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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들어서 사무치게 후회하는 것이 있다. 황금 같았던 나의 어린 시절, 그저 하라는 대로 공부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나의 꿈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나의 삶은 1%라도 조금 더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혹은 늦게나마 알게 된 나의 꿈,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삶이 아닌 그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시간만 축내는 것이니, 후회할 시간에 나의 꿈을 위해 조금이나마 공부를 하는 쪽이 더 낫다.




오늘 거울 속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1%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본다.

내가 생각해도 난 그냥 적당히 잘 자랐다.

엄마는 "작은 딸은 거저 키웠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자랐다는 뜻이다.

어른들 말에 무조건 순종했던 건 아니었지만, 나쁜 아이 경계선을 밟아본 적은 없다.

나에겐 착한 아이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P. 102

어릴 때 좀 더 다양한 어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한다.

자라면서 봤던 어른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을 주축으로 친척 어른들과 부모님의 지인 정도가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나를 비슷한 인생으로 안내했다.

P. 112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존과는 다른 어른으로 나이 먹는 거다.

P. 115

사회생활 슬럼프는 3, 6, 9년 차에 온다던 선배들의 말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오늘 하는 일과 내일 해야 할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걸 계속 반복한다고 더 나은 사람 또는 더 잘하는 마케터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P. 137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요?‘라고 소리 없이 외쳤던 것들이

모두들 한 번씩 겪는 일이었다는 게,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이런 게 그냥 삶이구나, 삶은 이런 거구나,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여졌다.

P. 237

다들 그 정도는 아프면서, 견디면서 살아가

P.237

나만의 동굴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 안에 들어가 숨습니다.

그곳에서 머리를 비우고, 생각이 가득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P. 97 (유병욱 ‘생각의 기쁨‘ 中 )

평범하고 단조로운 인생에서 하나둘씩 변화가 시작된 건 28살이 되고부터다. 지옥철을 견디기 힘들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기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소울메이트와도 이별하게 되었다.

의지하고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을 하게 되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기댈 곳이 없던 힘든 하루 끝엔 우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이건 나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은 사건 앞에선 자주 나의 나이를 읊조렸다. 이십…팔…세…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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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저 밑바닥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던 그런 책들이 있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이 그랬고, 박상식의 『동도일사』가 그랬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전후나, 조선 말기 때 집필된 책이나,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책을 읽으면 그랬다. 그 책들의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본인들이 보고 겪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 뿐인데, 그 내용을 읽고 있는 나는 계속 분노했다.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간 당시 사회에 분노했고, 그런 사회를 만든 위정자들에게 분노했으며, 큰 일을 겪은 뒤에도 변함없는 사회에 분노했었다. 이 분노의 주체는 과거였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이국종 교수님이 집필하신 이 책, 『골든아워 1』를 읽고, 앞선 책들을 읽으며 느꼈던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분노와 답답함은 앞선 책들에서 느꼈던 것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국종 교수님이 겪은 이 참담한 현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지금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자인 이국종 교수님은 그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중증외상외과’에 대한 시스템을 세우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고, 그저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을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 원칙대로 치료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본인의 삶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환자를 살리는 사람에게 이런 참담한 현실만 놓여있는 것일까. 분명 사람 목숨 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배웠는데, ‘돈(비용)’, ‘관행’이 사람의 목숨보다 우위에 있는 것일까. 이국종 교수님이 맞닥드린 참담한 현실이, 지금 내가 사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너무 답답했고, 안타까웠고,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

병원은 분명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장소이지만, 그 전에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병원은 아픈 환자는 치료하되, 그 치료로 수입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슬픈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하는 중증 환자들도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다. 이런 자본, 돈의 압박은 환자뿐 만이 아니라 의사들도 받는다. 의사들은 진료에 사용하는 약품의 수나, 약품의 용량, 장비 사용 등의 비용이 심평원에서 지급해주는 진료비를 초과하는 순간 손실이 된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헌데 이 진료비 기준이 일반환자 기준에 맞춰 있다보니, 중증환자를 진료하게 되면 너무 당연하게도 병원은 손실을 안게 된다.



아주대학병원에서 뼈와 살을 갈아가며 중증외상환자들을 진료하는 이국종 교수님은, 다른 의사들의 적이었으며 병원의 적이었다. 근데 이게 또.. 다른 의사들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국종 교수님이나 다른 의사들이나 환자를 살리는 건 똑같은데, 이국종 교수님이 환자를 진료할 수록 병원은 엄청난 적자가 되고, 그 적자를 메꾸는건 그 외 환자를 진료하는 다른 의사들이 몫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치료받기 위해선 돈을 생각하고, 의사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선 돈을 생각하는 사회, 정말 안타깝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 모습이다. 이국종 교수님이 바라는 선진국의 중증외상외과 시스템 도입도, 이러한 우리 사회 제도가 바뀌는게 선결되어야만 가능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제도가 바뀌길 기다리기엔, 우리 사회는 관료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기에, 솔직히 힘들다. 간혹 뉴스에서 나오는 이국종 교수님의 기사를 보면, 그것도 본인이 적을 둔 아주대학병원에서 핍박받던 그 기사를 보면, 우리 사회 제도가 과연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는 할까 싶다. 이국종 교수님 같은 분을 담기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아주 작은, 간장 종지만한 그릇인것이다.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기록의 대부분은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진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에서 가려 뽑았고, 내 기억 속의 남겨진 파편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 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

한국에 돌아온 후 주위 반응은 막막했다. 한국에는 한국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기껏 찾은 답은 쓸 수 없었고 현실적인 난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외상외과 의사로서 교과서적으로 치료하면 환자가 살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원칠대로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증외상환자 치료 원칙은 환자의 생환에는 도움이 되어도 병원의 이익은 되지 못했다. 일할수록 폭증하는 적자규모는 내가 평생 구경도 못할 액수였다. 그 같은 손실이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불행을 치료하다 발생한다는 사실은 허무하고 허망했다. 나는 일해서 돈을 벌었고 일을 해서 돈을 잃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상외과’라는 말도 안되는 부서를 지키고 선 스스로가 무력했다.

-이 선생, 여기는 영국이 아니잖아? 나도 미국에서 연수받았지만 거기에서 하던 걸 한국에서 다 할 수는 없어.

-이 교수가 이제 마흔인가? 적어도 마흔이지? 이제는 좀 적당히 해. 일단 수술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게 과의 입장이야. 어차피 전공의 배정도 없이 학생들이나 응급구조사들만 데리고 하는 것도 남 보기 좋지 않고

-아주대학교병원이 외상외과 운영을 포기하면 한국에는 더 이상 현황 파악을 할 곳조차 없습니다. 조금만 이 분야를 더 끌고 가주시면 국회 차원에서 병원 지원과 함께 중증외상 환자 치료에 대한 전국적인 체계를 잡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일행의 방문은 중증외상에 대한 국가의 지원 가능성으로 비쳤다. 보직교수는 그 자리에서 내게 수술 제개를 지시했다

새로 합류한 팀원들과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살려낸 환자의 수가 늘어날 수록 적자는 정비례해 커졌다. 괴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야 했고, ‘조직원’으로서 병원의 이윤을 도모해야 했으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상 ‘외상외과’에 적을 두고서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뜨거운 눈초리와 뒷말은 여전히 무성했다.

누군가는 내게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일이라서 더 힘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심각함이 지나쳤다. 기존의 체계와 인사, 재정, 지원과 운영 모든 면에서 부딪혔다.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비아냥과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숨기고 있던 칼을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그 저열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제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덩달아 힘겨워졌다.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응급실을 크게 열어놓은 수많은 대학병원들은 정작 환자가 수술 뒤 들어갈 중환자실이나 입원실이 없어 고생하면서도 중환자실 병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는다. 중환자실 병상 없이 응급실만 크게 만들어놓는 것은, 고속도로 정체를 해결한답시고 톨게이틈나 크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병원이 이 본질적인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급하고 절박한 것은 내 사정이었을 뿐이다. 나는 수술이 끝난 환자를 어쩔 수 없이 다시 응급실로 내려보내야 할 때마다 응급의학과 의료진에게 감사했다

2011년에야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제로 평가를 담당하는 의사, 간호사들과 대면했다. (중략)

-아니, 이렇게 확실한 문제가 있으면 저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오래 놔두셨습니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치솟는 불길이 머리끝에 닿았다. 긴 바늘이 머리를 쑤셔대듯 두통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가까이 내가 올린 수많은 자료들과 직접 작성한 ‘수혈 비용 삭감에 대한 이희신청서’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혔단 말인가. 일개 의사의 불만이라도 10년 동안 지속되면 한 번은 귀 기울여줄 만했다. 나의 절박함이 그들에게는 하찮은 모양이었다. (중략)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09년, 외상외과에 혼자 있을 때 1년간의 적자는 8억원을 넘는 수준이었다. 2010년 정경원이 합류해서 열심히 진료하고 수술하니 불과 8개월 만에 적자가 8억 원을 넘어섰다. 권춘식 등이 합류하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중증외상 환자의 집중도가 증가하자 적자는 더 늘어났다. 2012년에 기획팀장이 나를 찾아와 2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보이는 외상외과의 ABC원가분석 보고서를 내밀었다. 병원은 심평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료비 청구 삭감분을 각 교수별로 지급되는 진료성과급에서 차감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외상외과를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길레 설명해야 했다. (중략) 실전에 투입되어 수많은 중증외상 환자를 치료해온 주한미군의 군의관들만이 외상외과 의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외상’이 몸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손상된 모든 것을 의미할 때, ‘중증외상’은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외상으로 반드시 ‘수술적 치료’ 및 집중치료가 필요한 상태를 뜻한다. 어딘가에 부딪히고 깔리거나 떨어져서 혹은 무엇인가에 관통당해서 사지와 뼈들이 으스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경우들이다. 이떄 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핼리곱터를 이용해서라도 이송은 신속히 해야하고, 이송 중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최종 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의료기관에 도달해야한다. P 046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린느 엠블런스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다.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로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20분 안쪽이면 충분하며 이송 중 응급처치까지도 가능하다. 그렇게 실어 온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런던에서 보고 일본에서 봤던 ‘사실’이었다.

피랍된 배의 선장은 고의적으로 선박의 항로를 지연시켰다. 최영함이 선박을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려 한 것인데,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해적들의 살기 어린 구타가 반복됐으나 선장은 버텼다. 전직 해군 부사관 출신이라는 선장은 도적들에 맞서 몸을 던져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해군은 다음을 준비했다. 본국으로부터의 직접 지원이나 근해에 배치되어 있는 연햅하군으로부터의 전력지원은 없었다. 최영함을 이끄는 조영주 함장은 피땀을 흘리며 고독한 싸움을 이어갔다. 해군의 진압에 분노한 해적 하나가 석해균 선장을 향해 AK-48 총탄을 쏟아부었다. 미군 해군항공대의 도움을 받아 오만 살랄라의 왕립술탄가부스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했다. 석 선장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1차 응급수술을 받아 가까스로 숨을 유지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그것을 아주 대학교병원에 요청할 수는 없었다. 석 선장 때문에 오만에 가야한다고 병원에 말했을 때 윗선의 화는 불같았고, 그들은 내가 어디에서 월급 받는 사람인지를 일깨워줬다. 나는 병원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 없었으며, 기대해서는 안됐다. 결국 내가 지급보증을 하겠다고 답했다.

병원 측에서 언론을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나는 언론과접촉하지 않았다. 보직교수는 인터뷰 중에 ‘아주대학교병원이 지난 19년간 중증외상 분야를 집중 육성해왔다’라고 했다. ‘10년’과 ‘집중육성’사이에서 나는 씁쓸해졌다. 내가 겪어온 10년과 병원이 말하는 10년은 같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중간관리자는 앞뒤가 달랐다. 윗선에는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고 병원에서는 이 프로젝트의 지속여부에 대해 이죽거렸다. 소방대원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은 뒷전이고 보여주기식 헬리콥터 사업에 예산을 낭비한다고도 했다. 소방대원에 대한 처우가 열악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비난은 이해되었다. 다만 저쪽과 이쪽에서 보이는 다른 낯빛에 나는 속이 뒤틀렸다. (중략) 잡음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들려왔고 석해균 프로젝트는 흔들리며 나아갔다. 불안한 시작이었다

소방방재청과 맺었던 양해각서의 이행은 7월로 중단됐다. 석해균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넉달만의 일이었다. 산 자들의 안위에 죽어가는 이들이 밀려났다. 석해균 프로젝트로 분명한 변화들이 보였으나 그 변화는 상부에까지 가닿지 않았다. 사고 현장으로 헬리콥터가 출동하고 전원이 요구되는 환자들로 인해 경기 소방창공대 내부의 업무 부담은 급증했다. 실무잗르이 힘겹게 버틸 때 필요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달느 이들은 밖에서 입을 놀려 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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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한 여성 윌라 드레이크가 처음으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 정확히는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기까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녀의 삶 속에 들어가 어린시절부터 노년의 모습까지를 보여준다.



11살 어린아이였던 1967년, 한창 미래를 꿈꿀 청춘인 1977년, 갑작스레 남편이 사고로 떠난 뒤 자식들과 혼자 남겨진 1997년. 그리고 현재 2017년.



책의 시작은 11살의 윌라부터 시작한다.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가족의 모습은, 이 아이가 어째서 수동적인 삶을 살수밖에 없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 중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희망과 자기 발견, 또 다른 기회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퓰리처상 수상작가 앤 타일러의 매혹적인 소설!”





희망과 자기 발견이라, 분명 윌라는 노년에 희망과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본인을 위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조금은 씁쓸해졌다. 윌라의 어린 시절이 가정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았다면, 혹은 윌라의 아빠가 딸들을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면, 윌라의 엄마가 스스로 본인의 잘못을 깨닫고 바뀌려 노력했다면, 윌라는 조금 더 빨리 희망을 찾았을 거고, 자기 자신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

언젠가 아빠는 "생각할 시간"이라고 말했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고 발을 쿵쿵 구르거나, 윌라의 뺨을 때리거나(뺨을 맞는 건 정멀 얼얼하고 수치스런 경험이었고, 당사자에게는 말도 못하게 무서운 일이었따) 아니면 일레인을 붙잡고 누더기 앤 인형처럼 마구 흔들고 나서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 뜯을 것처럼 세게 잡아당겼다. 그래서 손을 놓은 후에도 양쪽 머리가 부스스하게 그대로 일어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엄마는 충격에 빠져 쩔고 있는 온 집안을 뒤로한 채 혼자 사라졌고, 그럴 때마다 아빠는 "신경쓰지 마라, 엄마는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뿐이야"라고 말했다

"달걀 프라이를 해줄까, 스크램블, 아니면 삶아줄까? 어떻게 해줄까, 공주님?"

불같이 화를 내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늘 이런식이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엄마. 다짜고짜 혼자 집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도 않고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치 아무 일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몇 번은, 정말 무자비하게 화를 냈던 몇 번(엄마가 음식을 나누어주는 서빙 수저로 윌라의 뺨을 갈겨서 눈에 멍이 들었을 때, 그리고 일레인의 인형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을 때)은 그러고 나서 마치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둘을 양팔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중략) 옛날에는 엄마가 그러면 윌라도 따라 울면서 엄마에게 매달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고 쏟아놓으면서 당연히 용서한다고 말했었다.

"윌라, 난 자기를 사랑해. 맨 처음 봤을 때부터 자기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걸. 난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할 텐데 자기만 학교에 남겨놓고 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 자기도 나와 함꼐 가야지"라고 데릭이 말했다.

"나는 졸업도 안하고?"

"캘리포니아에 가서 학교를 마쳐도 되잖아."

"그냥 그 남자가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데릭이 말했고, 윌라를 보며 얘기했다. "사실 자기가 총이 있다는 그 남자 말을 그냥 믿은 거잖아. 어쩌면 그 남자가 가만히 앉아 있기 지루해서 ‘심심한데 옆에 앉은 도도한 여대생에게 장난이나 좀 쳐볼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제가 윌라에게 청혼했고 윌라가 청훈을 받아주었습니다. 전 올해 여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윌라는 졸업을 할 때까지 가디라고 싶어 해요. 물론 전 키니에서와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에 가서도 학업을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윌라를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길 바라지만, 아무튼……."

"괴팍한 엄마 밑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제일 슬픈 게 뭔지 알아?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또 엄마에게 두 팔을 벌리고 나가가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거야, 정말 불쌍하지 않아?"

윌라는 아들들이 집에서 나간 후에도 계속 엄마에게 연락을 할지 궁금했다. 두 아들이 어린 시절을 좋았다고 기억할까, 아니면 엄마를 향해 어떤 불만을 쌓아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윌라는 늘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는 언제나 ‘예측 가능한’ 엄마였다. 자식들이 엄마 기분이 어떤지 몰라서 노심초사하지 않게 하겠다고, 아침마다 방문을 살짝 열고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불안해하거나 걱정하기 않게 하겠다고 윌라는 굳게 다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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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악센트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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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감동하는 만큼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너그러운 마음의 눈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기 않았던 근사한 부분이나 자랑할 만한 모습, 숨어있던 다양한 면모가 보인다. 모두 얼핏 봐서는 보이지 안는 것들이다.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반복했다.

일이나 일상에서 상대방의 편리를 위해 애써 작은 수고를 들이거나 마음을 기울여도 실제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배려가 상대방을 알게 모르게 기분 좋게 만들고 이것이 요리에서는 맛있음으로 연결된다. 일상에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쾌적함,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주택 한 채와 만난 나는 오늘의 일상, 오늘의 일, 오늘의 모든 것에 깃든 ‘보이지 않은 곳의 몸가짐’을 정비하고 싶어졌다.

종이컵에 "Thanks!"라고 적어준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 수고를 들여 감사의 말을 써주다니, 서서히 감동이 스며들었다. 한마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배웠다. 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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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 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취향수집 에세이
신미경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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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싶은 물건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느끼는 성취감. 돈을 버는 건 언제나 어렵지만, 물건을 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견디며 돈을 벌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나와 다른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게 맞는 방향 같았다. 가장 손쉬운 기분전환, 수집인지 호딩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돈과 시간을 많이 썼고…

내가 오랫동안 고생했던 문제, 물질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고 부러움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노력한 끝에 소비중독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감정적 소비가 드물뿐더러 물질 자체에 큰 비중을 두고 살지 않는다. 물질이 채우지 못한 공허와는 다른 감각으로 여백은 여유로웠으나 삶의 재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욕구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내게 찾아온 부러움의 대상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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