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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평점 :
'손철주의 그림 자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사람 보는 눈'은 대단한 책이다.
기자 출신의 미술평론가답게 '그의 그림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번엔 '사람 보는 눈'이란다.
'관상'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형상의학'차원에서의 '망진'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이쯤되면,
'청맹과니가 아닌 다음에야, 겸양이라고는 모르는 자화자찬으로 무장한 생색내기의 달인이라고 퉁쳐버릴텐데,
그를 통하면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것이 간과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앞서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누가 묻는다. "그림에 좋고 나쁜 것이 있습니까?"
나는 답한다. "좋고 나쁜 것이 있다기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지요."
또 묻는다. "그림은 만드는 것이지요?"
또 답한다. "만들어야 그림이 생기지요."
다시 묻는다. "만든 것이 어떻게 감동을 주나요?"
다시 답한다."생긴 듯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 그림에서는 생김 생김새를 따질 노릇이다.
사람 그림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변덕이 죽끓듯하여,
좋아하는 작가도 때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답이 달라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손철주'다.
난 그동안 화려한 수사를 쓰는 사람은 별로라고 했었는데,
그의 글을 깊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화려한 수사'를 제일 먼저 떠올릴테고,
"이, 뭥미~?"하고 툴툴거릴 수도 있을테지만,
그의 글은 화려하기만 하지 않다.
화려하고 고혹적인 동시에 깔끔하고 청순하다.
난, 그림과 글을 벼려내는 솜씨로 미루어 그의 '사람을 보는 눈'을 살짝 엿보거나 전수받고 싶었나 보다.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 꽃을 보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숲을 걷는 사람과 물에 가는 사람 들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는 그의 말 속에서,
'사람이 그림 밖에 있는 사람 그림'도 있다...를 읽어낸 내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다시말해 화폭에 사람이 없는 그림도 있지만, 그런 그림들이라고 하여 사람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화폭에 사람이 없는 그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람을 보는 눈'은 밝히고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 그림들을 죽 펼쳐놓고 보면서 깨단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모자라,
'그림 밖의 사람은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고, 그림 속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 이럴진대 사람 그림을, 그려진 사람으로만 여기겠는가. 보고 또 볼 일이다.' 라고 눙친다.
말 그림 하나를 본 두보가 '살만 있고 뼈가 없다'며 탓했다. 소동파는 정색하고 두보를 나무랐다. '길고 짧은 게 있는데 살진 것만 보는가.' 다들 보이는 것만 본다. 살과 뼈, 길고 짧음, 설혹 모두 다 갖췄다고 명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소매가 길면 춤 잘 춘다지만 장식과 기교는 군더더기가 되기 쉽다. 겉모습을 그려도 설탄처럼 고갱이를 콕 짚어내야 잘된 그림이다. 그게 어디 그림뿐이랴.(19쪽)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과 기교는 군더더기가 될 수 있으니, 고갱이를 콕 짚어내야 잘된 그림이겠다.
화려하고 고혹적인 동시에 깔끔하고 청순한 그의 글맵시처럼 말이다.
'그게 어디 그림뿐이랴' 뒤에는 '사람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소제목을 뽑아낸 품을 보면,
각양각색,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 이런 저런사람들 속에서 그가 어떤 사람들을 보고 있는가 하는 그의 '사람보는 눈'을 짐작할 수 있겠다.
김홍도의 '세마도'를 두곤 '저 사내의 느긋함이 부럽다'고 하며,
한시각의 '삿갓 쓴 사람'을 일컬어 '덜 그려도 다 그렸다'라고 한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傳해지는 '미인화장'을 두곤 '꾸민 티와 노는 짓'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유신의 '포동춘지'를 가지곤 '옷자락에 꽃향기 나눌 친구'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꽃사랑도 지나치면 밉보인다' 강렬하게 시작해서 얘기를 어찌 풀어나가나 했는데,
'두보 같은 대시인의 탄식이 그렇다'느니, '왕안석의 토로는 더 안쓰럽다'느니, 하다가는...
이내, '아끼는 마음도 유만부동, 이 정도면 속이 간지러워진다'며 은근슬쩍 구렁이 담을 넘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아흑~--;
이런 문장은 또 어쩔 것인가 말이다.
멀쩡한 사내들이 왜 봄날의 꽃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해댈까. 아무려나, 다 봄이 짧은 탓인데 어쩌겠는가. 봄은 짧아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훅간다. 꽃인들 다르랴. 열흘 붉기가 어려울 때, 꽃은 서글피 아름답다.ㆍㆍㆍㆍㆍㆍ (59쪽)
책을 읽는 내내 눈만 환해지는게 아니라, 마음까지 밝아지고 환해지진다.
이쯤되면 두루두루 호사다.
하지만, 이런 글 속에서 느끼게 되는 단 하나는,
화려하다 못해 흐드러지는 수식이어도,
그게 자연의 일이고, 또 진심을 담고 있다면...그게 장식과 기교라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고갱이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지금의 손철주에게 '마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젊었더라면 아무리 글이 화려하고 고혹적이더라도 농익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테고,
좀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깔끔하고 청순하다기보다는 초라하고 궁상맞게 느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이런 구절이 한몫을 하는데,
우리는 중늙은이다. 얘기는 연애담으로 올라갔다가 금방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젊은 여자들의 물 오르는 푸르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락한다고 했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
'마침'하면서 '맞춤'하기까지하다.
예를 들면,
'눈동자가 또랑또랑한데다 앵둣빛 입술이 남정네를 안달하게 만들거라며, 이 저녁에 기생이 부릴 수작이 눈에 선하다'는 그림 설명 바로 밑에,
'그 그림에 그 대거리다. 다들 멋들어지게 논다' 라고 첨언하는데,
그의 입을 통해 나오니 풍류가 되고 추임새가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농짓거리나 욕 이상도 이하도 아닐 뻔 했다.
초상화에서는 터럭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외양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의 초상화는 '傳神기법'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정신을 전달한다'는 얘기다. 모델의 정신까지 화면에 살려내는 이 기법은 눈동자 묘사에 성패가 달려 있다. '눈은 정신을 빛내고 입은 감정을 말한다'고 했다. 송인명 초상의 백미는 입이다. 입은 '口心'이라 했다. ㆍㆍㆍㆍㆍㆍ 사람 좋아뵈는 이 인상은 저항하기 힘든 포용력으로 비친다. 그의 품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초상화는 서양 것이 눈에 쏙 든다는 사람이 많다. 인물을 닮게 그리는 솜씨, 휘황찬란한 복색, 자르르한 유화의 기름기는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한다. 우리 초상화는 어떤가. 색은 칠한 둥 만 둥, 붓질은 듬성듬성, 게다가 작은 종이나 천에 그려 압도하는 위용이 없다. 그렇다면 비교우위가 어디에 있는가. 앞서 말한 '전신', 곧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리는' 방식이다. 겉을 꾸미느라 속을 놓치는 초상화는 허깨비 인물상에 머문다. (63~65쪽)
수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물의 거죽보다 사물의 뜻을 그리는 방도로 각광받았다.(70쪽)
결국 그림이라는 것은 사물의 거죽을 통해 사물의 뜻을 그려야 하는 거라고 얘기하고 있다. 사람 그림은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려내고 또 전달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 보는 눈'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거죽'이나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사물의 뜻'과 '사람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윤두서의 <자화상>에는 이런 평이 달렸다.
처음에는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버렸다.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데, 그게 묘한 아우라를 빚는다. 공재의 됨됨이가 궁금하면 자화상을 보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기보다 실존이 본질이다.(99쪽)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기보다 실존이 본질이다'는 말은...
사물의 거죽이 사물의 뜻을 이미 담고 있다는 뜻이겠고, 사람의 얼굴이 사람의 정신을 이미 담고 있다는 뜻이니,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주 멋지지만, 멋지다고 하고 퉁쳐 버리기엔 너무 큰 뜻을 담고 있다.
처음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을때도 '실존'이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 상태인 지금도 '본질'은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니 실존이 곧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의 옷이나 귀가 장식이나 기교 따위의 군더더기가 아니라, 고갱이인것은 명명백백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다 닳아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 지금도 고갱이가 흐려지거나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실존이 본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것은 답을 찾아가는 길이 된다. 옛것에서 얻은 앎이 함이 되지못하는 것은 옛것의 결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자의 결핍일 뿐이다.(152쪽)
손철주의 글을 읽노라면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같아서 황홀하다.
함포고복하고 배 두들기기에 충분하다.
맞춤법이나 어법 내지는 오ㆍ탈자를 가지고 거슬렸던 적도 없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한참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함'이라는 낱말이 '힘'을 잘못 적은게 아닌가 싶었다.
왜냐하면 '결함(缺陷-이지러지고 빠지다)과 대구가 되려면 '함'은 결함과는 반대 의미여야 되는데,
자꾸 결함의 '陷(빠질 함)'만을 떠올렸다.
앞의 함은 '다,모두'의 뜻을 가진 咸이었다.
이런 문장의 진의까지 깨닫게 되고나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비밀 댓글로 저 '함'은 지행일치의 그 '함'인 것 같다고 해주신 분이 계셨다.
그러고 보니, 말된다.
알다와 행동하다, 앎과 함~
이 책이 지금의 손철주에게 '딱'이라고 했던 또 하나의 '예'다.
봄날 풍정을 그렸는데 맛문한 여름의 꿀잠과도 맞다. 할 일 없어서 낮잠 자는 게 아니다. 마음이 편해서 잔다. 눈이 바깥을 보면 마음도 바깥으로 간다. 마음을 거두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여름날의 낮잠은 엉킨 시름을 풀어준다. 잠시 눈을 감아보라. 바쁘면 하루가 짧고 고요하면 하루가 길다.(170쪽)
김홍도의 '낮잠'을 설명한 그림이다.
난 닉네임이 '또 자니?'의 'jani'일 만큼 잠에 일가견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하나, 둘, 셋, 레드썬~!'처럼 잠들 수 있다.
그래도 염치라는건 있어서,
벌건 대낮에 낮잠나는 제자를 보고 공자가 화를 냈다더라...하는 문장을 만나면 마냥 허허로울 수만은 없는데...
김홍도를 편들고 나선 손철주의 저 문장이 내게도 힘이 된다.
하지만, 좀더 이르거나 늦은 나이의 그를 통해서 나왔다면...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못하고 허물어진 담장은 회칠을 못한다는 공자의 지청구를 들었어여 했을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은 어떤가?
신윤복의 남녀 통정에는 관계의 금칙을 벗어나려는 모종의 심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트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관계인데, 관계를 넘어서야 이뤄지는 사랑. 그 사이에서 도리는 갈등한다. 도리가 감시하기에 사랑이 뜨거워지는 그 얄궂은 심리와 정황을 신윤복은 늘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206쪽)
내가 언젠가 읽었다던,
'우리는 중늙은이다. 얘기는 연애담으로 올라갔다가 금방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젊은 여자들의 물 오르는 푸르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락한다고 했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
는 자중자애하는 문장을 통하여 그의 속내를 이미 들여다봤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래야 단원과 혜원을 향한 그의 이랬다 저랬다 하는 찬사가 변심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 구절이다.
단원과 혜원의 진면목이 그러하듯이 조선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풍속화는 은근한 에로스가 진국이다. 다소 싱거운 듯해도 자극을 걷어낸 담박한 맛이 일품이다. 봄은 덧없다. 오는 듯 가버린다. 그 찰나적 황홀이 한 줌의 재가 될지언정 봄날의 상사는 누가 말려도 핀다. 그래서 사랑은 가없다. 조선의 풍속화는 봄날의 짧은 황홀과 아찔한 유혹, 남녀의 가녀린 떨림과 끌림을 담는다. 되바라지지 않게 묘사된 사랑의 풍속화, 그것이 남녀의 춘심을 바라보는 우리 조선의 오래된 서정주의다.(211쪽)
인생의 봄이나 여름을 살고 있는 사람이, 봄은 덧없다,오는 듯 가버린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면...누가 콧방귀나 뀌었겠는가 말이다.
'젊은 여자는 봄을 타고 늙은 남자는 가을을 앓는다. 갈바람에 울적한 백거이는 '취한 내 모습 서리 맞은 단풍/발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하며 한숨지었다. 올 가을 단풍에 또 누구 가슴이 멍들까.(225쪽)'
라는 읊조림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까지 전달되는 여운이 있는것이니까 말이다.
강세황은 산수화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바 있다. '진경은 닮게 그리기 어렵다. 참된 것을 감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은 숨겨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인적 없는 산수화가 이윽고 그윽해졌다.(216쪽)
내동 같은 얘기이지만,
나같은 사람이 책 한권 읽었다고 '사람 보는 눈'을 하루아침에 전수받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이고,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찾아나서는게 빠르겠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의 제일 끝에라도 가서 줄을 서는게 빠르겠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사람보는 눈'에 관한 비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쯤 되겠는데,
다시말해 '사물의 거죽'이나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사물의 뜻'과 '사람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쯤 되겠는데,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얘기겠느냐 말이다.
계획되고 계산된 여백과 절제의 미, 극소에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고...따위는 내겐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계획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냥 마음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데...그것이 자연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음 좋겠다.
다시 말해, 난 죽었다 깨어나도 '사람을 보는 눈'따위는 가질 재간이 없으니,
저런 눈을 가진 사람 근처에서 얼씬거리다가, 간택되어지는게 더 빠를 거라는 얘기이다.
고로 이 책을 읽은 감상은, 이쯤으로 정리해야 겠다.
나 같은 凡人들은 그냥 마음 움직이는대로 살아도, 그게 크게 하늘이나 자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보는 눈' 따윈 의식하지 말고,
한번 사는 인생, 지지고 볶고 웃고 다투고 화해하고 토라지고... 하면서 순간 순간을 가열차게 살면 되는 것이다.
신은 내게 따로 '사람 보는 눈'은 주지 않으셨을지 모르지만,
사람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사람 저사람 보고 고르는 유난 떨지않고,
수더분하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분지족하자,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