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영랑의 '오메 단풍들것네'를 읊조리고 앉았다가,
박재삼을 좋아하는 스승님이 떠올라 안부 전화를 드렸다.
"스승님,올해는 가을 안 타세요?"
"이 나이가 되면 무덤덤해.그냥 더디 갔으면 좋겠어."
괜히 울컥하여 대충 수습하여 전화를 끊고 보니,
나의 스승님은 가을을 진짜 잘 건너가고 계신건데,내가 이해를 못하고 수선을 떨었었다.
<동의보감>에 ‘가을 석 달은 용평(容平)’이라는 말이 나온다.
용평이란 ‘만물을 안으로 거둬들이고 더 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봄과 여름에 밖으로 발산했던 기운을 가을이 되면 마음을 가다듬고 안으로 모아 기를 보충해 주고 마음속의 잡념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스승님은 가을을 잘 타 넘어가고 계신거다.
나의 가을도 그러해야 겠다.
2.
점심시간에 먹는 걸 마다하고 쪽잠을 잤다.
난 먹는 것 만큼이나 잠에도 일가견이 있어 머리만 붙이면 잠을 잘 수 있다.
아니,머리를 붙이지 않아도 나무처럼 서서도 잘 수 있지 않을까?
암튼,잠깐 낮잠을 자다가 꿈을 꿨다.
꿈 속에서 할머니 한 분이 우리집으로 들어오셨다.
이 할머니가 누구냐 하면,우리 아들 일곱살 때 가출을 시도케 했던 그 할머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형마트보다는 길거리 좌판을 이용하는 난,
그 날도 지하철 역 앞 좌판에서 몇가지를 놓고 앉아 계시는 할머니에게 무엇을 샀나 보다.
그때 내 손을 잡고 있는 아들을 향하여 그 할머니는,
"허~고놈 참 귀엽게 생겼네,너 나랑 가서 살자."
라고 한마디 하셨을 뿐인데,
집에 돌아온 아들은 유치원 가방에다 돼지저금통이랑 자기 이름의 통장을 챙겨넣고 가출을 시도하였다.
"엄마 아빠는 나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그 할머니는 내가 이 돈을 가지고 가야 좀 사실 수 있을 것 같애."
한번도 매를 들어본 적이 없는 남편은 그때 처음 덩치로 놓여있는 골프채를 꺼냈었고,
그걸 보던 우리 아들은,'아빠,잠깐만~'을 외치며 침통을 들고왔다.
(그때 키스 오브 드레곤이라는 영화를 본 직후였고,거기서 이연걸이 침 한방으로 해결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힘들게 골프채 휘두르지 말고 침으로 한방에 끝내달라는 그런 의도였다.
암튼 그 때 몇번 봤던 그 할머니가 우리집에서 살겠다는 말씀은 없으셨지만,그런 뉘앙스로 들어오셨다.
실내에 잠시 누웠었는데 오한이 난다.
내일도 길거리 좌판을 벌이고 앉으실 많은 할머니들이 생각나고,
신념을 위하여 한데에서 농성을 펼치실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다른때 같았으면 궁상 떨지 말자며,보일러를 풀 가동 집안을 뜨뜻하게 만들어 놨을텐데...
오늘은 양말에 덧신을 찾아 신고,인터넷으로 망토를 알아본다.
이 가을을 견뎌 내기 힘들지만,아직 겨울이 오면 안된다.
아직은 추워
지면 안된다.


3.
알라딘 메인으로 가서 <대지의 기둥> 후속으로 읽을 책을 고르다가 이런 광고를 봤다.
아흑,장바구니에 넣었던 담요를 빼고 책을 한권 더 넣었다.


한(恨)/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뻗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뻗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냈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시어를 어떻게 이렇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인지,원~
나는 생각하던 사람 따위는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이지만,
나도,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뻗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로 휘드려질 수 있었으면 좋겠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