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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 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에는 그때가지 침묵 말고는 달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

 

 침묵은 자기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다라서 침묵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난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발전하거나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을 틔우는 것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멂과 가까움.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 있음 그리고 특수와 보편이 그처럼 한 통일체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을 침묵말고는 다른 어떤 현상에도 없다.

 

*

 

 단지 다른 말에서 나온 것일 뿐일 말은 딱딱하고 공격적이다.

 그러한 말은 또한 고독하다. 현대의 우울은 인간의 말 대부분을 침묵과 분리시킴으로써 말은 고독하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침묵의 제거는 인간의 내부에서 하나의 죄책감으로 존재하고, 그 죄책감이 우울로 나타난다. 이제는 침묵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우울의 어두운 가장자리가 말을 감싸고 있다.

 

*

 

 오늘날 말은 그 침묵의 두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말은 소음에서 생겨나서 소음 속에서 사라진다.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다만 아직 소음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것은 소음의 중지일 뿐이다. 소음장치가 어느 한순간 작동을 멈추면 그것이 오늘날의 침묵이다. 즉 작동하지 않는 소음이 침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여기에 말이 있고 저기에 침묵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 말해지는 말이 있고 저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라는 것도 지금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들은 마치 사용되지 않은 연장들처럼 주위에 서 있다. 위협적으로 혹은 권태적으로.

 언어 속에는 또 하나의 침묵,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동적인 어떤 것일 뿐이다. 즉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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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다 -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 이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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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손택도 그런 사람.

남들보다 촘촘하고 괴롭게 살았구나, 라는 생각.

남의 일기를 들춰본다는 재미로 시작해서 나마저도 괴롭게 만드는.

많은 생을 살았구나. 계속 이런 생각이 든다. 다음 책은 언제 나오려나.

누군가의 일기를 책장에 모아 꽂는다는 게 참 이상한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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