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견딜 수 없어! - 아지즈 네신의 유쾌한 세상 비틀기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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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견딜 수 없어!>를 읽으면서 여유오줌에서 출판된 <원숭이 꽃신>이 생각났다. 단편 동화 같다는 것과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의 11개의 단편 중 처음에 실은 ‘덜컹덜컹’은 진보라는 이름하에 기계문명을 떠받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정휘창의 ‘원숭이 꽃신’ 이 떠올랐다. 발바닥을 보호해주는 꽃신을 오소리에게 얻어 신다가 결국, 꽃신 때문에 원숭이는 오소리의 노예 신세가 되었다. 솔직히 이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원숭이 꽃신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주제가 분명하고 깔끔하게 잘 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철퇴’,‘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아, 우리 당나귀들 ’을 읽을 땐 권정생의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아지즈 네신의 이 세 작품 속에서 각각 권력자의 횡포와 억압을 비판하였고, 지식인이 탁상공론만하며 대중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횡포에 순응하고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우매한 대중역시, 아지즈 네신의 비판대상이다.
그런데, 아지즈 네신의 작품들이 사회를 비판하는 것에 그쳤다면, 권정생의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는 문제해결 방식까지 보여주고 있다. 허수아비의 몽둥이가 무서워 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새들은 어린 새들이 먼저 하늘을 날자, 함께 하늘을 날아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아지즈 네신은 ‘행복한 고양이’에선 보이지도 않는 원에 갇혀 답답해하면서 고양만 그리워하며 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지즈 네신이 사회비판적인 글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민중이 혁명을 통해 승리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권정생은 잠시나마, 4.19혁명으로 민중이 승리하는 경험을 했고 5.18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을 통해 어떻게 민중이 민주화를 이루는가를 경험했다. 그러기에 어린 새들의 용기와 날 수 없었던 모든 새들이 함께 힘을 합하면 허수아비를 물리치고 창공을 훨훨 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기에 동화로 그려 넣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현대사가 그리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언론 탄압, 부자감세, 사대 강 살리기로 인한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시위와 지식인들의 시국선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MB정권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믿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억울하다고 한다.
국민은 대통령의 진심에는 관심이 없다. 진심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기준이다. 국민이 바라는 건 언론의 자유이고 서민을 위한 정책이며, 단기적인 경제부양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의 경제정책과 교육정책이다. 우리 국민들은 아지즈 네신에 등장하는 당나귀도 아니고, 하늘에 원을 그려 놓고 고양이를 부러워하며 누가 먼저 원 밖으로 나가길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는 6월 항쟁을 통해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냈으면, 야당으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경험했으며, 군사독재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경험이 있다. 6,70년대의 국민이 아니란 말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에서는 사회.정치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아지즈 네신이 지닌 종교에 대한 비판, 인간 본성에 관한 비판의식을 작품을 통해 볼 수 있었는데, 짧은 글 속에 오싹 할 정도로 날카롭고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동화도 외국 정창휘의 ‘원숭이 꽃신’이나 권정생의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작품들은 아지즈 네신 작품처럼 외국에 소개되어도 손색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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