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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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같은 판형과 두께 때문에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가 없었지만, 내용도 이게 자기계발서의 처세술 파트인지 젠더학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니 실망이 크다. 외국에 더 좋은 페미니즘 에세이 (울스턴크래프트, 너스바움 등)나 입문서가 지천에 널려 있으며 심지어는 훨씬 저렴한 편인데 왜 이걸 선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기니 짧게 답해본다.


먼저 시간 축을 2015년 2월로 돌려보자. 나는 트위터의 몇몇이 (그들이 말하는) '넷페미'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아젠다로 가져간 것은 가장 처음엔 이슬람 혐오 (Islamophobia)였다. 과연 이게 상호교차성으로 용인받을 수 있는 논지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들은 잘못된 사실로, 보편적 인권의 가치에서 벗어나 괴상한 논리로 무슬림을 비하해댔다.


그 뒤엔 '나는 샤를리 엡도다'라는 우스운 수준의 배경지식이 깔린 해시태그 운동으로 발전했다. 한명숙 언팔 운동 등 정치적 색채가 강한 해시태그 운동 – 그것도 꽤 의미 있는 규모로 한정하더라도 – 이라면 여럿 있었지만, 페미니즘의 가치가 들어간 것은 사실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페미니즘'이 잘못된 것이었던 게 실패였다면 실패였다. 모든 자본주의와 모든 자유주의, 그리고 모든 공산주의가 정합성을 갖췄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해당 명제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추가로 적어둔다.


이들이 사실 '넷페미'의 주류가 되었고, '페페페'를 만들었고, 망했으며, '메갈리아'를 만들었고, 망했으며, '워마드'를 만들었고, 망했다. 사이트나 프로젝트는 번번이 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영향받은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성공한 점도 없지 않다. 다만 운동 방법론으로서 적합했느냐, 그들이 지금 알고 있는 상식이 주류 페미니즘과 상충하는 부분이 얼마나 있어 어떻게 영향을 끼쳤느냐는 것은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물론, 적절치 못했다고 생각한다. '자매애' 개념을 들이대고 연대를 논하더라도, 생물학적 남성을 거의 완전히 배제한 채로 시작한 운동이 성공하기는 단연코 어려우니 말이다. 가부장제가 공고하고, 역사적 배경으로부터도 남성의 계급 우위가 확실한 이 나라에서 그게 쉬웠다면, 애저녁에 부계 사회는 낡아가고 있을 것이다. 초기 운동 방법론을 정립한 사람들은 아마추어였고, 의회 정치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고, 그 결과 깊은 고민 없이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일부 여성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반대 급부로 '페미니즘=메갈=워마드=…'라는 해괴한 공식을 남성들에게 던져준 꼴이 됐다. 이를 단순히 공1 과1로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평가한다. 성 대결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대부분 남성인 점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고민해봐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두는 실질적으로 '여성 혐오'를 한다. 이건 발화자나 행위자의 젠더와 아무 관계가 없다. 버틀러, 크리스테바, 너스바움 그 누가 정립한 페미니즘 개념이 옳고 틀리건 누구나 여성 혐오를 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아직 규명되지 않은 여러 생활 속 혐오가 깃든 요소가 넘쳐날 것이기에. 누구나 여성 혐오를 하지만, 그 정도의 차가 있을 뿐이다. 제약이 남성보다 덜한 여성이 비교적 여성 혐오를 덜 한다. 이러한 환경은 아마 페미니즘 이론서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므로 운동을 계획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것이다. 그런데 설득 대신 상호 비난과 비하로 번지게 된 이유는, 그 당시 상수였던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아니라 변인이었던 운동 계획자들의 노선에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는 남성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다 – 남성들의 심각한 여성 혐오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교묘히 이를 피해가려는 것도 아니다. 감정적으로만 다가서면 나도 끝도 없이 이것만 열심히 지적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건 무익하다 –. 하지만 재교육화가 필요한 집단에 좋지 않은 접근 방법이 반복되었고,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노선을 택했을까? 여성 개인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이 됐다는 말은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모든 운동은 자신의 가치관의 관철을 목적으로 하는데, raw하고 래디컬한 자세로 상대를 설득하고, 목표를 이뤄내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극단주의 운동이 역사상에서 실패해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반대되는 전략을 바로 '성 주류화' 혹은 '다수파 전략'이라고 부르고 선진국 소수 집단에선 이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 현대 개혁 세력에게는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여성들의 분노가 큰 건 사실이고, 커야 한다. 그 분노는 운동을 추동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의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동력으로 작용해야 어떠한 상황이든 매끄럽게 넘어가는 데에 기여하고 부작용이 없다.


총선만 되면 공천받은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악수하며, 한 표 부탁드린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을 죽도록 외친다. 잠도 극단적으로 줄이고 거의 매일 그런 일을 한다. 이들이 고맙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가치관이 옳음을 알고 그 정당의 정강·정책에 따라 당연히 자신이 당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구태여 고맙다는 의사 표시를 유권자에게 왜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몹시 간단하다. 사회가 그 가치관이 옳다는 것을 보장하고 있지 않으며, 그렇게 유권자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치관은 총선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마이너하다. 이들은 기득권적 논리에 휘둘리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그 방면에 친화적으로 대응하므로 이들 개개인에게 선택받는 것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매우 소중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선택을 전제로 고마워하는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고, 더 나아가 이런 이유가 기반이 되어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진다.


그럼 위의 기득권적 논리를 남성 계급 우위, 즉 가부장제로 바꾸고, 작은 사회였던 총선 판을 사회로 격상시켜 보자. 정치권이 자신들의 훌륭한 정책을 유권자들이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듯이 운동 세력 또한 대상에 관한 비난을 지양해야 한다. 여기선 실제로 유권자들과 대상이 멍청한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왜 그들은 설득을 배제하고 분노를 털어내는 데 주목했는지 고민해보자. 대충 생각해도 이는 성공하기 매우 어렵지만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나는 여기에 애초 창안자들의 의도가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의회민주주의의 프로세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투표로 일컬어지는 대의민주성과 관계가 없었다. 혹은 관계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온라인에서 세력을 불리기만 하면 됐으므로.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의회민주주의를 배제함으로써 그들은 그 개념과 집단을 기득권으로 투사하여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부터 – 영부인 이희호는 대한민국 전후 1세대 페미니스트이며, 정부 전반에도 페미니즘 영향이 많이 닿았다. 그 결과 여성 정책 담당 부서가 여성부로 최초로 승격된다. – 굳건히 페미니즘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정당은 민주당이고, 최근까지도 여성의전화, 여성민우회, 여성연합 등 주류 페미니즘 시민단체의 인력 중 상당수는 이곳으로 흡수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의회민주주의에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차지하는가는 제쳐두더라도, 그 페미니즘의 지분은 민주당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민주당과 그 페미니즘을 기득권으로 몰아 이득을 보고자 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아마 처음에 이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나중이 되어선 이 목적이 크게 의미를 가졌다. 처음부터 주류를 배싱하고 나온 괴란한 물건이었던 이들의 페미니즘은 여태 쌓아온 논의와 이루어낸 성과를 모두 무시했다. 하물며 새누리당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도 여러 번 했다. 이건 돌출발언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잘 보여주는 일종의 표상이었다. 목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반민주당이었다. 페미니즘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우선시되는 도구의 하나였다.


나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이뤄낸 여성 정책 성과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이게 대한민국 여성계가 이뤄낸 거의 모든 성과인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한나절만에 나열하기 힘들 만큼 적지 않은 양이다. 그래서 이화여대 사회운동 라인과 리버럴 페미니즘을 위시한 단체의 수장이 다 민주당으로 갔던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도 과가 크지만 여성 정책에 기여한 것이 있는데, '그들'이 민주당계 정부의 공로를 모두 무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분명히 해온 게 있고 심지어 많은데, 그것들이 없다고 우기며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을 각인시키려 노력한다?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이들의 시도는 역대 최다표차 대통령이 당선됨과 동시에 총선에서 그들이 지지하는 군소 진보정당이 폭삭 망하면서 실패했지만, 온라인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문가들이 담론을 세밀히 구축한 게 아니라 이상한 주장이 다수 혼재돼 있으며, 대부분은 최소 10년 이전 여성단체 및 국회에서 논의가 끝난 것들이다. 기초가 없는 이들의 주장이 어느새 책으로 만들어지고, 마치 반론에 반론을 거쳐 타당한 논리로 세워져 학계에서 주류로 인식된 것마냥 퍼져나갔다. 사실은 이게 맞지 않는다는 국내외 석학들의 책과 논문이 있음에도.


이들이 이처럼 리버럴 페미니즘의 성과를 경시하는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노선이 크게 두 가지 정도 된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 페미니즘으로, 노동당이 선호할 만하다. 현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니 의회민주주의를 무시해도 된다는 점에서 아귀가 맞는다. 두 번째는 에코페미니즘과 래디컬페미니즘의 요상한 혼종으로, 탈성장, 반과학, 생물학적 남성 배제 등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런 내용이 페미니즘의 '거의 모든 것'인 양 읽히고 쓰이는 게 불쾌하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시류에 편승해서 '한탕 해보자'는 그분들의 의지로 읽는다.


책 내용도 시원치 않아 지적할 부분이 한 트럭은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기로 한다.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이건 개인 관점에선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타당하지만, 보편적이진 않다. 사법이나 정치에서는 달리 이해되고, 그건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꼭 '남혐'을 해야겠느냐",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이것을 손쉽게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이라고 동일시하면서 '그렇게 똑같이 혐오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려면, 남성혐오가 생겨나기 이전에 그토록 만연했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과 제재가 있어야 했고, 그것을 재밌다고 소비하거나 묵인 혹은 방관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 있어야 했고, 남성혐오 직전까지 여성들이 수없이 제기해온 온건하고 지적인 비판에 반응을 했어야 합니다.


이렇게 손쉽게 '일베의 논리와 표현을 소비하고 방관하는 이들에게 비난이 없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신들이 여성혐오를 하는 줄 잘 모르는 집단도 여성혐오를 극대화하고 강력히 전파하는 그 사이트의 폐쇄를 위한 정치권 운동에 동조하는 열렬한 운동이 있었다. 이에 젠더는 무관했다.


수많은 남성이 '김치녀', '된장녀'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말리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성이 이를 묵인했는데, 어떻게 여기서 젠더를 매개체로,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두고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동시에 '미러링'이라는 임의적 개념하에 실행되면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닐진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하는 게 현명한 일일까? 아니 타당한 일이긴 할까.


혐오 표현 (hate speech)의 관점에서, '남성 혐오'라는 것은 소수자성을 떠난, 개념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런 말은 없다. 이 부분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지 말자는 말은 반 이상 틀렸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반대되는 현상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제도적으로 처리하기 힘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정치적 냉소주의, 요즘의 조어로 말하면 '정치 혐오' 풍조를 머금게 하는 데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는 점에서 이는 어느 정도 맞다.


표면상의 이유로 '미러링'은 발화의 상대가 젠더 위계를 깨닫고, 두 집단이 상호 비방을 하되 그것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부분의 '기성' 페미니스트들의 우려와 같이 남성 집단은 아무런 이해를 못했다. 이는 남성 집단이 미개해서 생긴 일은 아니다. 미러링라는 것이 전략적으로 아둔했을 뿐이다. 이해만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남성 집단의 잘못된 결속은 덤으로 딸려왔다. 미러링은 이 과정에서 발화자들의 유희로 전락했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페미니즘의 효용성을 남성 집단이 깨닫도록 국가가 장기적으로 준비하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 조심히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그들 때문에 더 까다로워졌다. 더 변명은 필요없다. 이는 분명히 실패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두들겨 맞던 쪽이 계속 맞지 않는 이상, 그들의 평온한 현실에 갑자기 등장한 과격함이라는 혐의는 기본으로 안겨집니다. 남성의 세계는 여태껏 평화로웠으니, 어떤 목소리도 과격하고 돌연하게 느껴질 밖에요. 어차피 그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억압받는 쪽이 억압하는 쪽의 마음에 드는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본인이 3.1운동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다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이런 이상적 화합의 방식으로 평등을 일군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불평등이 없었을 겁니다. 아이슬란드는 여성이 거리를 점거한 뒤 성평등지수 세계 1위 국가가 되었고, 서프러제트 운동은 과격했으나 투표권을 얻어냈습니다.


동의할 수 없다. 68 혁명 이후 거의 모든 사회적 소수자 권리의 증대는 끊임없는 설득과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너무 보수적이어서 설득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비방을 하는 식으로 해결된 사례는 없다.


저자가 예시로 드는 서프러제트 운동은 영국 양당제 의회의 진보적 축이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지 않고 심지어는 훼방놓기까지 하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의회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기에 최후의 방법으로 저항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1운동이 해방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평화로워서였을까? 너무 몰지각한 주장이라 덧붙일 말도 없다. 백인-흑인 격차 역시 폭력적인 운동이 성과를 이뤄낸 것이 아니며,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미국 민주당에서 비주류의 주류화 정치를 해왔던 게 기제가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는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 체계를 굳이 깨고 싶다는 저자의 일념이 읽힌다. 앞서 예시로 든 두 가지 노선 중 하나에 분명히 해당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억압받는 쪽이 억압하는 쪽에게 그들이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궤변이다. 현실의 희망을 모두 소거하고 싶어 이골이 나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다. 실제로는 젠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행정부가 있으며, 입법부 또한 제1당이다. 그리고 억압하는 대부분이 자신이 억압한다고 인지를 하지 못한다. 여기서 설득을 하는 것이, 그들의 표현으로 '억압하는 쪽의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굴종인가? 아니다.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은 타협이다. 이 개념 안에는 설득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설득이라는 투쟁은 민주주의의 가장 주요한 과정이 된다. 이걸 빼고 어떤 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조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내가 언급한 모든 '운동 (movement)'은 '정치 운동 (political movement)'이고, 현대 정치는 민주주의를 주춧돌로 삼고 있으니 설득의 방법론으로 해결하지 않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멀어지겠다는 말과 같다.


이 모든 건 문제 해결의 방법론이 주제가 될 때의 이야기이며, 개인적 관점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은 구조적 억압과 남성의 개별적 억압에 분노할 자유가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남성이 들어보자고 결정했다고 할지라도, 여성은 그 결정에 감동하고 고마워하며 남성을 사랑으로 환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랫동안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제 와 듣기로 결정만 하고 여전히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상대에게 여성이 등을 돌릴 수도 있는 겁니다. 화합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오랫동안 귀를 닫고 있었던 이들 쪽에서 '들어보자'는 결정을 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여기에선 과장해 내로남불 수준의 성 대결을 유도한다. 가부장제로 인해 모든 사람의 사고방식이 남성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음은 저자도 말했고, 나도 알고,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고', '여성의 관점이 부재'한 남성 집단은 젠더 감수성이 낮고, 그 결과 문턱이 더 높다는 아주 자연스레 전개되는 논리를 전제에 두면, 그들에게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다시 말해 설득의 방법론을 벗어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사회 문제를 풀어갈 것인지 한숨만 나온다.


여러 세력이 하나의 가치를 두고 다른 방법으로 성취를 노력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에 걸맞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때 그 여러 세력은 자신이 주류가 되었을 때 충분히 대중을 설득할 수 있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춰야 한다. 문제는 현재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들의 대체재로서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목소리는 훨씬 크다. 심지어 한 것이 없다고 매도와 마타도어를 일삼는데, 불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행히도 이들이 실패해도 국회나 정부에서 페미니즘이 가지는 위상은 견고하고 더욱 많은 부분을 점유할 것이다.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젠더를 고려해 예산을 계획하는 성인지 예산제는 발전을 거듭할 것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행정적 손길은 더욱 세밀하고 주의 깊어질 것이다. 문제는 더욱더 바보가 된 남성 집단의 젠더 감수성을 어떻게 정치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룰 것인가만 남았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는 득도 있고 실도 있었지만, 나는 과가 명백히 크다고 본다. 이렇게 적으면 나 또한 반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으로 매도할 테니 그것 또한 과에 추가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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