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 지음, 김남주 옮김 / 현실문화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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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매일은 아니어도 출근할때 종종 지나다니는 길이었지만, 길 옆으로 공터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엊그제 보니 그 공터에 이런저런 꽃과 풀들이 싱그럽게 피어올라 자라 나고 있었다.

꽃과 풀이라고 여겼던 건 눈여겨 보니 상추, 고추, 호박...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 사이 보랏빛 예쁜 꽃이 내 발길을 붙들어 잠시 멈추어서 보니, 

그렇게 이쁜 보랏빛으로 피었던 건, 

거창한 이름의 꽃이나 풀들이 아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고 또 먹기도 하는 흔하디 흔한 가지의 꽃이었다. 

내 발길을 붙들었던 것이, 가지의 꽃이었다는 사실이 어떤 깨달음을 줬다.

쉽게 접하게 되고 식탁에 자주 오르내리는 가지라는 거무튀튀한 채소의 꽃이 그렇게 예쁘게 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순간,

행복이 뭐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마음을 열고 눈 떠 바라보기만 하면...행복은 우리 옆에 늘상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깨닫게 되었달까?

 

그리고 그 무렵 '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을 읽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는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여자가 늑대와 같이 뒹구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녀를 알게 된게 음악을 통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보다 한살 많은 그녀의 곡에 대한 해석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으며, 음악 세계라는 것이 방대하면 얼마나 방대하겠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나이에 관계없이 매혹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렇게 매혹적인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일조한 부모나 스승 등 숨은 공신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 책은 여행기의 성격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여행기인지 소설인지,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인지 상상한 바를 쓴 글인지, 도통 모르겠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이긴 하지만, 글도 수준급이어서 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고 성찰하게 하는 바도 컸었다.

때문에 경계를 나누다보면,

그녀를 피아니스트로 분류해야 될지 글을 쓰는 작가로 분류해야 될지 혼란스러워지는데,

이런 느낌을 연예인 구혜선과 첼리스트 장한나에게서도 받았었다.

예술도 종교처럼 어떤 경계를 넘고 나면 하나로 통하고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성긴 그물 망을 자유자재로 왔다갔다하는 바람이나 공기와도 같아서

경계를 나눠 이름 붙이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었다.

 

암튼, 그녀는 피아니스트로 이름 붙여졌다.

피아노 곡을 해석하다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극복하기 위해 오른 여행 길 위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들과 보대끼면서 얻은 깨달음을 '특별 수업'이라고 명명한다.

 

살면서 내가 보통 이상의 넘치고 과분한 복을 받았다고 느낀 경우가 세번쯤 있었는데,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친구를 만났구나 싶었을 때...

그들을 통하여 습관처럼 물들기도 하고, 보고 배우고 익히고 가르침을 받기고 하고,

닮고 싶어 흉내내다 은연 중에 스며들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나를 한뼘 성장시키고 나아지게 한다 싶어 무한 감사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엘렌 그리모 - 그녀는 나랑은 좀 다른데,

"스스로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 아찔한 공부로부터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고 얘기하며 그녀 자신 내부에서, 그녀의 음악에서 행복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에게 배우는 것이됐든, 스스로 배우는 것이 됐든 이 모두 '도를 닦는 과정'이고,

어떤 형태로든 배움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으면 그걸 '득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를 통하여 배우고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경우라서,

여느 때는 책도 사람 못지 않은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라서,

스스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거니와 스스로를 가르쳐서 나아질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나랑은 좀 달랐고,

그래서 독특했으며,

이미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 -'득도'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랑은 다르게, 득도했거나 도통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은,

고백하자면 이 책을 시작부터 한참 난해하게 읽기 시작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몇 번을 되풀이 해서 읽고, 툴툴거리며 주위 사람에게 의견을 물은 후에야 그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원하는 소리, 공격적일 정도로 절실하지만 명징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 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를 끌어내야 했다.ㆍㆍㆍㆍㆍㆍ소리? 당연히 명료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16쪽)

예를 들면, 위의 문단에서...

그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명징(깨끗하고 맑다)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라는게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명료한 소리가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 말아야 한다'는 부분도 그랬다.

여기서 이렇게 얘기되어지는 곡은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C플랫 단조이고, 그 중 3악장은 우리에게 장송행진곡으로 알려져 있다.

 

암튼 번역이 이상한 건지 아님, 엘렌 그리모 - 그녀가 애시당초 이상하게 쓴건지 종잡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정말 멋진 직업이지요! 특히 평범한 교사에서 한 사람의 '스승'이 되는 마술 같은 순간엔 더욱 그렇지요. 청년기의 우울한 하늘에 담황색 번개 같은 빛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는 거죠."(42쪽)

 위의 문장도 도대체 뭐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낙원이 원래의 에덴동산 낫다는 데 내기합시다.(47쪽)

->그 낙원이 원래의 에덴동산보다 낫다는 걸 두고 내기합시다.

위 문장은 이 정도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50쪽의, '어떤 청년과 처녀가 있었답니다.' 란 문장에서도 청년이란 단어보다는 '총각'이란 단어가 적절할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면, '청년'의 뜻으로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나이가 20대 정도인 남자를 이르나 때로 그 시기에 있는 여자를 포함해서 이르기도 한다.'라고 되어있는 반면,

'처녀'는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여자'라고 되어 있고, 내가 제시한 '총각'은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남자'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제가 되찾고 싶었던 건 죽음이란 걸 모르는, 순간과 그 평화, 시간의 음악, 다시 말해서 침묵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의 무구함이었어요."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았었나 보죠?"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경솔함을 후회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은 죽음을 아는 상태이고, 죽음이란걸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 천진난만, 순진무구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동안 삶을 사랑하지 않아 딱 죽고 싶었다가 다시 살고 싶어진거냐?'고 묻고는 이내 후회하나 보다.

 

이런 부분은 트집을 잡자면 끝도 한도 없을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암튼 이 책의 내용 '특별 수업' 과 직접 연관이 있는 내용을 발췌 요약해 보면 이렇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공부하고 심화시키는 데 만족하지 말고, 적절한 때에 전인미답의 것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열의를 배움이라고 하는데, 배움의 과정엔 열의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거기엔 현재 있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겸손과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오만을 가져야 한다.

 

또 좋은 학생(=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학생)을 순간을 타는 곡예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도 재미있다.

 

이전의 지식을 답습하는데 만족하지 않는 학생,

그렇다고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학생,

현재 존재하는 걸 포착할 채비가 되어 있는 학생,

순간의 신비를 관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 등이 좋은 학생이란다.

"아! 교육!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답니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ㆍㆍㆍㆍㆍㆍ얼마나 큰 자기희생이, 상호적인 희생이 필요한지요. 교사는 자기 학생을 억누르지 말아야 하고, 학생은 교사를 배신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상호 교환, 신뢰, 타인에 대한 사랑 속에 헌신하는 걸 뜻합니다. 자기희생이란 상대에게 주는 것이지만 또한 상대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스승은 수련이 끝났다고 판단하면 제자를 떠나보냅니다. 이런 떠나보냄 속에는 자신을 넘어서 달라는 권유가 담겨 있지요.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는 이런 청출어람이 없다면 그 전수는 실패인 셈이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인류의 발전은 없는 셈이지요."(46쪽)

그녀가 교육을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서 좋았던 점 한가지는,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에 이르기까지...상호신뢰만이 아니라 상호희생도 필요하단

다.

난 한번도 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질 못했었다.

언젠가 한학기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엄청 스트레스였었다.

내가 아는게 열개라면 열개를 다 내어놓으면 안될 것 같아서 쭈삣거렸을 뿐더러,

그나마 개중 몇개라도 내놓으면 허전하고 헛헛해져서는 다시 책을 들입다팠었다.

그런데, 모두 나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자기가 가진 걸 하나라도 더 내어주고 싶어하고,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를 배출하는데서 보람을 찾는 그런 스승도 존재하기는 하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희생이란, 상대에게 주는 것이지만 또한 상대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도 그랬고...

청출어람 청어람 관련, 수련이 끝났으면 제자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부분도 내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새의 날개를 꺾어 곁에 두려 하기보다는 편히 쉬었다가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는 시의 한구절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스승에게서 특별한 그 무엇을 기대했나요?"

"오! 그럼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지만요. 저는 어떤 전수, 어떤 깨우침을 기대했어요. 제게는 깨우침이 필요했어요. 새로운 세계로 나와야 했던 만큼 스승이 저를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게 해주기를 기대했지요."(54~55쪽)

 

실은 윗 부분은 '스스로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이다.'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우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는 언제고, 스승에게 무언가를 기대고 의지하고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 저는 기다리고 있어요. 적어도 바라고 있지요. 솔직히 말해서 제 기다림은 줄곧 막막한 채로 남아 있지요. 하지만 막막한 기다림이야말로 인간존재의 특징 아닐까요?" 하고 말하며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다림 없이는 인내할 수 없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저는 언제나 조바심을 내는 편이랍니다."

"무엇을 기다리는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음악을 더 잘 해석하는 거죠. 작품의 열쇠를 찾는 것, 그럼으로써 사랑을 찾는 거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ㆍㆍㆍㆍㆍㆍ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드무아젤? 당신은 음악을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그걸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56~57쪽)

 

내가 아둔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걸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라는 문장에서 '그걸'이 가리키는 게 무엇일까 혼란스러웠다.

그게 '기다림'인지 '인내'나 '조바심'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그러다가 61쪽에 이르러 '음악을 경험해 보라는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그 곡을 연주하면서 나는 음악의 진실이란, 음악을 통한 실존의 진실이란 행복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행복의 비극성을 단숨에 간파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기쁨과 행복은 고통과 삶 사이의 화해, 죽음이 제기한 그 모순적인 일치에서 생겨난다는 것을.(68쪽)

설정 자체가 그런 것이겠지만, 그녀가 여행에서 이런저런 누군가를 만나다는 것도 그랬고,

그렇게 만난 누군가와 똑 참하게 적절하고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도 번역과 더불어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저는 릴케의 <어떤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막 읽은 참입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인 마그다 폰 하틴베르크는 시인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의 해나 꽃 핀 나무처럼 그저 존재하는 대신 뭔가를 요구하지요. 자연은 '그 대신 무엇을 줄 것인가?'를 묻지 않은채 인간을 키워주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그저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둘도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자각할 줄 아는 누군가를 아직 만나지 못하신 것 같아요. 스스로가 자기 실존의 성취이자 약속인 만큼 자신이 성취한 것 속에 결여된 것이 그저 존재하는 데 있다는 걸 깨닫고 있는 누군가를 말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왜 당신이, 당신과 나눈 행복한 대화가 떠올랐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지요. 음악, 그리고 그 음악이 창조해 낸 작품을 좀 더 잘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요.

 ㆍㆍㆍㆍㆍㆍ

 우리는 또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지요.경험에 의거해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니 당신의 기다림에 특별히 걸맞은 자유의 정의를 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유란 몸을 통해 그 몸에 국한되는 것 이상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 생각을 통해 그 의식에 국한되는 것 이상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을 다른 말로 정신이라고 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정신은 육체와 더불어 살고, 육체는 정신과 더불어 삽니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삶을, 자신의 삶을,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육체는 정신을, 자신의 정신을, 지금 여기의 정신을 살아야 하는 거죠.

ㆍㆍㆍㆍㆍㆍ음악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선 당신의 삶이 음악의 연장선상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드무아젤.(93~95쪽)

이 부분은 언뜻 보기에는 인간과 자연의 대비처럼 보였지만,

찬찬히 읽다보니 스승과 제자의 대비, 또는 좋은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대비로도 읽혔다.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들의 존재는 하나의 강을 이루는 많은 지류처럼 나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는 순간 일종의 공생 관계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내 존재가 사랑하는 이들의 생각과 심장과 음악과 풍경과 시선으로 화한 것 같은 영매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가 어떠하든 간에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고 당신이 결코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나의 영혼은 서로 닮아 있다. 자유로운 가운데 영원히 그러하리라.(105쪽)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워도 상관없지만, 자연과도 같이 아무 조건이나 요구사항없이 나를 키워주는 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런 이와 나의 영혼은 어쩜 서로 닮아 있을 지도 모르고,

그런 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만으로 엄청난 행운이자 행복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불현듯 내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실상과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든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든, 시작되었다고 해서 상호적인 강렬한 친밀감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 관계는 줄곧 가꾸어나가야 한다. 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내어줄 것도 없다. 귀한 관계일수록 - 늑대와의 관계는 얼마나 경이롭고 귀하며 특별한가 - 깨어지기 쉽고 통제하기 어려운 법이다.

 사고나 파경을 피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볼더의 그 사전을 통해 나는 특정한 행동 양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이후 우리에 들어갈 때면 나는 언제나 그 규칙을 되새긴다. 머릿속에 내가 아닌 늑대의 표현방식과 리듬과 관점을 주입시킨다. 늑대가 내게 보여주는 우정의 표시는 멋진 선물이다. 하지만 늑대가 아무리 너그럽다 해도, 심지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 해도 나로서는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어떤 순간 관계에 극도의 집중력을 기울이는 법, 온 신경과 근육을 강하게 긴장시키는 법을 배웠다. 늑대와의 관계에서 효과적이었던 이 방법은 음악과의 관계에서도 유효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언제든 무력감이 솟구칠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절망이 엄습할 수 있다. 그럴 때면 온 힘을 기울여 자신을 통합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환기시켜야 한다. 그런 빛살, 그런 열정, 그런 문장 없이는 자신 안에서 그 무엇도 완벽해질 수 없다. 내게는 그것이 음악과 늑대인 셈이다.

 어떤 행위 속에, 어떤 생각 속에 완벽하게 몰입하기 위해서는 강한 에너지와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 모든 상황, 무수한 상황들을 모두 통제한다는 것은 충족시키기 어려운 바람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 없이 기적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었고, 지금도 일어날 수 없을 터.(134~136쪽)

이건 언젠가 내가 고민했던 Let it be와 Let it grow의 관계랑도 닮았다.

대상이 사람이 됐든지 동물이 됐든지 간에 시작을 하기만 했다고 해서 상호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건 아니다.

시작을 했으면 줄곧 일정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거다.

적어도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건 긴장이라는 말로 대치되어도 좋을텐데...

끊어지기 일보직전까지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활시위가 아니라,

적당히 통통 튕겨지는 경쾌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잘 조율된 현의 그것이고...

그건 적당히 가슴 떨리는 설레임이고,

그런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만, 저는 감상적이지 않은 사랑을 본 적이 없답니다."

"정말 딱한 분이군요!" 하고 하마터면 나는 입 밖에 내어 말할 뻔했다.

 ㆍㆍㆍㆍㆍㆍ

"문학 속에서나  영화 속에서 감상이 아닌 사랑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현대 회화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욕망과 쾌락과 기쁨과 섹스, 나아가 자기애 뿐이죠. 자기 파멸에 정도의 자기 열중과 자아도취 말입니다. 또한 비명과 고뇌와 고독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뇨? 대문자로 시작되는 특별한 사랑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시대의 퇴물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죠. 우리 시대는 현대적 형태의 사랑에 대한 훌륭한 실전 매뉴얼을 만들어냈으니까요."

"무척 신랄한 말이군요."

"하지만 현실을 반영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그렇거든요."

 ㆍㆍㆍㆍㆍㆍ

"저는 삶이 제게 주는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당신 말에 따르면 사랑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무엇에 만족한단 말인가요?"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으니까요. 이도 아프지 않고 마음도 아프지 않다면 말이죠. 제겐 아스피린도 있고 향정신성 약도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골칫거리를 찾아나서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ㆍㆍㆍㆍㆍㆍ

 ㆍㆍㆍㆍㆍㆍ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세요. 누가 사랑 같은 걸 한답니가? 혹시 사랑을 하는 이가 있다 해도 사랑이 무슨 보상을 해준답니까? 실리와 선의 중에 무엇이 최고일까요? 나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선의 곧 사랑이 지성의 증거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지요? 반박하려 하시지 마세요.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 말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옳은 건 아니에요. 사랑이란 잘 모른다고 해서 과소평가할 게 아니거든요.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은신처, 자신의 거점을 갖고 있어요."

 ㆍㆍㆍㆍㆍㆍ우리는 이제 타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뿐입니다. 버스나 열차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셨습니까?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가방을 움켜쥐고 단추를 목까지 꼭꼭 채우고 있습니다. 타인이 공포의 대상인 겁니다. 이제 우리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겁냅니다. 더 이상 마음대로 말할 권리도 없는 겁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155~157쪽)

좀 길지만 이 부분을 옮겨 적은 이유는,이 책 처음에 나왔던 그녀의 가치관이 이랬었기 때문이다.

이랬던 그녀가 여행 길에서 만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가고, 그걸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한다는 설정이 작위적이지만 의미는 충분히 있다.

"ㆍㆍㆍㆍㆍㆍ그 이듬해 여름, 저는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었습니다. 천사의 날개가 갑자기 꺾이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재앙인 이 사건을 통해 저는 제가 어디 있는지, 제가 처분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음악도, 예술도 처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단숨에 깨달았습니다. 그것들은 처분 가능한 것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은 제게도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가장 깊숙한 우리 존재를 환기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저는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긴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위해 살지는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가장 기본적인 것만으로 만족하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파리를 떠나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기본적인 것은 정말이지 적더군요.그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저는 희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유 말입니다."

"자유라고요?"

"그렇습니다. 자유,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것을 사랑으로 거부하고, 원하는 것, 받아들일 만한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권 말입니다. 저는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빛에 도달했습니다. 사고가 있기 훨씬 전부터 제 눈은 이미 멀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악착같이 스스로를 채우려 들었고, 제 경력이나 찬사, 자아도취로 변한 그 절대적인 완벽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려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줄곧 가속기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그와 더불어 저 자신도 휩쓸려 가는 그런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단번에 음악이 제 몸을 통해, 제 마음을 통해 되돌아오더군요. 번개처럼 말입니다. 이제 저는 매일같이 연주를 합니다만, 오직 저만을 위해 연주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ㆍㆍㆍㆍㆍㆍ

"혹시 당신의 슬픔도 그 연원이 같지 않을까요?ㆍㆍㆍㆍㆍㆍ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제가 완벽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제가 완벽을 추구했던 건 음악을 구현해 내는 제 능력을 믿지 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은 사물을 뒤쫒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진실을 뒤쫒고, 음악을 뒤쫒고, 낙원을 뒤쫒는 데에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기 밖에서 찾습니다. 거기에는 그것들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들을 찾기 위해서는 영혼의 명징 속으로, 우리 존재의 내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야 합니다. 피상적이고 경박한 세상이 들어오도록 당신이 방치한 바로 그 균열을 틈타 슬픔이 찾아옵니다.ㆍㆍㆍㆍㆍㆍ"(235~237쪽)

이 얘기의 화자는 아까 바로 위와는 또 다른 사람이지만, 이것 또한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녀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에게서 이런 얘기들을 듣는 것도 그렇고,

그걸 흘려버리지 않고 자기 삶에 대입해 비교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전반이 의미가 있다.

 

그녀의 여행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구절들이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내 집에, 내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한 셈(241쪽)이었고,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닫아 건 코모의 그 청년과 다를 바 없었다(243쪽)는 걸 깨달았으니 그걸로 충분한 거다.

 

책의 끝부분에 가면, 그녀는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처음 그녀가 '스스로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어깃장을 놓은 것은 아래의 깨달음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나를 풍요롭게 해주고 각성시켰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웅장한 교향곡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면 그런 심오한 관점이, 청중이 없는 그런 연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서로 나누지 않는다면 사랑, 예술, 음악, 자연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인이 광야에 있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완벽한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44쪽)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청중은 아닐지라도,

내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나무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됐든, 예술이 됐든, 음악이 됐든, 자연이 됐든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오늘 한권의 책을 허름하게 읽을지라도,

같이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행운이고 행복이지 싶고,

그 누군가와 그런 관계를 시작하였다고 해서 상호적인 친밀감이 생기는 건 아닐진데,

그 관계를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한다는 사실이 더 행운이고 행복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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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7-03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읽어본 관계로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저는
그리모를는 철학자로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녀의 연주 역시 철학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제게 그리모는 건반위의 철학자이고
성스러움을 주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알브레이트 마이어는 베를린 필의 오보 수석이라고 그러더군요
그의 독집 앨범도 국내에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주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들...하데요^^
이 페이퍼에서 그리모와 마이어의 연주를 듣으니
참 좋습니다.. 양철나무꾼님..

글샘 2012-07-04 07:19   좋아요 0 | URL
무지 많은 생각들을 담고 있는 글이네요. ^^
엘렌 그리모의 여행이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현주 목사님의 '물과 나눈 이야기'처럼,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는 창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꼭 여행지에서 만난 그 사람들은 진짜 실존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자기 마음과의 대화일 수도 있잖을까요?
행복을 찾으러 꼭 어디로 가야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말이죠.

하늘바람 2012-07-04 09:56   좋아요 0 | URL
가지는 꽃도 보라색이군요
넘 곱네요 가지꽃은 첨 봐요

나는 불현듯 내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실상과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든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든, 시작되었다고 해서 상호적인 강렬한 친밀감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 관계는 줄곧 가꾸어나가야 한다. 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내어줄 것도 없다.


저 부분의 내용이
참으로 많은 밤을 속상하게 했던것같습니다

2012-07-06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7-06 06:29   좋아요 0 | URL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못 배우고 못 가르치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나한테' 가장 좋은 스승이자 제자가 돼요.
양철나무꾼이 둘레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양철나무꾼 스스로 '좋은' 마음과 생각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으로 바랄 때에 찾아오고,
생각으로 지을 때에 찾아나서요..

2012-07-06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