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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 빨간소금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 한 치 앞도 모르면서 >
어젯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내릴 때마다 점점 추워지고 봄비는 내릴 때마다 점점 더워진다. 봄이나 가을이나 비가 내리는 원리는 같을진데 공전 주기로 인해 날씨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 보이고 새로운 진리를 만들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사다 보니 선후좌우 맥락을 빼고 보면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진리처럼 보인다.
<한 치 앞을 모른다>는 책 제목을 보고 톨스토이의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톨스토이는 한 치 앞을 모르는 극단적인 예를 보여주면서도 선악의 갈등구조로 몰고 가기 보다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삶이 승리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남덕현의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사엔 선악이 없다. 그저 비루한 개개인들에게 아리지만 빛났던 추억들과 그런 추억을 묻고 늙어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천연덕스러운 충청도 특유의 해학이 있을뿐이다.
책 속에 드러난 충청도식 해학은 선문답처럼 매번 엉뚱한 의문으로 시작해서 엉뚱한 결말을 맺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그 이치가 어긋남이 없어 우리가 지닌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내며 밑도 끝도 없고 선악도 없으며 좌우도 없다. 이런 말놀이는 돈도 장소도 장비도 필요 없다. 격식을 갖춘 충청도식 말투 덕에 과격해지지도 않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좀 더 무식한 쪽의 주장이 승리한다. 부지런히 늙어 가도록 시간을 흘려 버리기엔 이만한 놀이가 없다.
1여년 전쯤 페북을 시작하면서 남덕현 작가를 알게 되었고 그의 책만 세권을 구입했다. 현란한 글 빨로 진실을 왜곡하는 이들 속에 정견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행동하는 남작가를 존경한다. '세상에 글과 말로 먹고 사는 일이 제일 추하다' 하신 조부의 말씀을 새기고 달걀을 주는 이에게 시집을 건내며 '시는 달걀'을 낳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 속에 묻어나는 작가 정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작가가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보석처럼 빛이 난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