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 열림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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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얼굴이 궁금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저자의 경우는 저자 어머니의 얼굴이 참 궁금했다.

(물론 저자의 얼굴은 책 날개 안쪽에 단정하게 실려 있고,

인터넷에 저자 이름 석자를 치는 수고를 해도 나오니까~^^)

그런데, 나같은 오지랖이 또 있었는지, 요번 작품에선 원없이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얼굴을 보면서 든 생각은,

"나도 참...그어머니에 그 아들이지 ...뻔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끔 판박이구만,

 뭐가 한참 다를 줄 알고 얼굴을 궁금해했나? ㅋ~."

속 좋은 듯 허연 이를 한껏 드러내고 눈꼬리에 자글자글 주름을 만들어가며 웃는 모습이 꼭 닮았다.

 

 

 

처음엔 모자의 웃는 모습을 쳐다보며 따라 웃다가, 이내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작년 초여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생각나서였다.

그러고보면, 어머니란 단어는 만국공통어쯤 되고,

어머니라는 발음만으로도 만인을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것인가 보다.

 

아니, 어쩜 한숨과 고초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농사일...

이 모두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공용어인지도 모르겠다.

 

한숨의 크기

어머니 학교 19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 흐린다지만,

그 미꾸라지를 억수로 키우면 돈다발이 되는 법이여.

근심이니 상심이니 하는 것도 한두 가지일 때는 흙탕물이 일지만

이런 게 인생이다 다잡으면, 마음 어둑어둑해지는 게 편해야.

한숨도 힘 있을 때 푹푹 내뱉어라.

한숨의 크기가 마음이란 거여.

 

어머니의 한숨 수를 세어봤더라면 아마 우리 남편이 일등 공신이 아닐까 싶다.

하루는 한숨을 쉬다 나한테 들키시곤 겸연쩍으신지,

'식용소다'라고 적힌 봉지의 흰가루를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 안에 떨어넣으셨다.

"어머니, 그걸 왜 드세요?"

어머니는 눈을 곱게 흘기시며,

"이 신맛보다 더 신게 시집살이라는 데, 너도 한술 먹어볼래?"

 

한숨을 유난히 많이 쉬셨던 어머니.

한숨의 기전은 따로 있지만,

'한숨의 크기가 마음이란 거여.'하는 이 시에서처럼이라면,

어머니의 마음 크기는 망망대해 같았을게다.

아니, 실제로 망망대해 같았다.

근심이니 상심이니 인생사 간난고초를 거두어 감추기만 하셨지,

한번도 흔들리는 부표처럼이라도 수면 위로 드러낸 적이 없으신 분이었다.

 

하늘 벼루

어머니학교22

 

 

너무 바쁘고 힘드니까

 

 

밤낮없이 밤밤이었으면 싶어.

 

 

하느님은 붓글씨 안 배운다니?

 

 

벌건 해 벼루 삼아 밤밤으로

 

 

흥건하게 먹이나 좀 갈지.

 

시인의 어머니는 '힘들다'는 말을 소리내어 하셨을까?

'힘들다'소리내어 말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한숨이 아니라 크게 심호흡 한번 하고 호탕하게 웃어 떨어버릴 수 있는 분이실게다.

어머니가 한번도 '힘들다'소리내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그랬었고,

임종을 눈앞에 두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그러셨다.

'너무 바빠서 힘드니까'내지는 '너무 바쁘니까 좀 쉬었다가 하게'가 되어도 좋겠다. 

 

언젠가 새벽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시는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안좋아서,

알람 시계가 고장났다고 한 적이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서 움직이실 줄 알았더니 웬걸, 어머니는 밤새 못 주무시고 깨어 계셨다.

 

사랑

어머니학교 29

 

 

편애가 진짜 사랑이여.

논바닥에 비료 뿌릴 때에도

검지와 장지를 풀었다 조였다

못난 벼 포기에다 거름을 더 주지.

그래야 고른 들판이 되걸랑.

병충해도 움품 꺼진 자리로 회오리치고

비바람도 의젓잖은 곳에다가 둥지를 틀지.

가지치기나 솎아내기도 같은 이치여.

담뿍 사랑을 쏟아부을 때

손가락 까닥거리는 건 절대 들키면 안 되여.

풀 한 포기도 존심 하나로 벼랑을 버티는 거여.

젖은 눈으로 빤히 지릅떠보며

혀를 차는 게 그중 나쁜 짓이여.

요번 시집에서 내 마음에 가장 들었던 시는 이 시 '사랑'이다.

'편애가 진짜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당신이야말로,

고른 사랑을 얘기할 수 있는 분이다.

 

뛰어난 것을 북돋워주는게 사랑이 아니라,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곧추 세워 고르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담뿍 사랑을 쏟아부을 때,

쏟아붓는 당사자 외에는 수혜자나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선 안된단다.

존심이 걸린 문제란다.

사랑과 동정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함은 당근이다, ㅋ~.

 

가슴 우물

어머니 학교 48

 

 

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겄냐?

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

어미가 이런저런 참견만 느는구나.

늙을수록 고양이 똥구멍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한숨을 말끔하게 내몰질 못해서 그려.

뒤주에서 인심 나는 법인데

가슴팍에다 근심곳간 들인 지 오래다 보니

사람한테나 허공한테나 걱정거리만 내뱉게 되여.

바닥까지 두레박을 내리지 못하니께

가슴 밑바닥에 어둠만 출렁거리는 거지.

샘을 덮은 우덜거지를 열고 들여다봐라.

하늘 넓은 거, 그게 다 먹구름 쌓였던 자리다.

어미 가슴 우물이야, 말해 뭣 하겄어.

대숲처럼 바람 소리만 스산해야.

 

그동안도 그랬고, 요번 시집에서도 그렇고...

어머니를 옮겨놓았다는 그의 시를 통하여 느끼는 걸 하나로 압축시켜보면, '배려'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을 할때고,

글을 쓸때고,

행동을 할때고,

상대방이 왜 그렇게 말하고 글 쓰고 행동했는지...를 한번만 생각해 본다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누구나 다 그 같은 시인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일흔 두 편 중 내맘대로 골라낸 네 편은 코끼리 뒷다리의 발톱 만지기이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시와 사진들이 시집엔 더 다양하다.

일독을 권한다.

난 한동안 이 시집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보듬고 쓰다듬고 어루만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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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1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0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11-02 06:57   좋아요 0 | URL
'배려'란 바로 '마음'이잖아요.
마음으로 어머니를 만나고,
동네 어르신을 만나고,
내 가까운 동무랑 이웃하고 인사하고,
그러면서
시가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2-11-02 09:24   좋아요 0 | URL
맞다~, 된장님도 바로 그런 시인이시잖아요.
늘 그런 귀한 맘이 담긴 시들, 사진들 잘 받아보고 있어요, 꾸벅~(__)
아참참,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출간 축하드려요.
지금 읽고 있어요.
깜냥은 안 되지만 읽고 느낌을 끄적거려 보기로 하죠, ㅋ~.

hnine 2012-11-02 13:47   좋아요 0 | URL
이 시집 읽다가 시 두편 서재에 올려두고 검색해보니 양철나무꾼님께서 바로 어제 올리신 페이퍼가 있네요!
추울때마다 꺼내 읽으면 좋은 시들이 잔뜩이지요? 마음이 따뜻해질거예요.

양철나무꾼 2012-11-05 10:34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hnine님~^^
계절 참 빠른거 같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워, 더워~' 하며 시원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말예요.
가끔 들려 읽는 님 서재 글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마냥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좋아요.
그쵸? 이정록 님 요번 시집도 정말 좋죠?^^

하늘바람 2012-11-02 15:54   좋아요 0 | URL
어머니 그림이 참
와닿는 책이네요
좋은 시들이 잔뜩이라니
언제나 님 서재에는 보물이 가득한 느낌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11-05 10:45   좋아요 0 | URL
보물이라고 봐 주시는 하늘바람님 눈에는 보물창고인거죠, ㅋ~.

블루데이지 2012-11-03 17: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hnine님 서재에서 이.시집읽고 너무 가슴이 찡해 양철나무꾼님께서 올리신 글도 읽어보려고 왔어요!
추워지는.계절 가슴도 따뜻해지고, 삶도 더 진지해지는 글들.잘.읽고 얻어갑니다!

양철나무꾼 2012-11-05 10:47   좋아요 0 | URL
네, hnine님 서재는 언제 읽어도 따뜻한 글들이 많죠, ㅋ~.
전 블루데이지님 예전에 즐.찾.해 놓고 몰래 엿보곤했었는데...
이렇게 커밍 아웃해주시다니 반갑습니다여, 꾸벅~(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