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101
문태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우리나라 문학계라고 해야할까, 시(詩) 판이 하도 시끄러워서,
읽고싶지 않다가도,
이럴때 일수록 시집 한권 읽으며 마음을 달래야겠다 싶어서 펼쳐든 시집이다.
제목이 고와서 집어들었고,
'문학동네 시인선 101'이라는데 나름 의미를 부여했다.
문태준의 시는 다른 건 기억나는게 없고 '가자미' 정도이다.
오히려 '이영광'의 어느 시집의 해설을 멋드러지게 썼던걸 기억한다.
'죽음을 흠향하는 시인'이라나.
그래서,
문태준을 잘 몰라서 이렇게 용감무쌍할 수 있는 거겠지만,
'가자미'때와는 좀 바뀐 것 같다.
시도 표제시인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말고는,
확 잡아 끄는 매력이 없었다.
어찌됐건 그동안 내가 알던 '가자미'란 시 쓰고, 이영광 시집의 해설을 쓰던 그 문태준은 아닌것 같다.
세월이 흘렀으니 바뀔 수도 있는 거겠지.
오히려 그대로이면 고인 물이 되어 썩는 거겠지, 뭐 이런 생각으로 치환해본다.
호수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시를 읽는데,
시가 이쁘고 잘 읽히기도 하는데 무슨 뜻인진 잘 모르겠다.
언젠가 읽었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다함이 없다'로 시작하는
'마이클 코넬리'의 '로스트 라이트' 첫구절이 생각난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는,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였다.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해설을 보니 내겐 '7번국도-등명이라는 곳'으로 기억되는 '이홍섭'님이다.
시보다 해설이 더 쉽게 읽히는건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인의 말'이 제일 앞에, 제일 멋지게 등장한다.
새봄이 앞에 있으니 좋다.
한파를 겪은 생명들에게 그러하듯이.
시가 누군가에게 가서 질문하고 또 구하는 일이 있다면
새벽의 신성과 벽 같은 고독과 높은 기다림과 꽃의 입맞춤과
자애의 넓음과 내일의 약속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에게 올 봄도 함께 나누웠으면 한다.
다시 첫마음으로 돌아가서
세계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세계는 노동한다.
여름 장맛비 같은 봄비가 내린다.
언땅을 녹이고 새싹을 올리는 봄비이다.
오래간만에 메마른 마음도 말랑말랑하게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