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대숲의 주인이 되다
일금 7천원에 산 대나무 한 그루가 3.5년 만에 숲으로 자란 세월의 기적
35년 전 이를 알았더라면 내 인생의 ‘2부 순서’는 얼마나 황홀했을 것인가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20대, 30대, 40대, 50대를 살고 있는 연하의 친구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쓴다. 사무치는 바가 있다면 내 연하의 친구들이 맞을 40년, 30년, 20년, 10년 뒤의 겨울은 덜 추울 것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대숲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있기를
나의 공부방 앞에는 다섯 평 정도의 길쭉한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서는 잣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3년 반 전 나는 그 공간을 대숲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잣나무 정리하고 대나무를 심자면 아무래도 큰돈이 들 것 같아서 대숲 조성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아주 깨끗이 포기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2002년 여름, 나무 시장을 기웃거리던 내 눈에 화분 하나가 걸려들었다. 대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화분이었다. 대나무의 키는 70cm를 넘지 않았다. 관리하고 운반하기 좋도록 윗부분을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중동을 잘린 대나무는 건강한 것 같지 않았다. 얼마냐고 물었다. 1만원은 받아야 하지만 마지막 하나 남은 화분이니까 7천원에 주겠다고 했다. 그 화분을 사서 들고 나왔다. 화분에서 대나무를 뽑아 그 길쭉한 공간의 잣나무 밑에다 묻었다. 그러고는 거의 잊었다.
다음해인 2003년 기적이 일어났다. 시들시들하던 대나무 주위에서 네 개의 죽순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해 네 개의 죽순 중 세 개는 7, 8m 높이로 솟아올랐다. 그 다음해인 2004년에는 무려 여덟 개의 죽순이 솟아올랐다. 그중 여섯 개가 대나무로 자라났다. 솟아오른다고 해서 죽순이 모두 대나무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약 3분의 2만 대나무로 자란다는 것을 나는 그해에 알았다. 2005년에도 여러 개의 죽순이 솟아올랐지만 수를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지금 나의 공부방 앞에는 20여 그루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꽤 볼 만하다. 그중의 몇 그루는 공부방의 판유리 창을 엇비슥하게 가리고 있다가 달 밝은 밤에는 바람에 일렁거리며 그림자로써 창에다 볼 만한 그림을 그려내기도 한다. 나는 대숲의 주인이 된 것이다. 20여 그루밖에 되지 않지만 대나무는 비좁은 땅에 모여 있으면 꽤 숲 같다.
대숲의 주인이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대숲을 원했다. 그런데 큰돈이 들 것 같아서 포기했다가 겨우 일금 7천원만 대나무에 투자할 수 있었다. 그런데 3.5년이라는 세월이 기적을 일으켜 공부방 앞을 대숲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세월이 일으킨 기적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기적 앞에 설 때마다 내가 그냥 흘려보낸 세월을 아주 많이 가슴 아파한다. 내가 만일에 35년 전에 대나무 한 그루를 빈 터에다 꽂았다면 지금 몇 그루로 늘어 도대체 어떤 대숲을 이루고 있을 것인가, 싶어서다. 평생을 복무하던 직업에서 놓여나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삶을 나는 ‘2부 순서’라고 부르는데, 만일 35년 전에 이 기적의 비밀을 알았더라면 나의 인생 ‘2부 순서’는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싶어서다.
월급으로 살아가는 내 또래 친구들은 걱정이 태산 같다. 회사에서 등 떠밀리는 순간에 펼쳐질 자기 삶의 ‘2부 순서’에 대해 조금도 자신이 없단다. 나는 내 또래 친구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낭비한 세월이 벌써 너무 길기 때문이다. 대신,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내 연하의 친구들 몇을 소개한다.
치과의사인 내 친구는 오래전부터 사진을 찍었다. 전국 방방곡곡,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라는 이름의 대숲을 그는 일찌감치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50대 중반에 이미 치과의사 노릇이 지겨워졌다는 그는 지금 탁월한 사진가가 되어 있다. 그가 언제까지, 몇 살이 될 때까지 치과병원을 운영할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친구는 사진 찍는 일만으로도 아주 괜찮은 삶의 ‘2부 순서’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자신의 집념과 흘러가는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그는 사진가로 진화시킨 것이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내 연하의 친구들
신문사의 편집기자인 내 연하의 또 한 친구는 2년 전 자신의 홈페이지를 만들고는 거기에다 부지런히 글을 썼다. 편집기자는 원래 지면에다 글을 쓰지 않는다. 지면(紙面)을 구성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신문의 지면이 아닌, 자신의 사이버 공간에다 삶과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펼쳐왔다. 지금까지 사이버 공간에서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130만에 가깝다. 그는 그 글을 묶어 올해에만 두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호평 속에 승승장구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나는 그의 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수요가 그를 편집기자 자리에 앉혀놓지 않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을 한다. 회사가 그를 해고하기 전에 그 자신이 회사를 해고할 것 같다는 통쾌한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내공을 쌓음으로써 편집기자인 자신을 탁월한 산문가로 진화시킨 것이다. 자신의 대숲을 진작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만화가로 한동안 활동하던 내 연하의 또 한 친구는 원래 미술대학을 나온 화가였다. 화가에서 자기의 적성이 더 맞아 보이는 만화가로의 창조적 변신을 성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만화도 거의 그리지 않는다. 만화 그리던 손으로 한동안 목공 작업을 하던 그가 지금은 철공 작업에 빠져 있다. 고물상을 뒤져, 폐기된 철물을 실어다 떼어내기도 하고 이어붙이기도 하면서 자기 나름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폐기된 철물 앞에서, 이것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그는 또 하나의 철물과 다른 하나의 철물들 앞에서, 이 둘을 조합하면 무엇이 연상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그는 금년에만 수백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나는 ‘방과(放課) 후에 호명(呼名)당한 아이들’을 연상한다. 금생(今生)에 효용을 끝낸 고철을 그는 작품으로 환생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작품을, 어린이의 마음을 지닌 어른들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그는 이렇게 조성한 자기만의 대숲을 심성이 맑은 어린아이들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그는 자기만의 작은 미술관을 꿈꾸는 것 같다. 이렇게 창조적으로 진화하는데 그의 삶 ‘2부 순서’가 어찌 황홀하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