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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까
수전 퀸란 지음, 하정임 옮김, 권오길 감수 / 다른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의 전제는 나무에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나무를 생활공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원숭이가 나무를 옮겨 다니는 것은 사람이 튼튼한 돌다리에서 건너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튼튼한 돌다리에서 떨어질리 없는 것처럼, 멀쩡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리 만무다. 그런데 원숭이가 맥없이 떨어졌다. 무슨 일까?
<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까>는 열대밀림의 동식물의 신기한 생태를 소개하고 있다.
생태를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제목 ‘열대밀림으로의 초대’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열대 밀림의 생태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기존의 과학자들이 조사해 발표한 ‘동물자원 총량’이라는 것부터 허술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밀림의 속성상 대부분의 동물들이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데 실제 통계자료는 가시적인 부분만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가시적인 접근방법이 밀림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것은 밀림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눈에 잘 띄지 않게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학적 통계라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가? 싶은 생각에 배신감마저 일어났다.
열대밀림의 특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과학자들은 좀 더 친밀하게 열대밀림의 생태에 접근한다. 그 예로 같은 종류의 나무에 둥지를 튼 꾀꼬리와 오로펜돌라의 관찰을 들 수 있다. 찌르레기는 꾀꼬리와 오로펜돌라의 둥지에 알을 낳는데 어떤 둥지는 찌르레기를 쫓아 내고 어떤 둥지에서는 찌르레기가 날 수 있을 때 까지 키운다. 찌르레기 새끼를 내 쫓는 둥지를 살펴보니 보니 둥지 옆 가지에 장수말벌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꾀꼬리와 오르펜돌라의 새끼들은 말파리의 침입으로 죽게 되는데 장수말벌이 옆에 살게 되면 말파리가 접근을 할 수 없어 새끼들이 안전하게 자란다. 장수말벌이 없는 둥지에서는 찌르레기를 키워 말파리 애벌레를 잡아먹게 한다. 찌르레기의 알은 꾀꼬리와 오르펜돌라의 새끼 보다 먼저 알을 깨고 나오는데 먼저 자란 찌르레기가 꾀꼬리와 오르펜돌라의 새끼 몸에 기생하는 말파리 애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에 내 치지 않고 둥지에서 함께 키우는 것이다. 장수말벌이 옆에 있는 둥지의 찌르레기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자연의 생존 법칙은 주고받는 것이 정확하고 냉혹하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쯤에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식물의 잎에는 독이 있으면 같은 종의 나무라도 나무에 따라 독성이 다르다. 이런 독성 때문에 울음원숭이는 잎보다 독성을 적은 잎의 줄기만 먹는다. 그런데 가끔 먹어서는 안 되는 잎을 너무 많이 먹거나 가뭄으로 먹을 것이 적어질 때 독성 있는 잎을 먹게 되는데 그 독성 중 어떤 것은 동물의 근육과 신경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지럼증이나 치명적인 낙상을 유발하는 것이다. 열대밀림에는 울음원숭이처럼 독성 있는 잎을 가려 먹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독이 있는 잎을 먹고 목 속에서 더 강한 독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는 개구리도 있다.
나무 잎에 독이 있을 거라고는 누구든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무마다, 자라는 시기마다 독성의 농도가 다르다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다. 더욱이 동물들이 독 있는 잎을 먹어 독을 만든다는 사실도 그렇겠다 싶지만 처음 알게 된 내용이다.
이밖에도 쇠뿔아카시아 나무를 지키는 개미와 개미나비의 놀라운 생존 전략, 개미를 따라다니는 새, 그리고 군대개미의 특별한 관계는 참으로 복잡하고도 신비롭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열대밀림의 생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중 하나의 예일 뿐이다. 열대밀림의 속 생물들은 제한된 영양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재활용하는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지구 속 모든 생물들은 살아가는 생태는 다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생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배척하고 공격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개입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혹자는 자연에서 평화를 찾고 자연에게서 배우라고 한다. 하지만 자연의 실상은 인간의 것 보다 실리적이고 냉혹하다.
자연에게 배워 살아남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면, 살아남기 위해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버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적, 도의 따위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에 앞서는 순고한 정신이 인간에게 필요하다.
또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동화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식물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착취당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다 보니 식물이 안정적으로 이산화탄소를 공급받기 위해 동물에게 산소를 공급해 살아가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동물보다 식물이 지구상에 먼저 존재한 생물이기도 하고 식물은 동물의 배설물이나 죽은 시체에서 영양을 공급 받아 살아간다.
동물과 식물의 살아가는 방식이 어떻든 둘은 협력할 수 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빠른 속도로 환경과 생물을 파괴하고 탄생시켜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인간의 지닌 장조와 파괴의 힘은 무지한 생물들이 지닌 생존전략 보다 지혜롭지 못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