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의 0 영 zero 零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체득하고 견지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적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 개인적으로 아직 사람에 크게 데여본 적이 없는데 주변이나 미디어에서 전파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기적이고,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가스라이팅에 능한 사람(주로 애인, 친구, 가족 같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의해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는 일화를 흔히 접하게 된다. 자기애와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에 별다른 도덕감정과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소설 화자와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관계에서 위로와 연민, 동정을 보내며 우월감을 향유하다가 힘의 관계가 역전되고 나니 열등감을 못 이기고 관계를 ‘손절‘해버린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신 블로그 이웃 분이 겪은 사건이 떠올랐다. 어렵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진짜배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성장과 성취,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이-관계, 상대방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공유할 수 있는 ‘팬심‘이랄까 -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런 순수한 팬심-애정을 유지하고 키워나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배신당하거나 파괴되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자아의 안전 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납득이 되었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완전히 발거벗은 취약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돌봄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그런 ‘자기통제력‘에 대한 불안-강박을 넘어서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넘어설 수 있는 초월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에도 ... 정신이 무너져 고생했던 경험이 떠올라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과 의존, 돌봄과 우정, 마음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계속.
인간 사냥꾼이랄까, 아니면 흡혈귀 같이 타인을 착취하는 인물의 내면을 심리스릴러적 문법으로 풀어내 일단 재미 있었다. 황예인 평론가와의 대담을 읽고 나니 본문을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다. 예전에 읽은 <천국에서>와 비교했을 때 경향이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실제로 이 텀 동안 작가가 미국에 체류하며 번역을 하며 생활했다는 전기적 사실도 존재한다) <N.E.W>도 읽어봐야겠다.
-존 후퍼의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코너 중 ‘책 읽는 의자‘에 소개된 적이 있는 책. 이탈리아 여행을 대비할 겸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지리, 음식 등을 다룬 책을 찾다가 권은중(마찬가지로 <조용한 생활>에서 김혜리 기자님과 음식과 요리, 먹는 일을 다루는 코너를 맡아주셨던) 님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다음 타자로 존 후퍼의 책을 골랐다. 권은중 기자님의 책은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영향에서인지 반복되는 부분이 많은 점은 아쉬웠지만 기본적으로 ‘볼로냐‘라는 매력적인 도시를 중심으로 음식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입문자가 읽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는 좀 더 서술의 무게감과 깊이감이 있는 편이다. ‘가족‘을 중시하고, ‘음식‘에 정말 진심이고(이 둘은 강한 상호관련성을 띤다. 저녁이면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일상의 의례를 중요시한다고), 가톨릭의 영향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고, 정치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며, 행정과 법이 복잡하여 효율성이 떨어지고, 겉모습-패션과 치장에 열심이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고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남북 문제‘라는 고유의 모순을 안고 있는 나라. 부제대로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이탈리아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접했던 이탈리아 문학, 영화에 대해 뒤늦게 이해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현실과 환상(판타지아)의 경계가 확실치 않고, 진실verite이 단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상대적인 버전으로 복수의 진실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 이런 일반화에는 항상 오류의 위험이 따르고, 또 저자의 포지션이 영국 출신으로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탈리아 란 걸 감안하고 수용해야겠지만 -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다시 읽으며 새삼 신기했던 부분은 이탈리아식 ‘기사‘의 문체와 형식. 일반적으로 ‘기사‘하면 정확한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한 글을 연상하겠지만 이탈리아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성이 강하다고 한다. 핵심 정보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초중반부에 썰을 많이 푼다고...
관심 있는 나라를 이런 식으로 다룬 책을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일단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정도.
-녹색 계급의 출현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이은 라투르의 생태정치학 저작들. 이음 출판사에서 내는 과학잡지 <에피>에 ‘인류세‘ 코너도 있고,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 연구센터장의 글도 자주 실리는데 라투르의 근작들도 이음에서 발빠르게 번역돼서 참 고무적인 부분이다. <녹색 계급의 출현>은 라투르와 슐츠(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작업을 했듯)가 쓴 녹색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이었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위계를 철폐하고 ‘지구생활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던 라투르는 이 책에서 ‘신기후체제‘의 파국적 위기에 맞서 대항할 주체화의 계기로 ‘계급‘을 (재)소환한다. 근데 여기에 ‘녹색‘을 곁들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생산력주의에 갇혀 있었고, ‘진보‘ ‘발전‘ ‘풍요‘ ‘확장‘의 구호가 아닌(이를 통한 해방은 공멸적 파괴와 다른 생명체에 대한 파괴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 되어 진정한 해방일 수 없기 때문에) 지구의 거주가능성-생존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감싸기‘의 생태정치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메모 형식이라 시론적, 선언적 성격이 강한데 오히려 그래서 사고를 촉발시키고 연결시키는 면모가 크기도 하다. 네 편의 해설 모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견지하여 이 선언문을 어떻게 활용/사용할 지에 대한 방향을 잘 제시한다. 선언문이라 그런지 읽다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모먼트가 존재한다.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에 제시된 <숲은 생각한다> <반려종 선언> <부분적인 연결들> 포스트휴먼, 신유물론, 과학기술학 저서 리스트로 공부를 이어가면 참 좋을 텐데... 혼자 읽기엔 좀 빡셀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