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다.

책을 읽어도 문장들이 내 눈을, 음악을 들어도 선율이 내 귀를...비껴갈 때가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꽃들이 만발한 봄날에 독서나 음악 감상 따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더라만...

만발하다는 건 다른 의미로 흐드러졌다는 얘기이고,

흐드러졌다는건 이내 지고 열매 맺는다는 말일테니..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쿨하게 털어버리고 일어나야 할텐데 요번엔 자꾸 엉뚱한 상념에 젖는다.

 

요즘 민음사 刊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다고 이곳 서재에 광고를 했더니,

누군가 땡큐하게도 톨스토이는 '박형규'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어디선가,

국내 번역가 1세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 권위자라는 기사를 봤었던 것도 같다.

올해 82세인 그는 내년 말까지 '톨스토이 전집'(뿌쉬낀하우스)을 펴낼 계획인데,

그 뿌쉬낀 하우스에서 현재 '안나 까레니나' 한권이 먼저 나왔다.

요번 '안나 까레니나'는 문학동네에서 나와 현재 반값에 후려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뿌쉬낀 하우스의 것을 한권 한권 콜렉션하고 싶은 마음에 구입해 주셨다, ㅋ~.

 

 

 

 

 

 

 

 

 안나 카레니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3년 4월

 

암튼,

읽던 책을 던져버리고 새 책을 집어들도록 내 마음을 움직인건 '권위자'라는 단어였는데,

시대에 뒤지지 않도록 유행어를 바로 바로 반영해야 하는 언어의 속성 상,

나이 80이 넘어 시대상을 반영하는게 가능할까 하는 우려를 했었고,

또 간담회에서 노환으로 청력이 떨어져 같은 질문을 두 번, 세 번 확인해 전달받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마음 한 구석에선 한분야에 60년 이상을 매진한 노학자에 대한 예우 차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유명한 이 첫문장을 보는 순간 나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청력은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청력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시대와 소통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당신 만의 더듬이로 언어에 대한 감을 유지하고 계셨던 거다.

'권위자'란 그 분야에 정통하고 탁월한 전문가를 일컫는단다.

언어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언어에 대한 감을 유지하는게 중요한데,

그 감이라는건 세월이 흐를수록 무디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허를 찌른 것이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박형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민음사)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아 보인다. 하지만 불행한 가족들은 각기 고유한 방법으로 불행하다.(김의기)

 

자신의 분야에서 정통하고 탁월한 전문가나 권위자까지는 아니어도,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신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의 신뢰 구축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의 '영거한 외모'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내 스스로는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뻑.하고 있지만, (언젠가 썼던 '타인의 취향' 링크)

그런 나도 한 번씩 좌절을 겪긴 한다.

내가 이 부분에서 자.뻑.이 아니고 진짜 달인이어도 해결을 볼 수 없는 세 부류가 있는데,

환자가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이어서 의학의 효능을 신뢰하지 않거나,

치료방법을 신뢰하지 않거나,

치료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그런 예이다.

 

이들 부부를 알고 지낸건 7, 8년 정도 된다.

할머니는 키 크고 곱고 늘씬하였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활달하였다.

음식 솜씨 좋아 음식을 해서 나눠 먹기를 좋아하여 주변에 할머니 친구들이 끊이질 않았다.

반면 할아버지는 곱상하게 생기신데다가 말을 많이 아끼셔서 선비 같은 성품이라고 짐작했었는데,

한번 화가 나면 할머니에게 욕을 하고 손찌검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구시대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살아온 세월 때문인지 잘 참고 살아오셨다.

 

나의 오너께서는 엄청 부자니까 비싼 약재 팍팍 넣어 약을 권하라고 종용하셨지만,

구시대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의 최첨단을 걸으시다가도,

둘이 합해 이천 원 남짓한 진료비를 계산할때만 되면,

신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더치페이를 구사하시는 이분들에게 이도 안들어갈 소리 같았다.

내가 결정적으로 이들 부부, 아니 할머니에게  충격을 받은건,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동네에서 왕계란 두판을 들고 병문안을 왔는데,

계란말이 좋아하는 손주들 오면 해주려고 모셔 두느라고 하나도 드시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를 들었을때 였다.

 

그런 할머니가 얼마전에 오셔서는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좋은 약재 넣어 약 한재 지어달라고 하셨는데,

당뇨가 심하여 인슐린 주사까지 맞으시는 기왕력에다가,

요즘은 그나마 그 인슐린 주사로도 혈당 수치를 조절하지 못하시는 듯 하여...

더구나 등쪽 날개쭉지 끝나는 부분이 아프다는 말씀에,

간에 부담을 주는 한약이라니 싶어,

큰병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아보시라고 돌려보낸게 한달쯤 전이었다.

다른 한의원에 가서 보름치 한약을 지어 드시고는 차도가 없으셨는지 여기저기 병원을 돌고 돌았으며...

검사 결과, 췌장암이란다.

 

물론 내 말이 설득력 있게 작용하여 한 달 전에 큰 병원에 가셨다고 한들,

검사결과나 진단명을 번복하지는 못했을테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좀 길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내가 일하는 분야에 있어서 나의 권위나 신뢰라는 것은,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할 정도,

나중에 후회하며 연락해 올 정도, 밖에 안되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것이다.

 

박형규 님의 안나 까레니나를 읽으면서 단어와 문장을 벼리는 품이 남다르다는 걸,

언어를 가다듬는 센스랄까 하는게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이게 타고나기만 한 게 아니라, 오랜 삶의 체득을 통하여 둥글린 느낌이다.

그렇다고 세월이나 나이만큼 올드하거나 고루하지도 않다.

소위,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깨닫는다는 '온고지신'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박형규 님의 권위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권위나 신뢰라는 것이, 외모나 나이 같은 것으로가 아니라  그 분야에 정통하고 탁월한 전문성으로 판가름나는 것이니 좀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 하다가도,

내가 가꾸고 노력해야 할 것이 외모나 나이 따위 또는 학문에 힘쓰는 등 나의 노력으로 성취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 분야에 정통하고 탁월한 전문성이라는, 어찌보면 애매모호하고 주관적인 다른 사람들의 판단력이 개입되는 문제라고 생각 하니...앞으로 무엇을 더 갈고 닦아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며칠전에 읽은 <뇌미인>이라는 이 책을 보면,

사람들은 지적 활동을 해야만 뇌에 알통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기에 더하다.

 

 

 

 

 

뇌미인
나덕렬 지음 / 위즈덤스타일 /

 2012년 10월

 

사람들은 지적 활동을 해야만 뇌에 알통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뇌 알통을 만드는 가장 효율적이고 쉬운 방법은 신체 운동이다.ㆍㆍㆍㆍㆍㆍ우리 치매 연구팀에서는 뇌 유연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뇌 유연성이 많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젊은 사람에게서 근육 알통이 더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노인들에게서 오히려 뇌 유연성이 좀 더 많이 나타났다. 물론 똑같은 과제를 하면서 젊은 사람과 노인을 비교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ㆍㆍㆍㆍㆍㆍ노인들은 은퇴 이후에 아무래도 뇌를 덜 쓰게 된다. 고령이 될수록 더욱 그렇다. 따라서 쓰지 않던 뇌에 자극을 주면 더 큰 변화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인도 뇌를 사용하는 횟수를 늘리거나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도 뇌 알통이 생긴다는 것이다.(28~29쪽) 

 

박형규 님을 보면서 든 생각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행운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행운이지만,

적어도 그 일을 하면서 밥을 안 굶을 수 있고 가족들 밥을 안 굶길 수 있어야겠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자리가 잡히고 가족들 밥은 안 굶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준비는 갖추어 졌는데,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배우고 또 배운대로 실천할 수 없다면 다 부질없다.

 

그러니 한번 사는 인생,

죽을 때 돈을 싸들고 갈 수 있는것도 아니니,

아등바등 하고 참지 말고,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 하고 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라는 저 자리에 대입시켰을때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건,

'보고싶은 사람' 이다.

보고싶은 사람들이 많아 미치겠는,

미치고 팔짝 뛰겠는,

근데 아직 '꼴까닥~'내지는 '깰꾸닥~'까지는 아닌,

그런 비 내리는 봄밤이다.

이 비 그치면 목련이, 그리고 벚꽃이 이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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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4-21 09:24   좋아요 0 | URL
번역을 공부하는 어떤 사람은,
또 저처럼 한국말을 공부하는 어떤 사람은,
헌책방에서 박형규 님 '여러 가지 번역책'을
일부러 하나하나 사서
견주어 읽기도 해요.

박형규 님이 번역한 톨스토이는
'시대에 따라' 말투가 조금씩 다르답니다.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책이 나온 때에 따라서
말투가 조금씩 바뀌곤 해요.
스스로 꾸준하게 가다듬고 손질하시거든요.

늘 스스로 번역을 새로 하고
당신 스스로 한국말을 날마다 새롭게 배우시거든요.

북극곰 2013-04-22 09:18   좋아요 0 | URL
안나 까레리나의 저 첫 문장은 아주 어릴 적에 보고도 참 기막힌 말이다. 싶었는데. ^
삼중당 문고판이었던 것 같은데, 같은 번역가였을까요? 꼭 저 문장이었거든요.
나름나름, 고만고만.... ^^

나무꾼님 잘 지내시죠?

간만에 어젠 남한산성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너무 과식하는 바람에
저녁도 건너띄고 아침도 조금 먹었는데도 아직 위가 꼼짝도 안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소화도 못 시키면서 식탐이 이렇게 많아서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