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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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야간근무 설 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 읽은 날과 읽지 않은 날의 피로도가 확연히 차이 난다는 걸 체감한 결과였다. 비몽사몽 상태로 졸다가 멍때리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식으로 2시간을 ‘허비‘하는 게 졸린 눈을 비벼 정신 차리고 꾸역꾸역 책을 읽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뛰어넘어 다음 장을 빨리 넘기고 싶은 책이 등장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읽는 수밖에. 언제 어디서든. ​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을 읽었다. <마음 사전>과 10년 터울의 자매와 같은 책이라고 시인 스스로 설명했는데 내게는 한참 어린 동생 격인 <한 글자 사전>이 구면이어서 더 친숙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종각역의 반디앤루니스(종로서적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에서 처음으로 문예지를 읽었다. 문학동네, 창비, 자음과모음, 문예중앙, 오늘의 문예비평, 21세기문학 등등... 당시 재학 중이었던 학교도서관에 구독 중인 문예지보다 더 다양한 종수를 구비하고 있었고, 2-3시간 정도 서점에 머무는 동안 읽기에는 단행본보다 문예지 쪽이 적합했다(현대문학 핀 시리즈나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또 달랐을 지도... 여튼). 계간이라는 시간 텀, 시 소설 산문 비평 이론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이 총망라되어 있는 장르의 잡스러움(잡지다움), 듣도 보도 못한 신인작가의 등단작부터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가들의 최근 발표작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다는 신속성 등 문예지 읽기는 꽤 흥미로운 활동이었다. 문예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사뭇 진정한(?) 한국문학 독자가 된 것 같은, 사실 그보다는 진정한 문창과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문예지들이 폐간되고(혹은 편집위원들이 교체되고) 신생 문예지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전, 황혼의 시간대에 기존 문예지 체제의 마지막 독자가 된 것이기도 했다. 그때 챙겨 읽었던 연재 코너가 몇 가지 있다. 故 황현산 선생님의 로트레아몽 번역, [21세기문학]의 청탁받은 작가가 자율적으로 꾸렸던 코너(한유주의 글이 흥미로웠던 기억), [오늘의 문예비평]에 연재되었던 김경식 선생님의 루카치에 대한 글(아마도 이 초고를 바탕으로 <루카치의 길> 단행본이 탄생한 거라 짐작된다), 그리고 문예중앙에 연재되었던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 두툼한 두께와 부피를 자랑했던 문예중앙에서 ‘한 글자 사전‘이 거의 말미에 배치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뷔페에 와서 시 소설 평론 종류를 가리지 않고 탐식한 뒤에 식사를 마무리하는 디저트와 같았던 한 글자 사전.



2014년 그 해에, 아니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게 가장 감명 깊고 충격적이었던 낭독의 경험은 2014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접한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와 김소연의 <수학자의 아침> 낭독이었다. 작가가 낮은 목소리로 일정한 리듬과 속도를 유지하며 읽은 <불가능한 동화>는 내가 평소와 같이 천천히 묵독했더라면 아마 감각하지 못했을 것들을 머릿속에 현현시켰다. 문체의 리듬, 사유의 리듬에 접속했을 때에만 감각할 수 있는 미묘한 텍스트의 질감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텍스트를 시 읽듯 가장 느리게 읽어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각 텍스트에 맞는 사유의 속도와 리듬에 도달해야만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팽팽하게 당겨진, 기분 좋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정신으로 텍스트를 소화할 때의 자릿함, 지적 흥분과 열기 같은 것이 그 순간에 있었다.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를 구축한 작가를 읽어낼 때, 말하는 입을 활용해 문장이 음악이 되게끔 소리내어 읽고 호흡하고 멈추며 내 몸으로 문장과 부딪쳐보면서 문체에 내재된 작가의 육체성을 경험하는 방법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 낭독.



일상에 안개처럼 퍼져 있던 외로움이 응결돼 단단한 얼음과 같은 고독이 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정작 자기 마음과 욕망을 알지 못했던 어긋남의 상태에서 오롯이 마음과 대면할 수 있었던 시간

익숙한 언어로 가장 낯선 감각을 일깨우고, 감정 이전의 감각의 화학 작용을 일으켜 마음을 운동시키는 서정의 힘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날.



이 날 이후로 최애 시인 리스트에 김소연을 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학자의 아침> 이후에 나온 <i에게>도 너무 좋았던 탓에 이 결심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뮤지션 최고은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두 사람의 우정 또한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오늘의 난 미지근하게 축제]의 책 소개는 다음과 같다(알라딘 제공)



˝싱어송라이터 최고은과, 시인 김소연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들어 낸 아트북이자 새로운 음악책의 형태 뮤키디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가꾸어나가는 ‘우정스러움‘을 주제로 한 이 작업은 우정을 지켜내기 위한 각자의 내면을 다듬는 일상적인 모습들이 조화롭게 묘사되어 하모니를 이룬다.˝



정가 33,000원이지만 사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개인적으로 김소연 시인의 이미지를 한 장 간직하고 있다. 2016년 가을 경이었을까. 학과에서 외부 시인을 초청하는 행사를 마련했고, 내 추천/의견이 반영됐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김소연 시인이 먼 걸음을 해주셨다. 행사가 끝나고, 교수님을 포함해 시 동아리 멤버들이 주축이 된 무리가 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김소연 시인의 열차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채식을 하셔서 그랬는지 고깃집(이라고 기억하고 있다)에서 샐러드 혹은 밑반찬을 조금 들다가 금방 일어서셨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적은 양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 시인이 <경배>를 쓴 시인이 맞구나 싶었다. 시인과 시가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소연, 진은영, 심보선. 좋아하는 시인의 목록에 (여전히) 가장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시인들. 곧 있으면 진은영의 신작 시집(무려 10년 만에!!)이 부대에 도착할 예정이다. <한 글자 사전>을 읽고 나니 김소연 시인의 글을 더 읽고 싶어져서 다른 산문집을 읽을지,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할 예정. 심보선 시인의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와 <오늘은 잘 모르겠어>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집도 따라읽고 싶지만...(투명도 혼합 공간 등등) 좋아하는 것들을 충분히 좋아하고 난 다음이어도 늦게 않을 테다.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한 글자 사전>, p242)







동지와는 사소한 이견을 좁혀나가기 위하여 논쟁을 한 이우 옹호로 귀결되어야 옳고, 벗과는 사소한 이견으로 대화를 농밀하게 만든 이후 다름에 매혹되어야 옳다(172)







시스템 바깥에서 끼리끼리의 유대로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정말 하고 싶던 방식으로 그 일을 하고, 정말 되고 싶던 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이런 일만이 이 시대엔 유일한 궐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59)







우리가 가장 믿고 사는 이것. 우리가 가장 숭배하고 사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큰 실망을 주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다양한 실망을 주는 이것. 그리하여 가장 연연하는 이것. 하여, 몸은 우리에게 말한다. 몸의 언어로. 몸의 방식으로. 몸으로써.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감각‘이며, 감각에 기대어 몸의 언어를 듣는 일이 ‘아픔‘이며, 몸의 언어에 화답을 하는 일이 ‘통증‘이며, 몸이 자신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 ‘회복‘이다. (148)







가장 순정한 말은 오로지 한 음절로 이루어진 감탄사다. 가장 나약한 말은 남을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조차 기만하는 저짓말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입증하고야 만다. 가장 허망한 말은 사랑을 맹세하는 말이지만, 그 허망함은 너무도 허망한 나머지 이상하고 야릇한 굳건함이 있다. 가장 영리한 말은 무수한 대화 끝에 매달리고야 마는, 자신의 허위를 자조하는 말에서나 가능해진다. 가장 아둔한 말은 누군가를 꾸짖는 말이다. 무섭게 가르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이 닫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무서운 말은 정확한 말이다. 가장 정확한 말은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집약적으로 초점을 맞추며 감정을 싣지 않기 때문에 냉혹하다. 가장 가난한 말은 말을 많이 하는 자의 입속에서 나온다. 가장 현명한 말은 그 말을 듣는 자가 듣고 싶어하던 말일 뿐이며, 가장 진실된 말은 말로 하는 순간 추레해질 뿐이며, 가장 영롱한 말은 했던 말들을 모두 부정하는 말일 뿐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 차라리 신음이거나 비명이며, 신음과 비명 너머에서 가다듬어 하는 말은 기도와 겨우 가까워질 수 있다. 말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을 비집고 생성되는 뜬금없는 농담의 말과 뜻 없이 손을 흔들며 건네는 인사말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언제나 반갑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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