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다. (노엘레 노이만)
새움 출판사 판 '이방인'과 관련하여 '노이즈 마케팅'운운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자가 본명을 사용하였느냐, 필명을 사용하였느냐,
영어판을 사용하였느냐, 불어판을 사용하였느냐,
따위를 가지고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는 것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기득권의 그것 같아서 볼썽사납다.
난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하기 위해선 그보다 번역을 더 잘해야 하거나 그보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번역은 삶을 해석해내는 일과도 닮았다.
내가 안 살아봐서 모르는 타인의 삶을, 더 어려운 말로 내지는 문장의 호응에 맞지 않게 해석을 해놓았을 경우,
그 문장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문장순서 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이정서의 '이방인'을 얘기하는 것은,
그동안은 죽어도 안 읽히던 책이 쉽게 읽혔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사람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밀도 있는 장르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싶었기 때문이다.
장르소설도 그렇지만,
문학작품의 경우, 내 경우엔 그랬었다.
구석구석 다양한 장치들을 해 놓았는데,
여러문장들이 각기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적재 적소에 배치되었을때,
그것이 적절하게 해석되었을 경우,
응집력을 발휘하여 마음에서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을 경험하였고,
그게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 카타르시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얼마나 수려하고 매끄럽냐 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이러한 응집력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반응할 수 있도록,
다시말해 화학반응이 제대로 일어나도록 불순물이나 이물질을 끼워넣지 않는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정서의 번역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김화영의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정서의 그것을 두고 '도덕적 해이'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처음 바탕체로 밝힌 이유에서, 이정서가 이런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을만큼의 '도덕적 해이'를 가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세상에는 이만큼 기득권의 그것을 견뎌낼 수 없을만큼 도덕적인 역자들만 존재했었고,
그리하여 난 책이 고프고 목마른 독자였으니까 말이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