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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맛
전순예 지음 / 송송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내내 언젠가 읽었던 '충청도의 힘'이란 책이 떠올랐다.
'충청도의 힘'이 사투리를 섞어서 충청도 사람들의 삶을 표현해내려했었다면,
이 책도 강원도 사투리와 맛을 빌려 강원도 사람들의 삶을 표현해 내려는건 똑같은데,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 삶이 아니라,
1945년생인 전순예 님의 추억 속의 음식과 삶이다.
추억 속의 그들은 정겹고 사투리는 찰지고 음식묘사는 맛깔난다.
솔직히 글이 빼어나게 잘 썼다던가,
아님 여러가지 기교와 표현 기법을 살려 현실감이 느껴진다던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책은 참 좋다.
읽고 있으면 가슴에 맺혀있던게 '툭~!'하고 풀어지고 그리하여 어느새 순한 마음이 된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님이 사셨을 삶을 책을 통하여 간접 체험하는 맛이 쏠쏠하다.
어쩜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감동하긴 힘들 수도 있고,
'응답하라 1988'을 재밌게 봤던 그 세대라면 흥미로울 수 있겠다.
이 책에 나오는 음식들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요리법은 낯설었다.
요리법이 낯선게 아니라,
그렇게 대가족들, 동네 사람들까지 함께 먹을 요량으로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그 품이 낯설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네 살다가 서울로 올라간 할머니도 한번씩 다녀가실때마다 챙기고,
입덧하는 새댁도 챙기고,
남동생 친구들도 챙기고, 하는 품이 넉넉하다.
이건 양반이나 만석꾼 집안에서 챙기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는데,
산촌이고 계곡도 깊어서 사는게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한개도 공감할수는 없지만.
울 아빠 또래의 연세인걸로 미루어 아주 오래전의 얘긴 아니고,
이 글을 쓰신 전순예 님의 기억을 되살려 쓰신 것이니
'나는 자연인이다'에 등장하는 삶을 읽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수미네 반찬'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생각났는데,
그 예능 프로그램은 어머니의 손맛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것이고,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올드하게, 그때의 그 방식대로 재현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읽으면서 느낀건데,
손맛이랑 살림을 야무지게 하는 것은 대물림인가 보다.
글을 통해서도 야무진 손맛과 살림솜씨가 느껴진다.
또 한가지 삶을 오래 산 사람의 지혜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후가 되니 몸이 뒤틀리고 지루합니다. 할머니는 말없이 꾸준히 뜯습니다. 할머니보고 그만 뜯자고 하니 "세상에 무슨 일을 하든 고비를 잘 넘겨야 된다"고 하십니다. 해가 질 때까지 뜯었더니 어제보다 훨씬 많이 뜯었습니다.(171쪽)
이런 문장은 너무 아름다웠다.
서리가 내려 을씨년스런 아침에 나는 무를 뽑아오는 당번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무밭에 가면 머리 부분이 파랗고 둥글둥글하니 통통하게 아주 잘생긴 무들이 팔을 있는 대로 벌리고 반겨줍니다. 어머니는 무를 마구 뽑지 말고 잘 살펴보아서 세번째쯤 큰 것으로 골라 뽑아오라고 하십니다. 크고 좋은 것은 김장할 때 먹어야 하고, 또 좋은 것부터 먹어 치우면 못 산다고 하셔서 무밭을 잘 살펴봅니다. 세 번째 큰 것을 고르는 것도 힘들지만 무를 뽑는 것이 무한테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싱싱한 무는 뽑으려 하면 움칠 놀라며 움츠러드는 것 같아서 용기를 내여 뽑습니다. (199쪽)
너무 좋아서 한참을 되새기고 곱씹었다.
나는 농사를 잘 모르지만,
만약에 나였다면 세번째 큰 무가 아니라 제일 큰 무를 뽑을 것 같다.
왜냐하면 큰무를 뽑아 먹으면 김장철까지 나머지 것들이 자란다고 생각할 것 같다.
햅쌀 밤밥이 끓으면 벼꽃 향이 납니다. 향긋하고 구수한 밥 냄새는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처럼 마음도 아주 고와지는 것 같습니다.(228쪽)
향긋하고 구수한 밤냄새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장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읽는 내내 한량처럼 밖으로 떠도는 이땅의 아버지들과,
고생하셨던 어머니, 할머니, 딸 들의 삶이 그려져서 눈물을 찔끔거렸지만,
이 문장을 읽으면서 눈물을 눌러삼켰다.
영감님은 겁이 났습니다. "이놈의 할마시야. 내가 평생 믿고 살았는데 공기나 물보고 고맙다 하는 사람 보았나. 빨리 일어나라. 자식들을 불러 보는 앞에서 연금 통장도 당신에게 줄 테니, 마음대로 아들딸 사주고 싶은 거 다 사주고 가고 싶은데 가고 마음대로 살게 한다"고 약속합니다.(345쪽)
며칠전 조카가 베란다에서 키운 수박 사진을 보내줬다.
안에서 키워 그런지 수박은 작고 볼품없어 보였지만,
조카는 직접 키워서인지 행복한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919/pimg_7451441772010073.png)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이었다.
힘들고 지난한 삶이었을테지만,
그것을 견디고 살았으며,
그리하여 당신의 꿈인 글쓰기를 나이 60이 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셨단다.
이렇게 삶이 묻어나는 글들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