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산벚나무
- 송 찬 호 -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 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 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 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 지는 기라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 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 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 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툭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슬며시 내미는 기라
친구가 저 시를 보내줄 무렵의 난, 이러저러한 일들로 꿀꿀함의 연속이었다.
외부는 차치하고라도 알라딘 이 동네에서도 그러하였는데,
명쾌하게 금을 그을 수는 없지만,
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난 피해 의식과 가해 의식- 일종의 '양가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날 눈치챘는지, 고맙게도 친구가 재밌는 시라면서 저 시를 보내주었는데,
문제는 저 시가 좀 난해해서였는지, 내 마음이 폭폭해 시를 이해할 마음의 여력이 없었는지,
도무지 어느 대목에서 재밌어 해줘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난감했었다.
속깊은 친구는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저 시를 멋들어지게 해석해 줬는데...
화자가 산을 가는데 말이야.
틀어지고 휘어진 산벚나무 고목이 늘어져 있었겠지,
특이하게 산벚나무 둥치에서 툭 튀어나온 부분이 꼭 곰 발바닥처럼 뭉툭하게 생긴 거야.
그래서 그 고목의 둥치에서도 톡톡 피어나오는 산벚나무 꽃을 바라보면서,
눈부신 상상을 하는 거지.
살다 보면, 그런 일을 겪을 때가 있는 법인 모양이야.
이제 다시 사랑따윈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나이에도 말이지.
그게 늙은 산벚나무와 늙은 곰의 그것이지만, 얼마나 풋풋하게 꽃피우는 장면이 아름답냐구~ ㅋ
그들의 사랑은 우정이라고 말해도 좋고, 소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잖아.
이 시를 읽는데, 이런 생각이 났어.
벚나무는 가로로 숨구멍이 나 있어서
똑 살이 튼 것 같은 무늬가 있거든.
그리고 나무 껍질이 짙은 고동이어서 검정에 가깝잖아. ^^
그게 늙었으니 얼마나 굵고, 얼마나 숨구멍이 많이 터져 있겠냐구.
그 나무에 등허리를 문지르며 비비고 놀던 늙은 곰과 벚나무의 우정.
남들은 바라보지 못할 그 우정이 재미있더라고... ^^
그리하여 '송찬호'의 '늙은 산벚나무'는 내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한편의 시가 되었다.
북항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그런 심사였을때 또 다른 시집 '안도현'의 <북항>을 펼쳐 들었다.
그랬다.
안도현은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황현산'이 쓴 발문 격인 '해설'의 한 구절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겐 너무 평범하다 못해 밍밍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안도현은 문단 안팎으로 가장 잘 알려진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적잖은 성공을 거둬온 그의 시가 진지하고 적절한 비평의 대상이 된 적은 드물다. 시인의 명성이 평가를 대신하고 시의 호소력이 설명을 대신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스스로 자족하는 한 세계가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그 밑바닥을 뒤집어 제 말을 덧붙이려는 것처럼 보이는 비평의 인위적 체계를 암암리에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고, 비평이 먼저 거기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물러섰을 수도 있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것이 모범생의 그것을 보는 듯 했지만,
인생의 밑바닥을 쳐본 자만이 얘기할 수 있는 어떤 치열함, 삶의 호소력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말해, 그가 구사하는 '은유'라는 것이 내게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졌던 지라,
황현산이 쓴 시집의 발문 격인 '해설'을 읽다가...나도 모르게 '꺼이 꺼이~' 울고 말았었다.
어떻게보면 '안도현'에게 무서우리 만치 매정했지만, 진짜 매정한 사람은 무관심한 사람이 아닐까?
글의 마디 마디, 구비 구비 마다에서 숨은 애정이 느껴져 그게 내 일인듯 느껴져 고맙고 눈물 났다.
같은 의미로, 알라딘 이 동네에서 진짜 매정했던 사람은,
나처럼 입 다물고 함구했던, 함구했었어야만 했던 비겁한 사람인데...
그 비겁함이 때론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보이기도 했을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가 떠나갔거나 떠나갈' 누군가와 의견이 같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들의 알라딘 이 동네에 대한 애정이, 삶에 대한 정열이 눈물나게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 '황현산'이 발문을 쓴 '안도현'의 시집 '북항'은 당근 설렁설렁 넘길 수밖에 없는 기라.
설렁설렁 넘기는데, '송찬호 형네 풀밭에서'란 시가 딱, 걸렸는 기라.
설렁설렁 넘기던 걸 멈추고, 정색을 하고 앉아서 바라보았는 기라.
그러자 '송찬호'의 저 시 '늙은 산벚나무'가 생각나고,
'늙은 산벚나무'는 '늙은 산벚나무'의 해석을 불러오고,
그러자, '안도현'의 시집 '북항'도 다시 읽히는 기라.
결국 시는 거기 그렇게 그대로 있는데, 시를 읽는 나의 마음이 바뀐거다.
황현산이 발문 마지막에 쓴 한구절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시인이여, 늘 잘 쓰지 말라. 저 빛의 손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부분)
화자의 은유가 어떠했던지 간에,
독자가 감정이입을 하기 나름이라면, 이 시는 간절한 것이 내 마음 같다.
벌레 먹은 사과는 맛있다고 설레발이라도 칠 수 있지만,
멍들어 곪은 사과는 아파도 아프다 하지 못한다.
아프다고 하는 순간 제 살 무수히 잘리워 나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다시는 못 볼 이별일 수도 있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 소리가 서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놓을 것이오 그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직소폭포' 부분)
난 '직소'를 형상화 저 부분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생각났다.
'하늘의 하현달'을 내기에 건 배포를 부러워 하기엔,
직소폭포의 주름한점 없는 완전 무결은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린 때문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현달'을 내기에 건 배포로 봤을땐,달도 차면기울고...같은 의미에서 삶은 영원한 도돌이표다.
폭
바다의 폭이 얼마나 되나 재보려고 수평선은 귀등에 등대 같은 연필을 꽂고 수십억 년 전부터 팽팽하다
사랑이여
나하고 너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직소폭포'도 그렇지만, '폭'도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한 시 같다.
내가 보기엔,
자로 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잔잔할 때의 바다는 잔잔한 채로,
격정적일 때는 격정적인 입맞춤이 가능한 것이 바다의 폭, 다른 말로 수평선이 아닌가 싶다.
노숙(露宿)
양말 한 켤레를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양명한 날이다
발랫줄은 두말없이 양말을 반으로 접었다
쪽쪽 빨아 먹어도 좋을 것을
허기진 바람이 아, 하고 입을 벌려
양말 끝으로 똑똑 듣는 젖을 받아먹었다
양말 속 젖은 허공 한 켤레가
발름발름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바지랑대 끝에 앉아 있던 구름이
양말 속에 발목을 집어넣어보겠다고 했다
구름이 무슨 발목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원래 양말은 구름이 신던 것이라 했다
아아, 그동안 구름의 양말이나 빌려 신고 다니던 나는
차마 허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를 읽는데, 왜 차마고도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차마고도'가 '차와 말의 길'이라면,
'허공'은 '허기지 바람의 길' 또는 '허기진 영혼의 길'이라고 하면 되겠다.
쪽쪽 빨아 먹어도 좋은 날이거나,
발름거리며 호흡을 하고 싶은 날에는,
구름을 신고 허공으로 마중을 나가봐야 겠다.
누구를?
그 누군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