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에겐 엽기적인 버릇이 있다.
버릇이라고 하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걸 보면 버릇이라고까진 할 수 없으려나?
책을 읽다가 또는 드라마의 슬픈 장면을 보다가 눈시울을 붉힐라치면 수도꼭지라고 놀려대는 통에,
난 그가 남자는 평생 세번만 울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를 실천하는 부류라고 생각했었는데,
장례식장에 조문을
갈 일만 생기면,
잘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호상이고 아니고, 를 떠나서...
무장해제하고 맘놓고 앉아서 울다오는 모습이 내동 생경해서 적응이 안됐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때는,
영정 사진과 그를 번갈아보며,
나에게 숨긴 드라마틱한 과거가 있나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었는데,
의혹의 눈길을 이내 거두고,
이해 불가한 나와 다른 종족,
그리하여 마냥 호의를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선처하게 된 것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다가도,
다른 조문객이 오면 이내 추스르고 자리를 내어준 후,
아쉬움 없이 말간 얼굴로 식당으로 향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오해와 논쟁의 소지가 있으면서도, 난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다가도 모르겠는게 이 '호의'이다.
A와 B와 C가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유년시절과 성장과정을 보냈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서 100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다.
어떤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B는 어차피 보대끼고 어울려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주의였고,
A와 어느 부분에서 상응이 되고 어느부분에서 상충이 되는지 모르더라도,
설사 상응되는 부분을 알지 못하더라도,
오지랖을 부려 A의 자녀나 배우자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자잘한 호의를 베풀고 본다.
그 과정에서 상응되는 부분과 상충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라도 상응되는 부분보다 상충되는 부분이 크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때서야 뜨문뜨문해진다.
반면 C는 A와 상응이 되는 부분도, 상충이 되는 부분도 알 수 없으니 아무런 재스츄어도 취하지 않는다.
A의 안중에도 C가 없다.
이랬을 경우, 호의를 받아들이는 A의 입장에서 보자면,
B가 호의를 베푸는 마냥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A를 향한 감정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서운한 존재일 수 있는 반면,
C를 향하여선 아무런 감정이 없다.
'호의'가 반복되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줄 안다는 논리가 적용되는 순간이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만들어진 '해롤드 앤 모드'라는 영화가 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연극으로 상연되었던 적도 있다는데,
얼마전 '미생'의 강하늘과 박정자가 주인공 역을 맡아 다시 무대에 올랐다는 기사를 봤었다.
드라마 '미생'에 힘입어서인지, 강하늘의 입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엔 책으로 나왔다.
이 얘기의 처음에서 내가 장례식장에 조문가는 엽기 버릇남을 소개한 이유는,
이 영화의 해롤드와 모드 또한 남의 장례식장에 가는게 취미인 이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 해롤드는 19세 청년으로, 죽는게 또 다른 취미이다.
죽음을 취미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엽기적이지만,
삶에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으니, 자연 사람들과의 관계도 거부하는,
총체적인 무기력증 환자 정도 되시겠다.
반면, 80을 2년 앞둔 할머니 모드는 삶의 순간순간이 충만하고 축복이다.
순간순간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이 둘이 누군지도 모를 이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을때, 할머니 모드는 이런 말을 한다.
"여든 살은 너무 늦고, 일흔 다섯은 너무 이르다. 나는 일흔 여덟이고, 여든 살 되는 해에 자살할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다소 엽기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삶의 활력이 넘치는 할머니 모드는,
도덕에 얽매이지 않으면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한다.
어느날 꽃밭에서 모드는 해롤드에게 무슨 꽃이 되고 싶냐고 묻고,
해롤드는 다 똑같다며, 이들 중 하나라고 대답한다.
모드는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다며,
예전에 맡았던 향기를 보관해서 해롤드에게 권한다.
매순간순간이 꽃봉오리이니,
매순간순간을 사랑하고 기억하며 열렬히 사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해롤드는 모드를 사랑해'하는 고백에 '모드도 해롤드를 사랑해'라고 대답한다.
모드의 80세 생일날, 해롤드는 모드에게 청혼을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모드는 약을 먹고 자살해버린다.
그동안의 해롤드의 자살 기도가 엽기적인 취미로 보여졌다면,
모드의 그것은, 그동안 삶의 매순간순간을 충실하고 충만하게 살아서 그렇게 보여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기 스스로 택했다는데서 오는 일종의 경외심까지 생긴다.
모드가 죽은 후 해롤드가 엽기적인 취미생활을 또다시 시작하지 않을까 우려도 되었지만,
아마도 잘 살 것이다.
능력 이상의 오지랖을 부려,
상대로하여 '호의'가 반복되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줄 알게 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지만,
어떤 것도 해보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벽을 쌓아올리는 것, 또한 난 별로이다.
나도 남들에게 엽기적인 취미로 보여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열아홉이면 어떻고 일흔여덟이면 어떤가?
영화에서처럼 부잣집 철부지(물론 방점은 '부잣집', ㅋ~.)가 아니라, 주름 가득한 파파 할아버지면 어떤가?
취미가 서로 비슷하고,
심성이 비슷하게 곱고,
소속되어있는 정당이 같았으면 좋겠고,
동물을 사랑하거나 환경보호 단체에서 활동을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이 모두는 달라도 상관없겠다.
한마디 말이나 표정, 눈짓 만으로도 상대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언어가 다르면 표정이나 눈짓 만으로,
생활습관이나 가정환경, 문화적 배경이 다르면 그런대로,
충분히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살고 싶다.
근데,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줄 안다'를,
''호이~'가 반복되면 둘리인줄 안다' 고 알아들은 날 어쩔 것인가 말이다, 에혀~(,.)
해롤드와 모드
콜린 히긴스 지음, 정성호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