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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1 ㅣ 루나의 예언 1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강만원 옮김 / 창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루나의 예언
Beyond the Hills
아주 먼 옛날에는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눈동자 위로 하늘에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사람들은 별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점성술은 그리하여 탄생됐다. 세계 곳곳에서 싹을 틔웠지만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7개의 행성, 즉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으로부터 세계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자연히 개인의 운명과 결부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다. 점을 보는 행위는 이토록 유서가 깊은 일이다. 그로부터 과거를 추정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점성가가 많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기 일쑤였다. 그게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한 일이었다. 가령, 이 땅에 여러 종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로는 점성가들에게 소위 이단으로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책의 후기에 언급된 것처럼 현대천문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요하네스 케플러 또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점성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짜가 공식적인 기록보다 6년가량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박해를 받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 가정은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 아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마는, 수많은 사람이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굳건히 지켰던 신념의 근원이 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일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좀처럼 질문을 허락지 않는 바로 그 종교의 영역에 다분히 인간적인 물음을 던진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로서 특별히 문학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은 감히 그런 종류의 문학이 지닌 매력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무려 15년간 두 발로 역사의 장소를 오가며 공들여 집필한 작품답게 현재 그는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줄거리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타고 흐르는 거의 모든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재구성되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놀라움을 안긴다. '다빈치 코드'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설과 달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긴장 위에 선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여기서 검은 복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일부 종교의 폭력과 위선은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문제다.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거짓과 타락에 물들면서 신앙의 본질을 망각한 채 믿음 그 자체에 몰두하는 일이 늘고 있는 추세다.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고로 이 작품의 배경에 해당하는 중세의 지중해 연안은 특정한 시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한 편의 소설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예컨대 유대교·카톨릭·개신교·이슬람을 가로질러 당대의 철학적 사조를 두루 통과한다. 그 모든 것에 무지몽매한 나 같은 독자도 충분히 따라갈 만한 테두리 내에서.
△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
주인공 조반니는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점성술을 배우게 되면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마녀로 불리는 루나가 보름달에 비친 토끼의 내장을 보고 조반니의 인생을 예언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은 그에게 일어나게 될 중요한 사건들을 일찍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소제목들 또한 두 권에 걸쳐 7개의 행성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의 순서는 조반니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이성과 과학에 힘입은 점성술이 세상의 운명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신과 인간이 결코 대립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삶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래, 우리는 삶에 열심이지. 그러나 그것에 매달릴 뿐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어.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야. 요컨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다는 것은 예술이지." 그는 우리가 예술 같은 삶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세계의 거친 물결에 휘둘리지 않고 제 삶을 스스로 조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생존에서 진정한 인생으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 전에 본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세상에 내동댕이처진 한 소녀가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오갈 데 없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것은 비단 특정한 상황에 놓인 자의 비극이 아니다. '존재하는' 자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인생 그 자체다. 혹자는 그 영화가 예사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데 고개를 기우뚱했지만, 나는 이러한 비극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에 매달리는 태도, 삶이 아니라 죽음에 기도하는 자세는 벌거벗은 생명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운명을 움켜쥔 별들을 바라보면서도 지상의 언덕을 넘어서는 일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