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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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와 강화길의 소설은 끔찍했고 그래서 더 기대된다. 다음 그 다음엔 어떤 글이 나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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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선 - 메타젠더로 본 세상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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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공론장이 필요한 이유다.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의견은 어떤 입장에서 출발했나요? 그 입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요? 의미는 사회적 논의 과정, 화자(말하는 사람)와 청자(듣는 사람) 사이의 힘의 관계에 따른 일시적인 개념이다. 누가 하는 말인가에 따라 성희롱일 수도 있고, 유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다.

 대개 '아름답고 고상한 단어'는 관념적이어서 오용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 평화, 인권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도 되도록 피한다. 지유, 평화, 인권은 약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할 가치이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일 때 권리들 사이의 충돌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강자(주류, 서구, 남성, 서울……)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테러이며 테러라고 불리는 저항(폭력)을 초래한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약자인가, 그것을 누가 정하는가부터가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학하게 말하라고. 네 주장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든다고.

(95-96쪽)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좋아졌어, 장애인 처우가 나아졌어, 지금 굶는 사람은 없잖아…." 이런 말이 오갈 때 나는 묻는다. "그들한테 직접 물어보셨나요? 본인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여성(51퍼센트)과 장애인(15퍼센트)를 합치면 비장애인 남성 인구보다 많다. 다시 말해 여성이나 장애인은 내부 차이가 크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지위 상승 여부는 통계상으로도 쉬운 판단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 이슈에 관심이 없다. 사람이 아니라 과거와 비교되는 사람들! 이것이 차별 논쟁의 진짜 이슈가 아닐까.

 거칠게 요약하면, 현재 여성 '지위 상승'의 실제 내용은 극소수 여성의 성취일 뿐이고, 공사 영역 모두에서 여성의 '역할'(노동) 증대를 의미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만큼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증가하지 않았으므로 여성 '지위 상승'은 여성의 이중 노동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남성들 간의 계급 차이에 대한 일부 남성의 분노가 '커리어우먼'에게 전가된 것이다. 남성 연대를 깨지 않기 위해 계급 이슈가 성별로 둔갑한 경우다. 여성의 지위 상승을 가정해도 그것이 남성의 지위 하락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제로섬 사고방식은 세상이 오로지 성별 제도로만 굴러간다고 생각할 때 가능하다.

(277-279쪽)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 광고가 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름 문제의식을 느끼고 위원회와 인권 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귄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

 통계적으로 어느 사회나 전체 인구의 51퍼센트는 여성, 10~15퍼센트는 동성애자, 10퍼센트는 장애인, 9퍼센트는 왼손잡이다. 이들이 정치적 약자일지는 몰라도 적은 인구라는 의미의 소수자는 아니다. 모든 동네에 이들이, 즉 '우리'가 살고 있다. 특정한 주장을 펼친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친 것도 아닌데, 단지 '나, 여기 있어요'라는 알림(?)이 '유해, 혐오, 직설, 불법'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공중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이다.

(……)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타고난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자신이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 분별력, 주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경쟁자를 배려한다면, 전쟁 중에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지치고 외로운 자신을 배려한다면 그게 마음의 평화요, 인류의 평화다. 배려는 이때만.

 모든 차이는 임의적, 허구적인 것이다. 차이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차치하고라도, 다름의 공존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 누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기준에 따라 모두 소수자다. 단적으로, 나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소수자 배려' 운운 말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발견하고 드러내 다른 소수자와 연락하며 살아야 한다.

(284-287쪽)




 옮겨두고 싶은 글이 너무 많다. <페미니즘의 도전>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이 책부터 꺼낸 이유. 당대의 문제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백남기씨, 세월호, 이명박근혜 정부 등) 예민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말문이 턱 막히는 경우가 있다. 보통은 이렇다. 내가 제대로 말해서 싸움으로 번지거나 나 또한 제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싸움으로 번지거나. 그럴 때는 마음이 답답해지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적어도 이야기는 꺼낼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이 틀릴 것만 같아서 입을 다물게 되지는 않지 않을까, 싶었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프로불편러가 되는 길이다. 계속 프로불편러가 되어야 한다. 프로- 프로불편러가 되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 포기한다면 마음에 답답만 주구장창 쌓인 채로 살아가게 될 거다! 

 짧은 글들이 묶여 있기 때문에 왔다 갔다 대중교통 이용하면서 읽기 참 좋다. 예전에 출근할 때 에미넴 노래만 들으면서 출근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더 파워가 쎔. 요새 출근할 때 지하철 이용 시간이 15분밖에 되지 않는데, 두 챕터 씩 읽었던 것 같다. 지하철에서보다는 자기 전에 이 책을 더 많이 읽었는데, 왜 하필 자기 전에 읽었을까. 보통 자기 전에는 소설을 많이 읽는데 이 책은 그냥 읽고 싶어서 정말 읽고 싶어서 읽었다. 이 책은 그 전에 읽었던 《문학3》의 현장 섹션에 <'타자' 없는 듣고-쓰기_사가미하라 장애인 학살사건, 그 이후> 와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옮겨둔 글 중 가장 좋았던 부분을 꼽아본다. 인간은 기준에 따라 모두 소수자다. 자신의 소수자성을 발견하고 드러내 다른 소수자와 연락하며 살아야 한다.  

 좋은 책을 읽었고, 이제 또 좋은 책을 읽어야지. 어쩌다보니 이번 달에는 책을 꽤 읽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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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0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보다 ‘비판‘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싶어요. ‘프로불편러‘가 자주 사용되는 유행어가 되다 보니 불만을 표출하는 행동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요.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 - 살면서 늙는 곳, 요리아이 노인홈 이야기
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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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쿠로쇼 요리아이'의 간병은 노인 한 명이라도 그의 삶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자세로 시작된다. 그 사람의 혼란을 함께 겪고 환자가 처한 상황에 맞추려 한다. 그냥 지켜보는 게 아니라 맞추는 것이다. 이래저래 구속하거나 제지하는 것이 아니다. 흘러가는 강물의 속도에 맞추듯 자연스럽게 맞춘다. 자연스럽게 맞추는 이상, 이쪽 사정에 따라 흐름을 방해하면 안 된다. 흐름을 바꾸어서도 안 된다. 강 하나하나에는 다 나름의 흐름이 있다. 바다에 이르는 여정은 각자 다르다.

(60쪽)

 

 노인요양시설에는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도 다른 곳에 입소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듯했다. 현재 간병 중이라고 이야기한 가족 역시 부모님의 미래를 이미 예견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은 누구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끌어안고 있다. 돈에 얽인 질문이나 의견이 많은 이유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사 자녀가 있다고 해도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으면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수명이 늘어난다고 해도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을 게 없다. 이런저런 걱정이 많은 상태에서는 노후 세계에 밝은 빛이 비치기 어렵다.

 '자기 책임'이라는 말이 '늙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영역에까지 미치게 된 이후, 사람들은 두려움에 젖어 노화 예방과 치매 예방에 모든 신경을 쏟게 되었다. 특별한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늙어서 서서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사치라고 불러야 할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어쨌든 국가는 생존권에 귀속되는 간병 문제를 서비스 산업으로 자리매깁하고 민간에 위탁하여 해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결국 간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부동산 회사나 건축 회사, 이자카야 체인점까지 간병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옵션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진행될 테고 향후 간병 업계에서는 그런 방식을 기준으로 삼게 될 것이다. 즉 모든 수고를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서비스 제공 시스템인 것이다.

(207~208쪽)

 

책은 '다쿠로쇼 요리아이'를 설립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다쿠로쇼 요리아이'는 일본의 특별 노인요양시설이다.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요양시설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요양시설을 만든다는 점. 흰 바닥과 식판에 배급받는 음식, 틀에 박힌 프로그램으로 환자와 복지사의 만남이 아니라 따뜻한 나무바닥, 함께 만들어먹는 음식,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모두 늙는다. 모두가 늙는데 아프거나 정신을 잃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늙음은 아픔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아픔이 살아가는 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격리되어야할 대상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최근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아픈 사람 돌보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영화제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시간에 갔는데 그 날의 주제는 '치매'였다. 일본영화 <소중한 사람>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노화는 죽음에 이르는 '병적 원인'이 아니라, 생명이 거치는 과정이고 또한 독자적인 표현을 가진다." 치매 환자 같은 경우는 병리적 현상으로 진단을 받게 된 이후로 약을 먹어도 더욱 증세가 심해진다고 한다. 불안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마치 치매가 오면 앞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가능성이 줄어들고 주체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부터 그 불안은 올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환자로만 보아서는 안 되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모두 늙는다. 늙으면서 몸과 정신이 조금씩 예전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것을 병적인 것으로만 본다면 마치 기능을 상실한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게 가장 중요해보인다. 우리에겐 서로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만나 소통할 때 이해는 이루어진다.  현재의 마치 격리와도 같은 시설과 언제나 가족이 모든 것을 부담해야 하는 시스템은 차차 변해야한다. 누구나 살 수 있어야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굳이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일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노인요양시설'은 그런 것입니다. 노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기 위해 방문했던 분이 다음에는 젊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는 상황에 놓이는 노인요양시설입니다.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 잘 알고 있는 얼굴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낯선 세계로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그거야말로 '요리아이'가 지속적으로 실시해온 지원입니다. 특별 노인요양시설을 짓는다고 해도 우리는 역시 그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일과 다르지 않은 일을 숲 같은 장소에서도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213~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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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3 1호 - 2017년 1호, 창간호
문학3 기획위원회 지음 / 창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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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는 다른 문예지인 게 확실하고 중계 섹션도 신선했지만 주목과 현장이 좋았다. 특히 양효실 씨의 글. 그런데 오탈자가 왜....여러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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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기의 전문가들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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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있어 보이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느끼지 않은 느낌은 말하지 않았다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고

있는, 아니 없는 그대로 당당하게 쏘다녔다

최소한의 청결 유지 말고는

물 한 방울 낭비하지 않았다.

(딱히 뿌듯하진 않다)

유일한 처세술은 정직함이었고

그래서 점점 고립되었고

마음과 주머니가 깨끗해졌으나

사람들은 주머니만 알아봤다.

 

침묵이 지루하고 물소리도 거슬린다.

정말 아무것도 없나?

한마디쯤 목청껏 외치고 싶은 말

불러보지 않곤 견딜 수 없는 이름

보고 싶은 얼굴 하나?

 

      있었다면 더 완벽했을까?

 

두고 온 개의 이름을 불러봤다.

너무 나직해서 묻히지 않았다.

 

101쪽

 

 

 

 

조루주 페렉 <잠자는 남자>가 바로 떠올랐다. 포루투갈, 사실 포르투갈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는, 비수기의 전문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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