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하지 않은 하루는 없어

네가 소중하니까

널 둘러싼 것들 모두 소중한거야

오늘부터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

"요요. 그럴 때는 케찹찹!이라고 외쳐.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주문이야!"

마음이 불안할 때는 내가 들을 수 있도록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안정을 주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의 위로도 좋지만

내가 나에게 해주는 따뜻한 말이

진짜 용기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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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외교력도 꽝이었고, 정보력도 꽝이었으며, 보고 듣고 배울 마음 조차 없었다. 오죽 답답하면 일본 외무공사가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라는 이야기 까지 할까 싶었다. 일본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수신사 일행은 때 되면, 조선에 있는 왕을 향하여 망궐례, 진하례를 챙겼다는게 함정이다.



만약 근대일본을 보고 온 이들이, 근대일본을 보고 온 이들의 보고서를 본 조선의 위정자들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난 이 책을 읽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수신사를 보냄으로써 근대 일본을 본 조선이, 우물 안에서 벗어나 우리 식으로 근대화를 수용하는 등 개혁을 하여 그들과 동등하게 혹은 그들보다 더 우위로 갔다면. 적어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이 책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일제강점기라는 역사가 어떻게 해도 변경되지 않을 고정적인 시점이라면, 적어도 조선이 당시 세계 각국에 대한 정세를 알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자기들 안위 때문이 아닌, 어떻게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조선이라는 땅에서 살고 있는 수 많은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하려고 했다면 역시나 나는 이 책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었을 거고, 당시 우리 조상들을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눈으로 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수록 씁쓸한 책이다.

김기수는 "수신이란 옜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옛 우호는 개항 이전의 전통적인 교린 체제를 의미한다. 조선은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전통적인 교린 체제의 회복 또는 연장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 조일 관계가 교린 체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 대신 수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따. 수신사행에 대한 조선의 인식은 혼합적이고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새로운 외교 체제의 성립을 강조하면서 숫니사행의 절차나 구성을 통신사행과는 다르게 요구했다.

-요시카와: 병사의 기숙사와 기국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

-김홍집: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과 기계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우에노: 신문을 보니 귀국 신사가 글씨를 잘 쓴다는 데 본 받을 글씨를 주시기 바란다.

-김홍집: 본 신사는 글씨 쓸 줄 몰라 귀국에 들어왔을 때도 붓을 잡은 적이 없다. 혹 사행원 중에 글씨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게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우에노: 아니다. 신문에서 전한 것은 부산에서 온 사람이다. 들으니 귀국신사는 문망이 있다고 했다.

-김홍집: 이것은 혹 잘못 전해진 것이다. 대단히 부끄럽다.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으로 군무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김홍집: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조정과 민간)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이노우에: 이 자리의 대서기는 어제 독일에서 돌아왔는데 이탈리아 지방에서 러시아 해군경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중국 상해 땅에 와서 길이 갈렸는데 앞으로 연료를 싣고 다시 나가사키 섬으로 온다고 한다. 배 안에서 그의 동정을 살피니 걱정이 되어 대단히 조급했는데 중국 일이 다행이 잘 끝나 빨리 떠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중략) 이 때 귀국 병력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러시아 사람이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걱정이 다시 절박해질 터이니 이를 어쩌겠는가?

-김홍집: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은 상접해 있을지라도 서로 통상하지 않고 오직 귀국에게만 친목하므로 유사시에는 서로 보호해주기 바란다.

-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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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우리나라 산사에 대한 관심이 새삼 일깨워진 것을 보면서 산사를 찾아가는 분들의 길라잡이가 되기를 희망하며, 기왕에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소개한 산사 20여 곳을 한 권으로 엮었다. 여기에는 세계유산에 등재된 대흥사, 부석사, 선암사, 봉정사 답사기가 들어있도 등재되지 않았지만 ‘산사의 미학’을 보여주는 명찰들로 가득하다. 어느 지역을 가든 그곳에 산사가 있으면 내 발길이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어쩌면 산사가 있기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부디 이 책이 산사를 순례하는 답사객의 좋은 안내서가 되기를 희망한다.

"샌님여, 운문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비로자나불 맞지예?"

"그렇지. 지권인을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지."

"그란데 와 대웅보전이라 캅니까? 대웅보전에는 석가모지 모셔진다고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우습지. 조선 후기 들어서면 스님들이 계율보다 참선을 중시한다고 불가의 율법을 등한시 했어요. 그 바람에 저렇게 잘못된 것이 많아요. 굳이 해석하자면 본래는 석가모지 집인데 비로자나불이 전세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될까 보다." - P269

부석사에는 나로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둘 있다. 하나는 석룡이다. 절 스님들이 대대로 전하기로 무량수전 아미타여래상 대좌 아래는 용의 머리가 받치고 그 몸체는 ‘ㄹ’자로 꿈틀거리며 법당 앞 석등까지 뻗친 석룡이 있따는 것이다. 이것은 사찰 자산대장에도 나와 있고 일제시대에 보수할 때 법당 앞 마당을 파면서 용의 비늘 같은 조각까지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때 용의 허리 부분이 절단된 것을 확인하여 일본인 기술자에게 보수를 요구했으나 그는 완강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는다. 다만 그것이 선묘화룡의 전설과 연결되는 것인지 지맥에 의한 건물배치의 뜻이 과장된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다. - P46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늘상 시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대상이기에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 학생처럼 ‘나무 하나는 괜찮다’라고 실수 없이 간취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미라는 인공적 아름다움과 문화미라는 정신적 가치는 그 나름의 훈련과 지식 없이 쉽게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아는 만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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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아스카, 가시하라, 야마노헨노미치, 이카루카 등 지역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수 많은 유물, 유적과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곳으로 사시사철 고대 역사를 느끼려는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의 이름에 신(神)가 들어가 있는 천황이 3명있다. 초대 진무(神武) 천황, 10대 스진(崇神) 천황, 15대 오진(應神) 천황이다. 진무 천황과 스진 천황의 역사는 나라 지역에 남아 있고 오진 천황의 역사는 오사카 지역에 남아있다. 신(神)자가 붙은 이들은 일본 이외의 땅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명의 천황과 관련된 기록에서 한반도 관련된 일본 역사를 더 많이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1979년 차 밭을 개간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묘실 안의 유골 및 진주와 함께 동판으로 만든 묘지가 발견되었다. 그 묘지에 오오노 야스마로(고사기 편찬자)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데 그가 지금의 JR나라역의 서쪽에 살았다는 것과 723년에 사망하였음이 기록돼 있어서 실재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일본 내에서 큰 충격을 준 발견이었다. - P22

아스카 지역은 소가 씨의 본거지와도 가깝고 일찍부터 이 세력권하에 있었다. 588년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데라가 소가씨의 씨사로서 조영되고 592년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인 스이코 천황이 도유라노미야에서 즉위한 후 아스카와 그 인접 지역에는 천황의 궁전이 위차하게 되는 등 소가씨의 영향이 크게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간고지 가람 연기』에 의하면 588년 아스카데라의 조영에 있어서는 백제로부터 불사리를 가져온 승려와 함께 사원 건축의 공인, 와박사, 화공 등의 기술자가 백제로부터 왔다고 한다. - P76

덴무 천황 사우 그의 황후인 우노노사라라가 지토 천황이 된다. 그 이후 그녀의 아들인 쿠사카베 황자가 천황을 승계하지 못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손자로 알려진 가루 황자가 성장한 후에 지토 천황의 뒤를 이어 몬무(文武)천황이 된다. 몬무천황도 지토천황의 손자로 알려지고 있으나 출자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는 인물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으나 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태종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는 같은 이름의 몬무 천황이 즉위하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인물의 연관성을 추적하는 연구도 많이 있으므로 그의 출자에 대한 사실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 P113

쇼소인의 헤이라덴하이노하쯔가쿠교와 삼성리움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는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 국보 140호인 나전단화금수문경이 같은 문양으로 남아 있어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쇼소인의 헤이라덴하이노하쯔가쿠교는 야광 조개를 잘라 만든 하얀 나전과 동남아시아산의 붉은 호박 등으로 꽃이랑 새의 문양을 만들고 그 주변을 흰색과 파란새그이 작은 터키석으로 메웠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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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네가 나한테 다가왔어.

말 없이 무심한 듯 건네준 작은 선물,

단 3초 만에 내 마음 속 밑바닥까지 따뜻해졌지.

오늘 하루는 어땠어?

별일 없었다고?

나름 괜찮았다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내가 옆에서 들어줄게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바로

들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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