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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주운 한자
김동돈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서 길(道)을 만든다.
그 길(道) 위에 있을때,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반복되는 계절의 변화와,
따사로운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 내 몸을 감싸는 넉넉한 대기 따위...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
길 위에 있을 때(道) 나 또한 대자연의 일부인 인간(人)으로 거듭난다.
도(道)를 갈고 닦아 도통한 사람이 되는 것도 도인(道人)이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 길을 만드는 사람도 도인(道人)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길에서 주운 한자'를 쓰신 김동돈 님은 양쪽을 아우르는 '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제부턴가 길을 갈 때 한자ㆍ한문이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사진을 찍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간 찍어온 것들을 정리하고 약간의 군말을 덧붙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길에서 주운 것들로 책을 꾸린 만큼 읽히는 것 또한 길에서 읽히길 바라며, 특히 한자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는 이들에게 유익한 벗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적힌 책 날개 안쪽 프로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길과 한자에 대한 애정을 가히 짐작하겠다.
계절별로 길거리에서 만났던 한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한자를 만나면서 느꼈던 저자의 생각을 풀어내고,
그 한자들의 어원이나 변천과정을 알기쉽게 설명하는데, 재미있고 임팩트 있다.
매 단원마다 정리 문제를 곁들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선 공부한 한자만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같이 생각해볼 문제들이나 따로 깊이 생각해볼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저자는 수상집도 아니고, 본격 학습서도 아닌 모호한 책이라며,
서술방식도 일관성이 떨어지고 활동 반경이 좁다보니 다루는 소재도 폭넓지 않다며,
겸양을 부리지만,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드는 생각은 웬만한 내공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러니 이런 좋은 책이 탄생할 수 있었구나 싶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길에서 주운 한자니까,
사람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한자들이겠고,
그러려면 보편적이고 쉬운 한자들이라고 미루어 짐작했기 때문에,
다 아는게 아니라 다 알고 있다고 착각을 했고,
좀 만만하게 봤었던게 사실이다.
읽어가면서 이 책의 진가를 알게 되었는데,
길에서 주운, 주변에서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한자여서,
자주 쓰이는 비교적 쉬운 한자들인 것은 맞지만,
내가 그 한자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아는 한자라고 생각했던 것 중엔,
한자의 음 부분을 알고 있어서 대충 때려맞춰 읽는 것도 있었고,
한자의 부수나 뜻 부분을 미루어 음가를 읽어내지는 못해도 단어 속에서 뜻을 짐작하는 경우도 읽었다.
또 분명히 아는 한자여도 읽어낼 수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복잡한 한자의 경우 축약되어 간단한 형태로 쓰여도 전혀 새로운 글자가 되었고,
길에서 주운 글자라는 특성 상, 장식이나 포장물들이 많다보니, 장식용 글씨체나 멋부린 글씨체로 쓰여지기도 하는데,
살짝만 멋을 부려도 전혀 다른 글자 같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간판이나 현판처럼 쉬운 글자들을 비교적 읽기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글자가 눈에 익지 않거나, 중의적인 의미라서 버거운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길에서 한자를 제대로 줍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도 지식이겠지만,
전각이나 현판의 글씨, 비문과 비문을 탁본한 글씨 따위의 낯선 서체를 눈에 익히는 작업도 필요하겠다.
거기다가 중국의 역사와 고전에 대한 이해는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할테고 말이다.
때문에 중학생 정도면 충분히 알 수 있는 한자인 것은 맞지만,
중학생은 저자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도, 우러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쯤이었다면, 도인(道人)을 들먹여가며 설레발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때로 한자나 한문에 대한 과한 애정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랄까, 중화중심의 그것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곤 하는데,
이분에게선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어에 대한 앎이라는 차원을 넘어 적당한 간극을 유지하는 인문학적 통찰이 느껴져 명징했으며,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애정의 온기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어서,
읽는 내내 훈훈했다.
'찝찌름한 중국식 춘장을 달착지근한 우리식 장으로 색다르게 만든 점'을 내세우며
짜장면에서의 창조적 변형이 만들어낸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얘기하는가 하면,
오미자차와 관련하여선 포장지에 한자가 잘못 쓰인 것을 지적하며 농촌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안타까워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정부에서 농촌에 여러가지 지원을 하고 있는데, 이쪽 방면으로도 지원을 좀 해주면 어떨까 하는 해법을 제시한다.
경복궁의 현판을 설명하면서 '주역'을 예로 드는가 하면,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에선,
천간ㆍ지지 육십갑자를 꿰고, 동학과 동학혁명군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설명한다.
동학혁명군의 행동강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지면을 많이 할애하여 설명에 공을 들이는데,
이들의 목적뿐만 아니라 실패요인이기도 했다고 명확히 진단해 낸다.
개인적으로는,
절집들을 기행하면서 절집의 뒷간, 목판, 현판 따위 뿐만 아니라,
한자ㆍ한문 따위는 한 글자도 없는 토굴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승의 뜻을 되새기며 오늘날의 종교를 반성할 수 있게 해서 좋았고,
추사기념관과 추사고택 등 추사의 흔적을 따른 글들도 좋았다.
'인물성동이'란 주제를 놓고 벌인 남당과 외암의 논쟁을 언급한 부분 따위는 가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이 분의 설명방식을 한 부분만 옮겨보면 이렇다.
白은 해가 떠오르기 전의 빛깔은 하얗다는 의미예요. ㆍㆍㆍㆍㆍㆍ말하다란 의미로도 사용하죠. 告白의 白이 그런 의미죠. 해뜨기 전에, 다시 말하면, 늦기 전에 얼른 말해야 일이 성사된다란 의미로 '말하다'란 의미로 사용하게 된 거예요.(80쪽)
이 白과 관련하여, 다른 책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글꼴은 간단하지만 해설이 다양하다. 엄지손톱, 쌀알, 불꽃, 설명하다, 사람의 머리, 일출, 심지어 해골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ㆍㆍㆍㆍㆍㆍ따라서 백의 본뜻은 '동이 트다'이다. 동이 트면 어둠이 흰색으로 변하면서 밝아지므로 '희다, 하얗다'의 뜻이 나오게 되었다. ㆍㆍㆍㆍㆍㆍ흰색은 깨끗한 느낌이므로 '깨끗하다'는 뜻이 나왔다.ㆍㆍㆍㆍㆍㆍ깨끗하게 하면 텅 비기에 '없다, 비었다'의 뜻도 나왔다. ㆍㆍㆍㆍㆍㆍ밝아지면 사물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므로 '분명하다, 말하여 밝히다'의 뜻도 나왔다. (이인호 '하루한자공부' 부분 인용)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어찌보면 약간 다르다.
한자의 역사가 오랜 만큼이나, 간단하다고 생각되었던 한자도 해설에 다양한 견해가 분분한가보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때도, 꾸준함을 이기는 그 무엇도 알지 못하겠다.
가장 놀라웠던 건, 결혼하는 후배에게 의미있는 선물을 주려고 한시를 지었다는 거였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519/pimg_7451441771422851.png)
한시를 짓는것은 고사하고, 읽으며 뜻이라도 짐작하려다 보면,
단지 한자나 한문만을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란걸 알게 된다.
게다가 각운이나 압운 등 우리나라 시에선 생소한 운율이나 형식 등 고려해야 것이 많은 작업이다.
난 이 책을 이렇게 좋게 읽었고,
한 장이 끝날때마다 정리 문제를 통해서,
한자를 정리하고,
인문학적 입장에서 깊게 또는 폭넓게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꺼리들을 제공하고 있어서 내 스타일에 맞춤했지만,
이 책이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은 하나의 상품이고, 무형의 지식을 유형화해서 파는 것이다.
때문에 내용이 아무리 좋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겉표지나 책의 편집 상태 따위는 개개인의 기호에 따라 달리 읽히기도 하니 차치하고,
불빛에 뻔득뻔득 반사되는 종이를 사용해서 눈이 너무 피로하였고,
사진 속의 한자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암튼, 이제 1권을 막 끝냈을 뿐인데 2권을 기다리는걸 보면,
단점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길에서 만난 한자들을 매만져 길위에 풀어 놓았으니,
나도 길위에서 그 한자들을 익히며,
길 위의 도인이 됐든, 도통한 도인이 됐든, 무엇인가를 꿈꿔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