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쿠스 모르티스 -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
리 호이나키 지음, 부희령 옮김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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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서 죄송합니다. ㅗ.ㅗ

<아미쿠스 모르티스>

장마는 내 발을 묶고 내 눈을 촉촉히 하여 독서에 적당한 환경을 만들었다. 덕분에 봄부터 펼쳤던 <아미쿠스 모르티스>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아미쿠스 모르티스' 는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들이란 뜻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반 일리치의 순고한 죽음을 함께한 리 호이나키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자본주의로 구조화된 학교, 병원과 같은 사회체제를 거부한 인물이고 그런 사회체제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해 냈다. 리 호이나키는 그런 이반 일리치의 절친으로 누구보다 일리치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일리치와 같은 사유체계로 세상을 보고 삶으로 실천한다. 리 호이나키의 글을 읽으면 읽는 동안, 읽은 후에도 우리 삶에 밀착된 것(의료, 보험, 장례, 죽음, 학교 따위 )들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나는 호이니키의 책을 찾았다.

이번엔 왜 하필이면 '아미쿠스 모르티스'인가,
나와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이제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들에겐 더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 죽음을 맞이 해야할지 알지 못 한다. 그래서 내 주변에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생각해 보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호이나키는 이반 일리치와 마찬가지로 카톨릭신부 교육 받은 사제였다. 따라서 이 책은 매우 종교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과 죽음, 그리고 장례에 대해 기술되고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조금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삶과 죽음, 병과 정의 그리고 장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스스로 실천을 할 수 없어도 나와 다른 태도(일반 적인 상식 밖의 태도)를 지닌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호이나키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친절한 장애소녀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인듯 말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나는 호이나키가 중세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중세시대 귀족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걸인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걸인들도 귀족들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 자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치심 없이 구걸을 하였다고 중세의 산책이라는 책에 기록된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이런 중세관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왠지 꺼림직하다. 마치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존재 가치를 찾기 보다는 비극적인 자신의 삶을 무기력하게 수긍하고 타인의 삶을 위해 존재 가치를 찾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좀 순수하게 보기로 했다.

그 것은 장애소녀가 친절하기까지 하여 감동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친절한 것 보다 훨씬 감동적이어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과 불행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데 기여 했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의 조화를 찾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반 일리치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라는 책을 쓸 정도로 병원 사업을 성장시키는 현대 사회 구조체계를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얼굴에 혹이 생겨서 점점 커졌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고통 속에 살다 죽었다. 일리치는 그런 고통을 참는 이유가 병원치료에 대한 반감 때문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지신 예수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약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왜 하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얼굴에 혹을 만들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이 욥을 시험하셨듯 일리치를 시험에 들게 해 그를 세상에 드러내게 하려는 뜻인듯 하다. 왜냐하면 그의 길이 예수의 길 처럼 정의롭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는 그를 빛으로 삼으려 했음이다. 그렇지 않고서 자본주의 병원 시스템을 비판한 일리치 얼굴에 혹이 생기는 우연이 만들어질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예수를 믿는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 묻고 싶어졌다. 작은 고통에서도 벗어나게 해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종교인이라면, 나처럼 종교인 아닐지라도 내게 찾아온 고통을 통해 예수의 고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러면 스스로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반 일리치처럼 병원 치료를 거부하자는 뜻은 아니다.

한편, 호이나키는 친구 제리가 머무는 요양원을 찾아 간다. 제리는 그닥 똑똑한 사람도 큰 명성이나 사회적 기여도가 있는 사람이 아닌 종교 교육자였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것을 욕망하지 갖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요양원에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하는데 잘 살려면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워 지려면 세속의 것을 욕망하지 말아야 하는데 제리는 그것을 실천하기에 너무나 좋은 구조를 지녔다고 기술되어 있다. 어쩜 호이나키가 들려준 삶과 죽음 중에 그나마 실천 가능한 모델이 아닐까 싶다. 세속적 욕망을 죽이는 건, 일리치가 진리를 욕망한 것 보다는 쉬울듯 하다.

호이나키가 멕시코에 살던 때였다. 어느날 신문에서 끔찍한 기사 하나를 보게 된다. 얼음송곳을 든 청년이 마을버스 기사를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버리다 실행하지 못하고 마을버스에 탄 승객들에 의해 제압 당하는 과정에서 얼음송곳에 의해 살해 당한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호이나키는 예수의 현현을 발견하고 죽은 청년을 위해 기도를 한다. 청년은 비록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누군가 그 죽음을 통해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떠올리고 기도하는 동력을 만들낸다 것이다.

난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적어도 기도하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사건 사고를 접하기 때문에 타자화 하는 일에 익숙하여 깊이 공감하고 아파하지 못 한다. 누구를 야단하는 게 아니라 내 종아리를 치고 있는거다.

나치에 대항한 백장미단(기독교 청년 단체) 한스와 조피의 하느님과 함께하는 정의로운 죽음을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종교적인 인간으로 성숙해 왔는지, 자신들이 알게 된 하느님의 길을 온전히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불의에 맞서 항거하여 얼마나 평화롭고 온화하게 죽음 맞이 했는지, 세심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치에 동조했던 당시 교황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치뤄지는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장례식을 하게된 이유는 동물과 달리 우정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교회에서 이웃들이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며 장례의식이 일상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인간적인 깊은 우정을 느꼈고 장례식의 참 의미를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이 글을 마무리 할 때쯤 내가 요즘 빠져있는 팟빵 두철수 리오타르편을 들었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이티의 핵심은 그 동안 추구해 오던 재현과 해방이 아니라 애도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각자가 애도하는 삶을 지속하며 살때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읽은 아미쿠스 모르티스가 종교적인 삶인 동시에 포스트모던이티적 삶을 추구하는 책이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찾아낸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해 보자. 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부모님이나 타인의 죽음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들이 생각하시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시도록 돕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앞서서 연명치료를 한다든지 병원에만 의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시는 동안 정신을 잃지 않는 한 당신이 살아 온 삶을 유지 시켜드리고 돌아가신 뒤엔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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