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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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야간근무 설 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 읽은 날과 읽지 않은 날의 피로도가 확연히 차이 난다는 걸 체감한 결과였다. 비몽사몽 상태로 졸다가 멍때리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식으로 2시간을 ‘허비‘하는 게 졸린 눈을 비벼 정신 차리고 꾸역꾸역 책을 읽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뛰어넘어 다음 장을 빨리 넘기고 싶은 책이 등장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읽는 수밖에. 언제 어디서든. ​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을 읽었다. <마음 사전>과 10년 터울의 자매와 같은 책이라고 시인 스스로 설명했는데 내게는 한참 어린 동생 격인 <한 글자 사전>이 구면이어서 더 친숙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종각역의 반디앤루니스(종로서적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에서 처음으로 문예지를 읽었다. 문학동네, 창비, 자음과모음, 문예중앙, 오늘의 문예비평, 21세기문학 등등... 당시 재학 중이었던 학교도서관에 구독 중인 문예지보다 더 다양한 종수를 구비하고 있었고, 2-3시간 정도 서점에 머무는 동안 읽기에는 단행본보다 문예지 쪽이 적합했다(현대문학 핀 시리즈나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또 달랐을 지도... 여튼). 계간이라는 시간 텀, 시 소설 산문 비평 이론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이 총망라되어 있는 장르의 잡스러움(잡지다움), 듣도 보도 못한 신인작가의 등단작부터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가들의 최근 발표작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다는 신속성 등 문예지 읽기는 꽤 흥미로운 활동이었다. 문예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사뭇 진정한(?) 한국문학 독자가 된 것 같은, 사실 그보다는 진정한 문창과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문예지들이 폐간되고(혹은 편집위원들이 교체되고) 신생 문예지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전, 황혼의 시간대에 기존 문예지 체제의 마지막 독자가 된 것이기도 했다. 그때 챙겨 읽었던 연재 코너가 몇 가지 있다. 故 황현산 선생님의 로트레아몽 번역, [21세기문학]의 청탁받은 작가가 자율적으로 꾸렸던 코너(한유주의 글이 흥미로웠던 기억), [오늘의 문예비평]에 연재되었던 김경식 선생님의 루카치에 대한 글(아마도 이 초고를 바탕으로 <루카치의 길> 단행본이 탄생한 거라 짐작된다), 그리고 문예중앙에 연재되었던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 두툼한 두께와 부피를 자랑했던 문예중앙에서 ‘한 글자 사전‘이 거의 말미에 배치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뷔페에 와서 시 소설 평론 종류를 가리지 않고 탐식한 뒤에 식사를 마무리하는 디저트와 같았던 한 글자 사전.



2014년 그 해에, 아니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게 가장 감명 깊고 충격적이었던 낭독의 경험은 2014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접한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와 김소연의 <수학자의 아침> 낭독이었다. 작가가 낮은 목소리로 일정한 리듬과 속도를 유지하며 읽은 <불가능한 동화>는 내가 평소와 같이 천천히 묵독했더라면 아마 감각하지 못했을 것들을 머릿속에 현현시켰다. 문체의 리듬, 사유의 리듬에 접속했을 때에만 감각할 수 있는 미묘한 텍스트의 질감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텍스트를 시 읽듯 가장 느리게 읽어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각 텍스트에 맞는 사유의 속도와 리듬에 도달해야만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팽팽하게 당겨진, 기분 좋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정신으로 텍스트를 소화할 때의 자릿함, 지적 흥분과 열기 같은 것이 그 순간에 있었다.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를 구축한 작가를 읽어낼 때, 말하는 입을 활용해 문장이 음악이 되게끔 소리내어 읽고 호흡하고 멈추며 내 몸으로 문장과 부딪쳐보면서 문체에 내재된 작가의 육체성을 경험하는 방법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 낭독.



일상에 안개처럼 퍼져 있던 외로움이 응결돼 단단한 얼음과 같은 고독이 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정작 자기 마음과 욕망을 알지 못했던 어긋남의 상태에서 오롯이 마음과 대면할 수 있었던 시간

익숙한 언어로 가장 낯선 감각을 일깨우고, 감정 이전의 감각의 화학 작용을 일으켜 마음을 운동시키는 서정의 힘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날.



이 날 이후로 최애 시인 리스트에 김소연을 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학자의 아침> 이후에 나온 <i에게>도 너무 좋았던 탓에 이 결심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뮤지션 최고은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두 사람의 우정 또한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오늘의 난 미지근하게 축제]의 책 소개는 다음과 같다(알라딘 제공)



˝싱어송라이터 최고은과, 시인 김소연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들어 낸 아트북이자 새로운 음악책의 형태 뮤키디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가꾸어나가는 ‘우정스러움‘을 주제로 한 이 작업은 우정을 지켜내기 위한 각자의 내면을 다듬는 일상적인 모습들이 조화롭게 묘사되어 하모니를 이룬다.˝



정가 33,000원이지만 사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개인적으로 김소연 시인의 이미지를 한 장 간직하고 있다. 2016년 가을 경이었을까. 학과에서 외부 시인을 초청하는 행사를 마련했고, 내 추천/의견이 반영됐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김소연 시인이 먼 걸음을 해주셨다. 행사가 끝나고, 교수님을 포함해 시 동아리 멤버들이 주축이 된 무리가 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김소연 시인의 열차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채식을 하셔서 그랬는지 고깃집(이라고 기억하고 있다)에서 샐러드 혹은 밑반찬을 조금 들다가 금방 일어서셨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적은 양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 시인이 <경배>를 쓴 시인이 맞구나 싶었다. 시인과 시가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소연, 진은영, 심보선. 좋아하는 시인의 목록에 (여전히) 가장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시인들. 곧 있으면 진은영의 신작 시집(무려 10년 만에!!)이 부대에 도착할 예정이다. <한 글자 사전>을 읽고 나니 김소연 시인의 글을 더 읽고 싶어져서 다른 산문집을 읽을지,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할 예정. 심보선 시인의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와 <오늘은 잘 모르겠어>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집도 따라읽고 싶지만...(투명도 혼합 공간 등등) 좋아하는 것들을 충분히 좋아하고 난 다음이어도 늦게 않을 테다.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한 글자 사전>, p242)







동지와는 사소한 이견을 좁혀나가기 위하여 논쟁을 한 이우 옹호로 귀결되어야 옳고, 벗과는 사소한 이견으로 대화를 농밀하게 만든 이후 다름에 매혹되어야 옳다(172)







시스템 바깥에서 끼리끼리의 유대로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정말 하고 싶던 방식으로 그 일을 하고, 정말 되고 싶던 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이런 일만이 이 시대엔 유일한 궐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59)







우리가 가장 믿고 사는 이것. 우리가 가장 숭배하고 사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큰 실망을 주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다양한 실망을 주는 이것. 그리하여 가장 연연하는 이것. 하여, 몸은 우리에게 말한다. 몸의 언어로. 몸의 방식으로. 몸으로써.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감각‘이며, 감각에 기대어 몸의 언어를 듣는 일이 ‘아픔‘이며, 몸의 언어에 화답을 하는 일이 ‘통증‘이며, 몸이 자신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 ‘회복‘이다. (148)







가장 순정한 말은 오로지 한 음절로 이루어진 감탄사다. 가장 나약한 말은 남을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조차 기만하는 저짓말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입증하고야 만다. 가장 허망한 말은 사랑을 맹세하는 말이지만, 그 허망함은 너무도 허망한 나머지 이상하고 야릇한 굳건함이 있다. 가장 영리한 말은 무수한 대화 끝에 매달리고야 마는, 자신의 허위를 자조하는 말에서나 가능해진다. 가장 아둔한 말은 누군가를 꾸짖는 말이다. 무섭게 가르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이 닫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무서운 말은 정확한 말이다. 가장 정확한 말은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집약적으로 초점을 맞추며 감정을 싣지 않기 때문에 냉혹하다. 가장 가난한 말은 말을 많이 하는 자의 입속에서 나온다. 가장 현명한 말은 그 말을 듣는 자가 듣고 싶어하던 말일 뿐이며, 가장 진실된 말은 말로 하는 순간 추레해질 뿐이며, 가장 영롱한 말은 했던 말들을 모두 부정하는 말일 뿐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 차라리 신음이거나 비명이며, 신음과 비명 너머에서 가다듬어 하는 말은 기도와 겨우 가까워질 수 있다. 말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을 비집고 생성되는 뜬금없는 농담의 말과 뜻 없이 손을 흔들며 건네는 인사말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언제나 반갑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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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의 0 영 zero 零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체득하고 견지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적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 개인적으로 아직 사람에 크게 데여본 적이 없는데 주변이나 미디어에서 전파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기적이고,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가스라이팅에 능한 사람(주로 애인, 친구, 가족 같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의해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는 일화를 흔히 접하게 된다. 자기애와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에 별다른 도덕감정과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소설 화자와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관계에서 위로와 연민, 동정을 보내며 우월감을 향유하다가 힘의 관계가 역전되고 나니 열등감을 못 이기고 관계를 ‘손절‘해버린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신 블로그 이웃 분이 겪은 사건이 떠올랐다. 어렵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진짜배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성장과 성취,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이-관계, 상대방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공유할 수 있는 ‘팬심‘이랄까 -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런 순수한 팬심-애정을 유지하고 키워나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배신당하거나 파괴되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자아의 안전 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납득이 되었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완전히 발거벗은 취약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돌봄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그런 ‘자기통제력‘에 대한 불안-강박을 넘어서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넘어설 수 있는 초월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에도 ... 정신이 무너져 고생했던 경험이 떠올라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과 의존, 돌봄과 우정, 마음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계속.



인간 사냥꾼이랄까, 아니면 흡혈귀 같이 타인을 착취하는 인물의 내면을 심리스릴러적 문법으로 풀어내 일단 재미 있었다. 황예인 평론가와의 대담을 읽고 나니 본문을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다. 예전에 읽은 <천국에서>와 비교했을 때 경향이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실제로 이 텀 동안 작가가 미국에 체류하며 번역을 하며 생활했다는 전기적 사실도 존재한다) <N.E.W>도 읽어봐야겠다.



-존 후퍼의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코너 중 ‘책 읽는 의자‘에 소개된 적이 있는 책. 이탈리아 여행을 대비할 겸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지리, 음식 등을 다룬 책을 찾다가 권은중(마찬가지로 <조용한 생활>에서 김혜리 기자님과 음식과 요리, 먹는 일을 다루는 코너를 맡아주셨던) 님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다음 타자로 존 후퍼의 책을 골랐다. 권은중 기자님의 책은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영향에서인지 반복되는 부분이 많은 점은 아쉬웠지만 기본적으로 ‘볼로냐‘라는 매력적인 도시를 중심으로 음식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입문자가 읽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는 좀 더 서술의 무게감과 깊이감이 있는 편이다. ‘가족‘을 중시하고, ‘음식‘에 정말 진심이고(이 둘은 강한 상호관련성을 띤다. 저녁이면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일상의 의례를 중요시한다고), 가톨릭의 영향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고, 정치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며, 행정과 법이 복잡하여 효율성이 떨어지고, 겉모습-패션과 치장에 열심이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고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남북 문제‘라는 고유의 모순을 안고 있는 나라. 부제대로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이탈리아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접했던 이탈리아 문학, 영화에 대해 뒤늦게 이해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현실과 환상(판타지아)의 경계가 확실치 않고, 진실verite이 단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상대적인 버전으로 복수의 진실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 이런 일반화에는 항상 오류의 위험이 따르고, 또 저자의 포지션이 영국 출신으로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탈리아 란 걸 감안하고 수용해야겠지만 -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다시 읽으며 새삼 신기했던 부분은 이탈리아식 ‘기사‘의 문체와 형식. 일반적으로 ‘기사‘하면 정확한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한 글을 연상하겠지만 이탈리아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성이 강하다고 한다. 핵심 정보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초중반부에 썰을 많이 푼다고...



관심 있는 나라를 이런 식으로 다룬 책을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일단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정도.



-녹색 계급의 출현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이은 라투르의 생태정치학 저작들. 이음 출판사에서 내는 과학잡지 <에피>에 ‘인류세‘ 코너도 있고,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 연구센터장의 글도 자주 실리는데 라투르의 근작들도 이음에서 발빠르게 번역돼서 참 고무적인 부분이다. <녹색 계급의 출현>은 라투르와 슐츠(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작업을 했듯)가 쓴 녹색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이었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위계를 철폐하고 ‘지구생활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던 라투르는 이 책에서 ‘신기후체제‘의 파국적 위기에 맞서 대항할 주체화의 계기로 ‘계급‘을 (재)소환한다. 근데 여기에 ‘녹색‘을 곁들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생산력주의에 갇혀 있었고, ‘진보‘ ‘발전‘ ‘풍요‘ ‘확장‘의 구호가 아닌(이를 통한 해방은 공멸적 파괴와 다른 생명체에 대한 파괴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 되어 진정한 해방일 수 없기 때문에) 지구의 거주가능성-생존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감싸기‘의 생태정치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메모 형식이라 시론적, 선언적 성격이 강한데 오히려 그래서 사고를 촉발시키고 연결시키는 면모가 크기도 하다. 네 편의 해설 모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견지하여 이 선언문을 어떻게 활용/사용할 지에 대한 방향을 잘 제시한다. 선언문이라 그런지 읽다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모먼트가 존재한다.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에 제시된 <숲은 생각한다> <반려종 선언> <부분적인 연결들> 포스트휴먼, 신유물론, 과학기술학 저서 리스트로 공부를 이어가면 참 좋을 텐데... 혼자 읽기엔 좀 빡셀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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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한 사람만을 위한 서점
정지혜 지음 / 유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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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한 사람을 위한 서점>(이하 사적인 서점)이란 책이 있다. 출판편집자에서 땡스북스 서점 직원으로, 땡스북스 점원(스태프)에서 팝업스토어 운영자로, 팝업스토어 운영자에서 서점 운영자로 ‘서점인‘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지혜 씨의 여정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생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편의 성장소설 같기도 하고,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열정과 진정성으로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청년의 자서전(자기계발서의 성격이 살짝 가미된)으로 읽히기도 했다. 정지혜 님이 운영한 ‘사적인 서점‘은 이용자에게 맞춤형 책을 추천해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사전에 간단한 설문-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독자인지 드러낼 수 있는 자기소개 내용을 채워야 하는-을 진행하고, ‘인터뷰이‘에 대한 사전조사를 마친 정지혜 님은 서점 방문자와 대화(때로 상담적 성격이 강화되곤 하는)를 나눈다. 그날의 대화를 바탕으로 이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선별하여 편지와 함께 보낸다(사실상 선물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수고에 비해 너무 적은 비용을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으로 방황하던 시절, 그러니까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나 논문의 진도를 진척시키지 못해 답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이러다가 정신병 걸리겠다 싶어 시작한 달리기에 취미를 붙여 JTBC에서 주최한 마라톤대회 10km 코스를 완주하고(이때 최고기록을 찍었다. 46분) 알라딘 중고서점 잠실 롯데월드타워점에서 이 책을 읽었다. 그렇다. ‘책을 좋아한다‘는 ‘술을 좋아한다‘는 말만큼이나 별다른 정보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말이었다.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을 좋아한다고, 사회적 연결망을 확장하고 느슨한 공동체의 연대를 구성하는 작업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을 때 저자, 독자, 편집자, 마케터(묶어서 출판인), 북튜버, 서점인, 서평가, 비평가 ... 어느 필드에서 어떤 플레이어로 활약하면 좋을지, 어떤 포지션에서 가장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지 해보기 전에 알기 힘들다. <사적인 서점>은 저자가 필드에 나와 자신을 가장 가슴 뛰게 만드는 일이 결국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 거라는 믿음 혹은 신념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그야말로 청춘의 기록. 이제는 냉소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정말 순연한 사랑과 용기로 똘똘 뭉친.



이제 장병 소원 성취 프로젝트가 1주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구상 단계를 건너뛰고 작성 단계로 넘어가자고 생각하던 시점에 문득 정지혜의 <사적인 서점>이 떠올랐다. ‘그래픽노블/만화 서가 만들기‘ 안이 당선 가능성의 측면에서나 개인적 만족도의 측면에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선뜻 시작을 못하고 있던 차에 약 3년 전에 읽은 책의 아이디어를 차용해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친 것이었다.



정지혜 님의 사적인 서점 +김현 시인이 창비 시요일에서 연재했던 ‘시 처방전‘ + 그리고 어느 책축제에서 팝업스토어 성격으로 운영했다고 하는 ‘책 약국‘ -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책을 처방전으로 추천-선물해주는 형식. 이런 느낌으로 책 추천과 고민상담이 배합된 익명의 신청서 - ‘정말 재미 있는 소설‘ ‘로맨스 소설‘ ‘제대하고 나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이 가득한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마음의 위로가 되는 책‘ -를 받고, 1주일에 한 명에서 두 명씩 책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책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는 독자, 혹은 직접 얼굴을 보고 상담이나 대화를 하긴 부담되지만 사연을 들은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고심해서 고른 책을 받아보고 싶다는 독자를 노린 프로젝트. 정지혜 님의 ‘사적인 서점‘처럼 대면으로 대화를 나눠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너무 스케일이 커져서 지속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한 번 만나고 스쳐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대화-상담을 원하는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예상되기도 했고. 그래서 내 특기를 살려 책 추천에 모든 능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어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정지혜 님이 고민했던 것처럼 독서량이나 독서의 범위에서 부족한 면, 한계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능숙하고 완벽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역하는 나 자신을 위한 책 선물을 하기. 크... 완벽하다. 다음 주부터 좀 바빠질 예정이라 시간 내에 신청서를 완성할 수 있을지 좀 걱정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라 믿는다. 앞으로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도 기각시키기로... 데부씨의 사적인 서점 커밍 쑨(제발... 뽑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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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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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 에세이가 땡겼다. 때마침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가 병영도서관에 꽂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여행할 권리>였는지 다른 책이었는지 헷갈리는데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휴식차 들렀던 카페에서 재밌게 읽은 적이 있어서 안심하게 선택했다. <언젠가, 아마도>는 여행잡지에 연재한 쪽글을 모아놓은 형식이다 보니 그때 읽었던 책에 비해 한 꼭지의 분량이 적어 아쉬웠다. 대서사시-대하드라마까진 아니더라도 드라마, 영화 한 편 정도의 스케일과 길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릴스 수준이었다. 하지만 짧은 분량에서도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거나 생각을 자극하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프로작가 김연수의 탁월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이 양반은 프로여행가였다.



부대에 여행 잡지 트래비가 들어왔다. 태국 방콕, 일본 훗카이도, 샌프란시스코, 튀르키예, 정원을 감상하기 좋은 국내 카페, ‘먹는 것에 진심인‘ 걸로 평가받는 호텔의 뷔페와 디저트, 국내 섬여행 등을 다룬 권호였는데 재밌게 읽었다. 예전에도 들어온 적이 있었을 것 같은데 다른 권호도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읽다 보니 전역 이후 배낭여행의 행선지를 이탈리아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의 심정과 기분, 욕망에 따라 여행지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섬에서 혼자 삼시세끼를 찍고 싶어질 수도 있고, 유럽 대신 동남아에서 좀 여유 있고 풍족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여행 텍스트를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여행 에세이 추천해주세요 ~~(문인이 쓴 여행 에세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나 김훈의 자전거 여행 같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머물 때였다. 거기서 나는 망명 작가 놀이를 하면서 지냈다.

(...) 길바닥에는 사각형 돌이 깔려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차와 차와 개와, 그리고 이슬람군과 십자군과... 또 뭐가 있을까. 아무튼 그 길로 다녔을 법한 모든 것이 지나간 덕분인지 불빛을 받은 돌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밤의 골목은 차도르를 입은 소녀의 두 눈동자처럼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알바이신 언덕에는 그런 골목이 흔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길인지라 반짝임에 이끌려 무심결에 발을 들이고선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나오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라나다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되돌아나온 골목이 얼마나 많은지! 거리를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카푸치노 한 잔이면 충분하다. (...) 고개만 들면 거기에 밤의 알람브라 궁전이 있으니까. 내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몇 개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불 밝힌 알람브라를 올려다보는 건 꼭 그 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

(29-31)



<사막조차 피로 물드는 시대의 도피처>



오래전부터 혼자서 썼다 지웠다 하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2차 진주성 전투에 관한 부분이 있다. 성이 함락되고 살육이 모두 끝난 뒤, 죽은 자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일어나 6만여 명이 살해된 풍경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소설을 썼다 지웠다 할 수밖에.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진주성을 앞으로 또 몇 번이나 더 가게 될는지.

이미 한 번 이상 본 전시물들이라고 생각하고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시가 눈에 띈다. 본 기억이 나지 않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몸이여, 오사카의 화려했던 일도 꿈 속의 꿈이런가.‘ 분한 마음이 남아서 6만여 명이나 죽이면서 살아온 한평생이라면 여한이 없노라고 말할 것이지, 꿈 속의 꿈이었다니. 그나마 교훈 하나를 남기고 그는 죽었다. 모든 억울한 백골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 결국 그도 죽었다는 것.

(...) 오히려 나는 몸이 죽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알 것 같다. 서른아홉 살에 나는 사막을 처음 봤다. ˝이런 게 사막이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막‘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실재가 내 눈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뭔가‘가 내 눈앞에 있었다.

혼자서 몇 개의 모래언덕을 넘어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어디를 바라봐도 풍경이 똑같아서 차라리 어떤 풍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나왔다. 거기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말하자면 내가 살던 세계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감각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과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구분하지 못하리라는 것. 그러므로 육신이 죽을 때,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한순간 이 세상은 사라지리라는 것.

사막이란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죽음을 경험해 육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려는 은수자들은 자발적으로 사막을 찾아갔다.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둔황에서 터키 중부까지 그들의 흔적인 석굴 유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어서야 알게 된 진실을 살아서 경험했으리라. 그래서 그런 은수자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 악은 결코 다른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든 그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제거하라. (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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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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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 때였나. 서로 인사는 주고받지만 단둘이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같은 반 친구‘와 수원역에 같이 있었다. 왜 그때 그 친구와 수원역에서 같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들어 그 친구가 뱉었던 말이 기억나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건 잘못되었다. 이기적이다. AK백화점 맞은편 유동량이 많은 도로 위에서 장애인들은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저상시내버스를 보급하겠다고 했던 수원시장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직관적으로 친구의 주장에 반감을 느꼈으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로에 가까웠을 것 같다) 소수(자)의 특수한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순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당파성에 매몰되어 버릴 거라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랬다. 이길 수 있는 토론, 적어도 토론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선에서 정답을 확실하게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확신이 들 때 논쟁에 참전했다. 토론과 논쟁이 ‘이기고 지는‘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의 논리를 경합시킴으로써 더 나은 문제해결이나 생각을 도출해내는 협력적 상생적 과정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생산적인 토론을 해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다들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체득했는지 상대방에게 꼽을 주고 모욕감을 줘서 할 말이 없게 만들거나 혹은 속에 천불을 지르는 데 도사여서 토론을 이어갈 수 없었다. 사실 두려웠다. 이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악에 받쳐 감정이 앞서는 말을 뱉게 될까 봐, 관조적으로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대상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숙고할 틈 없이 지지 않기 위해 말을 이어나가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내게 토론은 언제부터인가 수치심과 쪽팔림, 빡침으로 점철된 극도로 감정적인 활동이 되어 있었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고 판단되면 부당하다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반정치적, 아니 탈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을 볼 때면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이미 기존 사회의 질서에서 밀려나 동등하고 정의로운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해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하게끔 온건함과 무해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얼마나 기득권만이 휘두를 수 있는 특권적 행동인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평평하고 단일하고 균질적인 땅, 현실에 실재하는 차이와 차별이 지워진 상상적 공간에서만 능력에 따른 차등적 대우, 기회의 평등을 통한 공정한 경쟁의 정의론이 성립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와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포괄하여 동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디자인할라치면 기계적이고 납작한 공정의 논리보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정치적 상상력과 논리가 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마사 누스바움이 칭했던 ‘시적 정의‘ 같은 것.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 문장이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descriptive 수사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제시하는 규범적normative 수사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규범, 혹은 진실로부터 거의 모든 인문학적 논의가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존엄성 테제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차별에 반대해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고, 타자를 소외시키고 착취하는 폭력에 반대할 근거도 힘을 잃을 것이다. 살짝이라도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인간과 시민의 구분(발리바르, 아렌트 등 거대한 정치철학자들이 씨름했던 문제이기도 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느냐 하는 고민(‘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비판이 숱하게 이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력/학벌과 부동산 등을 통해 표출되는 민심에서 엿보는 한국적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의 자유와 평등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때(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자유가 서로 맞부딪치는 상황) ...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간‘‘자유‘‘평등‘의 개념은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사회에서 서구-백인-이성애자-남성-시스젠더 등 정상성의 규범에 맞춰 특수하게 적용된다.

이성과 합리, 객관과 보편의 자리를 자임해온 ‘남성‘의 젠더는 곧 근대성의 젠더에 다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학술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숱하게 비판해온 로고스중심주의,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 틀을 그대로 답습하여 여성혐오를 발화하고 수행하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며 온라인상에 매개된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내 생활세계에서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실감의 차원에서 여성혐오의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사실상 파시즘에 가까울 정도의 비관용성, 비타협성, 폭력성, 집단주의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어서 파시즘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평소 문학과 영화, 밈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쓰는 인친이 가끔이지만 꾸준히 파시즘 서적을 포스팅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성의 합리적 사용을 바탕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예측하여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온 근대성의 역사에서 장애는 무엇이었을까. 장애학은 더 이상 장애가 정상성에서 뭔가가 결여되거나 손실된 마이너스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규정된) 거라고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적 실재로서 장애를 바라보게끔 한다. 이는 장애가 실체 없이 언어로 규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게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 장애 여부를 판별하는 척도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이란 게 자의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일단 장애의 존재론-인식론의 기본 전제를 짚고 넘어갔으니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대상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장애인이란 존재일 텐데 <사이보그가 되다>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과학기술과 결합한 인간의 경험과 정체성, 과학기술이 장애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결합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책이다.


다만 우리는 과학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살아가고, (...) 인간인지 아닌지를 매일 아침 고민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 ‘동등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고민한 시간은 제법 길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우리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을 반추해보면서, 장애에 관한 주된 과학기술 담론이 얼마간 어떤 존재들을 더 소외시키거나 그저 소비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 불완전하고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연대와 의존을 모색하는 미래의 과학기술은 무엇일지, 그 기술은 누구의 주도로, 누구를 위해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았다. (11-12)

사이보그라는 상징은 현실과 동떨어진 SF 이미지일 뿐이며 장애인은 자신과 확실하게 변별되는 타자라고 인식 혹은 오해에 대해 김초엽이 쓴 이 구절을 제시하고 싶다. ˝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40)

이렇게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학이란 인식론적 무기를 통해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예리하게 묘파하여 ‘모든 이들의 문제‘로 문제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면서도 현실에서 소외되고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이란 사회적 소수자가 어떻게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궁구한다.

현실에서 기계와 결합한 존재란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온갖 화려한 차종으로 변신하는 모빌리티를 타는 존재가 아니라, 낡은 철제 수동 휠체어를 탄 이들, 오래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는 이들, 3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기에 접속하고 4시간씩 혈액의 노페물을 걸러주느라 스케줄 조정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63)

다시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있는,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현장으로 되돌아가본다. 이는 10여 년 전, 장애 정의를 사유할 수 없었던 ‘장애맹‘의 독자가 언어를 갖지 못해 투쟁의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차별의 언어에 대항하지 못해 위축되었던 장소이자 현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분명한 장소(104-105)‘이다. 이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이 올리는 포스팅을 지켜보며, 장애권리운동의 현장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저렇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걸 택하겠다는 발언을 들으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발로 밟아본다. 어디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땅의 지반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 대지인지를 자문해본다. 무능의 낙인을 가슴 깊이 두려워 효능감과 성과에 몰입하게 되는 세상에서 내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나‘라는 독자적인 개체 단위(허구적 상상에 가깝기도 한)에 귀속되지 않는, 그러니까 언제나 관계망에서만 발현되는 능력으로 어디를 연결하고 누구/무엇과 연립할지 생각해본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이 아니라 연립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자는 나를 돕는 활동지원사이고, 안내견이고, 휠체어이며, 보청기이고, 오토박스이고, 청테이프이고, 친구들이며, 관객이고, 독자들이다.

(...) 도무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세계과 정체성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이 ‘타자‘들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기술, 사상, 정치적 신념과 지혜의 매끄러운 질서에 오류로서 등장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그런 오류를 배제하고, 몰아세우고, 깔끔히 치료하고 쓸어버리는 대신 오류가 열어둔 이음새 사이에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타자를 돕고, 타자로서 돕고, 타자를 돕는 일을 도우며, 미래-타자의 출현에 열린 지식과 기술은 어떤 얼굴일까.(30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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