 그래도 고르디옙스키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의심을 상쇄해 주기를 바라며 조사를 계속했다. - P181

매일 부서장의 서명을 받아 파일 하나를 꺼내 봉인을 깨고 KGB가현재 낚으려 하거나 이미 낡은 영국인의 신원을 새로이 알아냈다.
그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의 스파이는 아니었다. PR 라인이 주로추구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과 비밀 정보였으므로, 여론을 선도하는 사람, 정치가, 기자 등 힘이 있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 P182

잭 존스는 가장 존경받는 노조 운동가 중 한 명이며, 고든 브라운영국 총리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노조 지도자 중 한 명>¹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그도 KGB 첩자였다.


1 『가디언』, 2009년 4월 24일자에 실린 잭 존스의 부고에서 재인용 - P182

그가 살펴본 두 번째 파일의 주인공은 노동당의 좌파 의원인밥 에드워즈였다. 전직 부두 노동자, 스페인 내전 참전, 노조 지도자, 장기적인 KGB 첩자라는 점이 모두 존스와 똑같은 에드워즈는1926년 청년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고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고, 기꺼이 정보를 넘겨주는 정보원임을 증명했다. - P184

이런 거물들 외에 여러 조무래기의 기록도 파일에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베테랑 평화 운동가이자 전직 의원이며 노동당 사무총장인 페너 브록웨이 경이 그런 경우였다. 이 <비밀 접촉자>는 KGB와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소련 정보기관으로부터 많은 호의를 받았으나 그 보답으로 그다지 가치 있는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 듯했다. - P184

모든 정보기관이 그렇듯이 KGB도 현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희망 사항만 좋으며 없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파일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첩자가 아니라 잠재적인 친(親)소련성향으로 보이는 좌파 인사에 불과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 P185

하지만 모든 자료 중에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문제의 마분지 상자에는 300쪽 분량의 폴더와 절반쯤 되는 분량의 폴더가 들어 있었다. - P185

첩자 붓은 저명한 작가 겸 웅변가, 베테랑 좌파 의원, 노동당 지도자이며 만약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영국의 총리가 될 마이클 풋이었다. 이 나라 영국에서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야당을 이끄는 지도자가 KGB에 매수된 첩자였다는 뜻이다. - P186

 대처는 인기가 없었다.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도는 보수당을 10퍼센트 포인트 이상 앞섰다. 1984년 5월로 예정된 차기 총선에서 마이클 풋이 승리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붓 파일이 공개된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날터였다.
페트로프 소령은 확실히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암호명을 고를 때 뜻과 붓으로 말장난하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만 제외하면 서류의 내용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 P187

그 뒤로 계속 마이클 풋에게 지불된 돈이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날짜, 금액, 돈을 건넨 요원의 이름이 적힌 표준 양식의 서류였다. 고르디옙스키는 이 목록을 죽 훑으면서 대략 계산을 해보았다. 1960년대에 10~14회 돈이 지불되었고, 한 번에 지불된 액수는 100~150파운드였다. 따라서 총액을 어림잡으면 1천5백 파운드, 현재 가치로 3만 7천 파운드(4만 9천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그 돈이어디에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 P188

풋과 KGB 담당관의 만남은 대략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다. 소호의게이 후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만날 때가 많았다. 모든 만남은 사전에 세심하게 계획되었다. 만남에서 나눌 이야기의 윤곽을 사흘전 모스크바에서 보내 주었다. 만남의 결과를 기록한 보고서는 먼저런던의 PR 라인 책임자와 레지덴트가 차례로 읽은 다음 모스크바 중앙으로 보내졌다. - P188

풋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노동당 내부의 투쟁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물론, 베트남 전쟁, 케네디 암살이 낳은 군사적 결과와 정치적 결과, 디에고 가르시아섬을 미군 기지로 개발하는 문제, 한국 전쟁의 미해결 이슈들을 협의한 1954년의 제네바회의 등 뜨거운 주제들에 관한 노동당의 태도에 대해서도 정보를제공했다. 풋은 소련에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독특한위치에 있었으며, 소련의 주장을 잘 받아들였다. - P190

붓은 독특한 종류의 첩자였다. KGB가 생각하는 첩자의 정의에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소련 관리들과의 만남을 숨기지 않았다(그렇다고 널리 광고하지도 않았다). 대중에게알려진 공인인 만큼 어차피 은밀한 만남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그는 <여론의 창조자>였으므로, 단순한 첩자라기보다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 P190

(전략). 자신에게 정보를 주는 한편 다신이 제공한 정보를모스크바로 전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이 짐작이 옳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만큼 순진한 사람이었다.
1968년에 붓 작전의 기조가 바뀌었다. 프라하의 봄 이후 풋은 소련을 강렬히 비판했다.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항의 시위에서 그는이렇게 선언했다. 「소련의 행동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악의 위협이 바로 크렘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⁹ - P191

풋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 소련 스파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KGB의 지시를 받았고, 그들의 돈도 비밀리에 받았다. 그리고 적국이자 전체주의 독재 국가인 소련에 정보를 제공했다 - P191

마이클 풋은 KGB에 쓸모가 있었고, 완전히 바보스러웠다.
고르디옙스키가 붓 파일을 읽은 때는 1981년 12월이었다. 그다음 달에 그는 그 파일을 다시 읽으면서 그 내용을 최대한 암기했다. - P192

영국이 전쟁 중일 때, 고르디옙스키는 KGB 내에서 혼자 영국 편을 들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한 그 나라에 과연 발을 디딜 날이 오기는 할지 걱정스러웠다. - P193

KGB의 제5부가 마침내 고르디옙스키에게 영국에 가도 좋다는허가를 내주었다. 1982년 6월 28일, 그는 런던행 아에로플로트 항공기에 올랐다. 아내 레일라와 이제 각각 두 살과 9개월이 된 두 딸도 함께였다. - P193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고르디옙스키의 마음속에는 지난 4개월동안 KGB 문서고에서 긴장 속에 비밀스레 읽은 문서들의 내용이 무겁게 쌓여 있었다. (중략) 그래서 영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PR 라인 요원의 이름,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모든 KGB 요원의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다. <제5의 사나이>¹⁰의 신원을 알려 주는 증거, 소련으로 망명한 킴 필비의 활동, 노르웨이의아르네 트레홀트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추가 증거도 머릿속에 있었다.

10 킴 필비를 포함해서 소련 간첩으로 활동했던 케임브리지 5인방 중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 옮긴이주 - P193

참조

붓 파일의 상세한 내용은 1995년 2월 고르디옙스키와의 회고록 인터뷰에 들어 있다.
『선데이 타임스』 문서 보관실 소장. - P194

2부 - 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에서 만났고 한국인처럼 생겼으니까 신선이거나 도깨비인가 보다 한 거지, 정체는 몰라요. 그리고 예전에는 다른 나라에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유럽에서 온 게 도깨비 맞아? 혹시 예수 같은거 아니야? 사람도 부활시키는데."
우혁은 내심 놀랐으나 태연한 척 대꾸했다.
"예수가 동양인이면 이상하죠. 그리고 형도 알겠지만 예수는 셈족이라서 희랍어랑 히브리어만 하고 라틴어는 못 했어요. 그 신약성경도 희랍어로 적혀 있잖아요." - P82

"일단 나도 돈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못 박아두고...... 우혁아, 나는 너 덕분에 무척이나 보수적인 사람이됐어. 이건 백운산 계곡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시작된 생각이야" - P83

"너는 의견이 다를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어떻게든 해결을 봐서 평범한 인간이 됐으면 한다. 난 그게 제일 좋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믿는다. 필요한 거 있으면 빨리 챙겨서 다녀와라. 내가 생각하기엔 날 밝고 보는 눈 많을 때가 그나마 안전할 것 같다. 지금바로 집에 가서 차 끌고 와." - P84

김형이 사는 세상이 로마라면 그곳의 카이사르는 돈이다.
사람은 무릇 돈을 벌고 모으고 써야 한다. 카지노의 고삐풀린 흐름에 휘말리는 게 아니라, 격률과 질서를 따르는 방식으로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맘몬과 나눈 계약이다. 인의와 인정을 소박하고 아늑한 일상을 누릴 방법이다. 돈을 허투루써버리는 사람은 친지를 실망시키고 만다. 달리 말하면 그 격률과 질서로부터 어긋난 행위는 무엇이든 도박만큼이나 허무맹랑하고 무익하며 해로운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 바깥으로부터 온 믿음일지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 P85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피안을 마주 보게 된다.
내일 당장 종말이 온다고 하면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그소식을 반길까?
대치동 학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들은?
김형은?
우혁은 심판이든 구원이든 기꺼이 반길 수 있었다.
묵상은 <교주를 죽여라>의 내용으로 귀결되었다. - P86

서른두 명의 숭배자들은 넘쳐흐르는 은혜 속에 죽음을 택했으며 열두 명의 아이들만 살아남았다. 사건은 여러 이유로 이례적이었다. - P86

소년은 자신이 재림 예수가 아니라 주장했지만 우혁은 절반만 믿었다그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휴대전화로 대치사거리부터 설악산까지의 경로를 검색했다. 정체 구간이 없다 가정하더라도 두 시간은 잡아야 할 거리였다. - P87

곧바로 차를 끌고 돌아가려다가 철물점 위치를 검색했다.
집 근처에 세 곳이 있었다. 우혁은 가장 가까운 철물점에서 접이식 낫과 도끼를 하나씩 사서 뒷좌석에 던져놓았다. - P87

우혁은 등받이에 팔꿈치를 얹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자리에 앉자마자 도끼날을 감싼 방수포 천을 끄르고 있었다.
"필요할 것 같아서 사왔어. 챙겨둬."
"고맙다" - P88

재림 예수 노릇을 다시 해볼 생각이 없는지도.
이렇게 도망 다닐 바에는 종말을 불러오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도.
(우혁은 정말로, 진심으로, 절실히도, 논술학원 보조강사의 현실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심리는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망이라기보다는 불가해한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적당한 첫마디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우혁은 미사대교에 접어들도록 침묵을 지켰다.  - P89

그는 평생토록 도망쳐왔던 세계의 총체가 바로 여기 모였음에 몸서리쳤다. 개념을 물질에 앞세움으로써만 파악될 수있는 도시의 결절들. 만질 수 없거니와 상상의 대상조차 아니므로 실체와 정신을 동시에 압도하고 마는, 추상화된 객체들. 강남과 남양주의 차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는 도시의풍경이 아니라 어차피 죄다 철근콘크리트로 뒤덮인 데다가도로 위에는 자동차가 굴러다니지 않는가?-부동산 시세가병기된 지도를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 - P90

표정 없는 괴물이 무지막지한 열과 충격을 집어삼킨 뒤 무감한 숫자를 게워내는 장면이 우혁의 머릿속에 번뜩였다. 조약돌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가서, 미사대교의 흰 난간과 숫자를 동시에 꿰뚫는 순간도 그 조약돌에는 서른네 살의 보조강사와 구원을 불러올 소년이 타고 있다……………바로 이런 상상을 멈춰야 한다.
이건 기질적인 문제인가, 기적의 후유증인가?
혹은 지금에야말로 결단할 때이기 때문인가? - P91

그는 실제로 종말이 닥쳐오는 미래와 부모님 속만 터지고끝나는 미래 중 무엇이 더 심각한지 고민해봤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친구인 최우혁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고 객관적인 재판관으로서. - P92

바로 지금!
"생각대로 될 일은 절대 없으니 헛짓거리 말아라. 한국서야산 생활하며 죽었다 살아난 게 다섯 번도 넘어. 그 전엔훨씬 많고."
소년의 핀잔이 결단을 가로막았다. 우혁은 멋쩍게 웃으며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한 덩어리로 뭉쳤던 열기가 온몸으로 흩어지며 나른한 아쉬움을 남겼다.
"설마 속마음도 읽는 거야?" - P93

교주 1인이 유일한 상징으로 기능하며 권력을 독점하는 통상적인 사이비 종교와 달리, 새천년파에는 핵심 인물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사업 모델도 존재하지 않았다. 체계와 직분들이 명징한 규율 아래 맞물릴 뿐이었다. - P94

열심당원이란 본래 로마에 저항했던 유대인 급진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단검 한 자루로 제국의 관료들과 장군들을 암살하고 다녔는데, 새천년과 열심당원들이 하는 일이 정확히 그랬다. 그들은 이도유와 접점이 있는 사람들을찾아냈다. 회유했고, 정보를 얻으려 했고, 협박했으며, 종종 납치해 죽였다. - P96

소년은 예티나 네시 같은 크립티드로 간주되어 10대 청소년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했다. 조강현이 돈깨나 버는 기업인이라는 사실마저 그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소년 교주를 소재삼은 아마추어 만화와 소설이 수천 개씩 쏟아져 나온 덕분에 검색 결과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 P99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이 방송을 기획한 게 누구였을지, 조강현은 무슨 생각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지가 의아스러웠다.
실제로 소년과 함께했다면 그 신성을 의심하기란 불가능할터였다. 애당초 기적을 목격했으니 신학도의 길을 저버린 게 아니겠는가. - P100

"그러니까 어제 멈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솔직해지는 거야. 어차피 두 시간만 지나면 피차 볼 일 없을 테고, 저인간들이랑도 모르는 사이가 될 테니까."
"너, 돈벌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정보를 팔아먹을 거였더라면 새천년파한테 진작 연락했을걸. 봐서 알겠지만, 난 심각한 사회부적응자야. - P101

"평범한 인간인 게 뻔해도, 원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면 덜컥 믿어버리는 게 사람 심리야. 기적을 부릴 수 있다면 말할 것도 없지. 나한테 이런저런 재주가 있는 것, 사람들이 날 예수라 믿고 싶어 했던 것, 내가 거기 잠깐 어울려줬던 것,
그래서 한바탕 시끄러웠던 것과 별개로 나는 그냥 나야!"
"그렇다면 넌 누구야?"
"방송 봤으면 이름쯤은 알아야지." - P102

자동차는 어느덧 미사대교를 빠져나와 남양주의 끝자락에진입했다. 허공에 얹힌 길은 이음매도 없이 육로가 되었고, 굳은 듯한 수면 위로 희부연 막을 이루던 햇빛은 이제 나뭇잎과 전속력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 P102

"서른두 명이 자살한 것도 껄끄러운 주제인가?"
"내가 죽으라고 시킨 적 없어. 일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아서"
"하지만 제멋대로 죽었다 쳐도 되살릴 수 있잖아." - P103

"방송에서는 네가 지시했다던데."
"죽은 건 죄 어른들이고, 산 건 모두 애들이다. 지금 새천년파랍시고 난리 치는 놈들은 그때 열두어 살 하던 애들이란말이야. 그런 녀석들이 상황을 똑바로 기억할 턱이 없지. 조강현 한 놈만 스물네 살이었고, 열일곱 살짜리가 하나 있었던가......." - P103

인망을 쌓지 못한 삶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바카라라면 어떨까?
그는 내비게이션으로 지금 위치에서 정선 카지노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았다. 정확히 200킬로미터 거리였고, 거기에서 다시 설악산으로 가려면 비슷한 거리를 추가로 달려야만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주 경로에 끼워 넣기에는 과했다. - P106

"악령 같은 거구나. 그러면 원래 이도유는 어디로 간 거야?"
"여기에 너랑 대화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다. 물론 나는 이도유인 동시에 바르 코크바 장군이고, 정신 나간 페레그리노스고, 이름 없는 게르만 병사고, 사바타이츠비고, 태평천국의 홍수전이고.... 나, 바로 여기 있는 나지. 그 마흔네 개의기억에 네가 악령이라 부른 걸 합하면 내가 된다." - P107

"나한테 있는 재주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병들고 죽은 이를 되돌리는 것. 다른 하나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는 것. 그런데 이것은 내 능력이라기보다는 악령을 따른 결과야 너한테 익숙할 예를 빌리자면, 심술궂은 형이 동생의 게임을 지켜보며 여기로 가라, 저걸 골라라 훈수를 두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할 일을 읊으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아. 결국 객관적으로는 훌륭하지만 나는 원치 않았던상황에 놓이고 말지." - P108

"왜, 백두대간을 타고 중국으로 간다면서 새천년파가 거기까지 따라가지 못할 텐데."
"악령이 슬슬 몸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게 느껴지거든.
주어진 본분을 다하라고, 실패하더라도 도망치지는 말라고,
도망치면 이도유의 삶은 끝이라고 계속 속삭이는 거다. 사실지금도 불안불안해."
"그렇구나." - P109

"지금까지 마흔다섯 번이나 살았다고 했지. 가장 처음에는누구였어?"
"제사장의 아들이었지. 어머니는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여인이었고, 소년 시절, 광야에서 3년간 수행하다가 악령에 붙들렸다.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로 고향에 돌아왔더니 분위기가 심상찮지 뭐냐 독립이니 뭐니 떠들던 놈들이 기어코 일을낸 거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덕분에 떠밀리듯이 지휘관이됐다가 포로로 전락했고, 거기에서 황제가 될 자의 눈에 들었다. 글이나 쓰면서 역사가로 여생을 보냈지. 황제는 나보다스무 해 일찍 죽었고, 나는 예순이 넘어서야 겨우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Vae, puto deus fio......." - P110

요세푸스는 자신이 최후의 1인이 되리라 확신했고, 정말로그렇게 되었다.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가 될것임을 예언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제국은 네 명의 황제를 갈아치웠다. 가장먼저 네로가 실각했다. - P111

질문들이 우혁을 또 다른 이름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자신이 한때 바르 코크바 장군이었다고 말했다.
요세푸스와 바르 코크바 장군의 삶은 한 바퀴 돌아 대칭을 이뤘다. 요세푸스는 1차 유대 반란의 지휘관 중 하나였지만 열의가 부족했고, 기적과 예언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했다. 반면 바르 코크바는 기적과 예언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