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성찰 시리즈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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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헤닝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다.

강유원의 책들을 그동안 몇 권 읽은지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하라면 반듯하지만 좀 지루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었다.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이나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철학자인 그가 '숨은 신을 찾아서'란 제목의 책을 들고 나왔으니,

얼핏 생경하였었다.

 

"1"장에서 그동안 그가 뜸했던 이유가 나오는데, 이같은 제목을 쓴 이유도 엿볼 수 있었다.

태평양과 이어지는 동해 바닷가 도시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을 서둘러 나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이라는 허겁지겁만이 전부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아니, 그 무기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옳겠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絶望, 즉 희망을 끝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쪽)

 

10여년 정도 많이 아팠었나 보다.

많이 아프거나 나이 들어 죽음을 예비하게 될 때 삶을 돌아보게 마련인데,

그는 삶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책을 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 따위,

위대한 사람들의 저서 속 삶을 엿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성찰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따위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펼쳐서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가 독서법을 가장하여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다.

 

논점이 명확하고,

그 명확한 논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예는 자상하게 들되, 중언부언 군더더기가 없다.

 

헤닝만켈'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꾸준히 내면에게 묻기를 강조했었는데,

강유원은 신앙의 필수적 전제 조건으로 얘기되는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을 언급한다.

신앙을 갖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산다면 훌륭한 삶을 산 것이라는 상식도 있다. 참으로 논박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하거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헛된 집착에서 나온 것이니 적극적 행위를 포기하라고 설파하는 것은, 망동과 망언으로 간주된다. 그들에게 세계관의 전회를 요청할 수는 없다. 그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그들에게 물어볼 여지는 남아 있다. 자신들의 도덕적 신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한 물음이 그들 자신의 신념 체계에 대한 잠깐의 회의라도 불러일으켜 그들을 더 깊은 의심에서 제기되는 물음들로 나아가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물어볼 수 있을 것인가.(30~31쪽)

 

헤닝만켈도 그랬고, 강유원도 그렇다.

인간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을 한다.

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주에 대해...끊임없이 묻는다.

헤닝만켈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다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입장을 표명하는 반면,

강유원은 '신'이라고 불리우고 신념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유명인들과 그들의 저서를 인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세계는 우주의 티끌들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걸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몸은 언젠가는 티끌로 되돌아갈 것임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정신이 탐욕스럽게 읽고 있는 책들이 모두 한순간의 응축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만년필은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않은가, 그대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찰라에 스러져버릴 것들임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는 왜 그것들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146~147쪽)

 

슬픔을 이기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한다.(151쪽)

고 얘기한다.

 

그의 방식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삶을 사는 방식을 통하여 죽음을 예비하자는 얘기가 아닐까.

 

그는 이렇게 얘기하며 이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텍스트를 내재적으로 읽거나 삶의 배경 맥락을 읽거나, 증거를 찾아 구축하여서, 해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다 덧없는 것이라 여겨 놓아두거나.(157쪽)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제주 어디에서 그의 강의가 몇 번 있다.

제주라는 섬이 치유하기에 좋은 곳인가 보다.

덩달아 나도 제주에서 그의 강의나 찾아들으며 일 년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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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29 16:25   좋아요 1 | URL
오늘도 주제가 묵직한데도 불구하고, 꼭 한번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듯합니다..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7-03-31 15:01   좋아요 0 | URL
그동안 강유원의 글들은 체화한 글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요번엔 감정은 자신의 것인데 내용은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느낌이랄까요?
아픈게, 두려워 하는게 고스란히 들어나서 좀 안쓰러웠어요~--;

단발머리 2017-03-29 19:51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까지 읽었던 <슬픈 불멸주의자>가 떠오르네요. 그 책에서는 죽음과의 타협을 제안했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 성숙하고 결연하기 보다는... 처음 겪는 일이니까요. 그 다음을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꼭 알아야하는 이야기지만 ‘죽음‘의 이야기는 참... 부담이 되기는 합니다.
강유원,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해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7-03-31 15:05   좋아요 0 | URL
저 님의 ‘슬픈 불멸주의자‘리뷰 봤어요.
좋았어요~^^

죽음도 그렇고, 죽음의 애도도 그렇고 ...껄끄럽지만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겠죠.
강유원은 님이 애정해 하시는 강신주와 더불어 제가 참 좋아하는 철학자예요.
강신주에 비해 탈렌트 기질이 좀 떨어지는 듯 하지만,
그간의 저작들을 봤을때, 전 애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님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3-29 19:59   좋아요 0 | URL
강유원이 이런 책도 썼군요.
덕분에 좋은 책 소개 받았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7-03-31 15:07   좋아요 1 | URL
인문고전강의, 역사고전강의, 철학고전강의와 더불어 이 책도 가볍게 접근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님도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불끈~!^^

잠자냥 2017-03-30 13:42   좋아요 0 | URL
아, 강유원 씨가 아픈 줄은 몰랐네요. 이 책 출간 소식 듣고 반가웠는데, 그런 일을 겪으며 나온 책이군요.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어보려 했는데, 왠지 사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양철나무꾼 2017-03-31 15:12   좋아요 1 | URL
한 10여년 편찮으신 후인가 봐요.
당신의 글 같지 않고, 좀 자신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는데,
힘내시라고, 응원하는 의미루다가,
별 다섯을 꽉꽉 눌렀습니다~^^헤헤~...

2017-03-31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3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04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05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