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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소설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정유정.지승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6월
평점 :
개인적인 궁금증 하나,
나는 이 책이 인터뷰 집인지 궁금하다.
책의 구성방식이야 묻고 대답하는 형태를 취하니 '인터뷰 집'이 맞겠지만,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를 구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발생할 수 있는 존칭이나 물음표, 느낌표 따위가 다 생략되고 팩트만 전달된다.
지승호 님의 물음에 대한 정유정 님의 답은 대화라기 보다 한편의 짧은 이야기나 소설 등을 연상시킨다.
일상적인 대화라고 하기엔 형태가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다.
예도 상세하게 들고 자료도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입말이 아니라 문어체라고 해도, 몰입하는 힘이 있다.
앞으로 쭈욱 빼서 내처 읽게 만든다.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속도감이라 해야 할까.
고백할게 있는데 난 정유정 님의 작품을 하나도 읽은게 없다.
그런 내가 '소설은 어떻게 쓰여지는가'하는 작법서를 읽고 있으려니까 아이러니컬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앞으로 소설을 쓰고 살아갈 일은 없어도,
정유정 님의 소설 발자취를 궁금해 할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동안 정유정 님의 소설을 안 읽은 이유를 변명해 보자면,
무서운 이야기들을 안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난 귀신이 등장하는 그런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에 있을 법한 일을 다룬 무서운 이야기에 약하다.
굳이 읽고 기나긴 여름밤을 공포로 지새울 까닭은 없지 싶었다.
이 책은 지승호 님의 인터뷰 집이라는 형식이어서 구입했고,
인터뷰 집이 소설의 내용을 담고 있으면 얼마나 담고 있겠으며, 무서우면 또 얼마나 무섭겠나 싶기도 했다.
공모전에 여러번 떨어졌다는 얘기도, 스티븐 킹을 필사했다는 얘기도 흥미로웠다.
만약 이게 서면 인터뷰가 아니라,
대면 인터뷰였다면,
어떤 식으로 인터뷰를 했는지,
인터뷰의 주도권은 누가 이끌어갔는지 궁금하다.
정유정 님이 삶을 엿볼 수 있고,
그간 어떻게 소설을 써왔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작법서에 가깝다.
그런데 또 책을 진행해 나가는 방식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재미있는 소설집을 엿보는 것 같은 것이 흥미롭다.
소설은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을 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정유정 님이 소설을 어떤 식으로 쓰는지 엿볼 수 있었고,
모든 사물이 그렇듯, 책도 한 가지 목적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마음의 양식도 되고, 때론 수면제도 된다. 내가 원한 건 수면제였다.(65쪽)
이런 구절도 좋았다.
소설을 쓰기 전에 던져봐야 할 말이 있다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라는 것이고,
작가의 의무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 하나를 꼽았다.
정유정 님의 글쓰기 비법 같은 것이 그후로도 쭉 등장하지만,
안 읽어본 소설들을 나중에라도 읽어보고 싶은 욕심에 때로는 스킵했었고,
이 구절이 좋았어서 옮겨본다.
부사는 항생제 같은 거다. 한두 번은 확실한 효과가 있지만 자주 쓰면 내성이 생긴다. 가령, '너무'라는 부사를 습관처럼 쓰면 정말로 '너무'한 일에 썼음에도 전혀 안 '너무'한 일처럼 느껴진다. 문장이 야단스러워지는 면도 있고.
나는 단문을 좋아한다. 속도감 있게 읽히고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니까. 문제가 있다면, 단문만으로는 긴 문단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장들이 따로 놀거나 모래알처럼 서걱거리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려고 접속사를 쓰다 보면 단문의 장점인 속도감이 사라진다. 단타 늑유의 힘도 줄어들고. 그렇다고 문단을 짧게 자르거나 행갈이를 해대면 서술 흐름이 거칠어진다. 한 호흡으로 달려야 하는 긴 묘사는 꿈도 꿀 수 없다. 내 해결법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리듬을 넣는 것이다. 도치법, 주어나 동사 생략, 단독으로 부사 사용하기, '은, 는, 이, 가'의 활용, 장문과 단문 섞어 쓰기 등등을 총동원한다. 랩을 하듯, 한 문단이 쑥 읽히도록.
종결어미는 과거형을 기본으로 쓴다. 현재시제는 꿈이나 편지, 일기 등, 구별이 필요한 부분에만 쓴다. 소설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서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불과 1초 전이라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 취향인데, 감탄사는 웨난하면 쓰지 않는다. 대사에 쓰면 인물이 가벼워지는 느낌이고, 문장에다 쓰면 다음과 같은 느낌이 든다. 어때, 이 문장 죽이지!(233~234쪽)
이 책 말고도 어디선가 형용사와 부사 사용을 자제하라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그게 어디인지 기억은 안난다.
헤밍웨이 였는지, 강원국이었는지 헷갈린다.
최고의 인터뷰어인 지승호 님답게 이런 질문들이장 좋았다.
지_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정_ 하고싶은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최고로 좋을 것이다. 그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의지와 능력이 대립하는 경우다. 내 경우 전자를 포기한다. 프로라면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는 걸 인정하면, 포기 못할 것도 없다. 나는 SF를 좋아하지만 이야기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이 장르는 독자로만 만족한다. 물론 처음부터 포기한 건 아니었다. 무엇이든 일단 덤벼보기는 한다.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일단 해 보는 것 말고는 길이 없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 대신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로 인해 듣게 될 비난이나 비판도 당연히 작가의 몫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으니 그게 어딘가. 세상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251쪽)
책의 곳곳에서 스티븐 킹을 인용하는 걸 보면 스티븐 킹의 영향을 어지간히 많이 받았나 보다.
이런 부분은 책은 소설가가 자신이 쓰는 소설을 이야기 하는 책이지만,
누구든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때로는 프로패셔널이란 이유로 막무가내로 주장하고 고집할 때도 하는 구나 싶어서 좋았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파리리뷰'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데,
그렇게 놓고 보니,
이 책의 인터뷰 방식이 파리 리뷰를 닮은 것도 같다.
이렇게 정유정 님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작가들을 대상으로 '파리 리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을 듯 하다.
뭐, 글을 쓸 것도 아니고,
소설을 쓸 것은 더 더욱 아닌 나로서는,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책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미뤄왔던 정유정 님의 소설들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 의미있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