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여행 에세이가 땡겼다. 때마침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가 병영도서관에 꽂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여행할 권리>였는지 다른 책이었는지 헷갈리는데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휴식차 들렀던 카페에서 재밌게 읽은 적이 있어서 안심하게 선택했다. <언젠가, 아마도>는 여행잡지에 연재한 쪽글을 모아놓은 형식이다 보니 그때 읽었던 책에 비해 한 꼭지의 분량이 적어 아쉬웠다. 대서사시-대하드라마까진 아니더라도 드라마, 영화 한 편 정도의 스케일과 길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릴스 수준이었다. 하지만 짧은 분량에서도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거나 생각을 자극하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프로작가 김연수의 탁월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이 양반은 프로여행가였다.



부대에 여행 잡지 트래비가 들어왔다. 태국 방콕, 일본 훗카이도, 샌프란시스코, 튀르키예, 정원을 감상하기 좋은 국내 카페, ‘먹는 것에 진심인‘ 걸로 평가받는 호텔의 뷔페와 디저트, 국내 섬여행 등을 다룬 권호였는데 재밌게 읽었다. 예전에도 들어온 적이 있었을 것 같은데 다른 권호도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읽다 보니 전역 이후 배낭여행의 행선지를 이탈리아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의 심정과 기분, 욕망에 따라 여행지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섬에서 혼자 삼시세끼를 찍고 싶어질 수도 있고, 유럽 대신 동남아에서 좀 여유 있고 풍족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여행 텍스트를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여행 에세이 추천해주세요 ~~(문인이 쓴 여행 에세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나 김훈의 자전거 여행 같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머물 때였다. 거기서 나는 망명 작가 놀이를 하면서 지냈다.

(...) 길바닥에는 사각형 돌이 깔려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차와 차와 개와, 그리고 이슬람군과 십자군과... 또 뭐가 있을까. 아무튼 그 길로 다녔을 법한 모든 것이 지나간 덕분인지 불빛을 받은 돌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밤의 골목은 차도르를 입은 소녀의 두 눈동자처럼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알바이신 언덕에는 그런 골목이 흔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길인지라 반짝임에 이끌려 무심결에 발을 들이고선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나오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라나다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되돌아나온 골목이 얼마나 많은지! 거리를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카푸치노 한 잔이면 충분하다. (...) 고개만 들면 거기에 밤의 알람브라 궁전이 있으니까. 내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몇 개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불 밝힌 알람브라를 올려다보는 건 꼭 그 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

(29-31)



<사막조차 피로 물드는 시대의 도피처>



오래전부터 혼자서 썼다 지웠다 하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2차 진주성 전투에 관한 부분이 있다. 성이 함락되고 살육이 모두 끝난 뒤, 죽은 자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일어나 6만여 명이 살해된 풍경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소설을 썼다 지웠다 할 수밖에.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진주성을 앞으로 또 몇 번이나 더 가게 될는지.

이미 한 번 이상 본 전시물들이라고 생각하고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시가 눈에 띈다. 본 기억이 나지 않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몸이여, 오사카의 화려했던 일도 꿈 속의 꿈이런가.‘ 분한 마음이 남아서 6만여 명이나 죽이면서 살아온 한평생이라면 여한이 없노라고 말할 것이지, 꿈 속의 꿈이었다니. 그나마 교훈 하나를 남기고 그는 죽었다. 모든 억울한 백골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 결국 그도 죽었다는 것.

(...) 오히려 나는 몸이 죽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알 것 같다. 서른아홉 살에 나는 사막을 처음 봤다. ˝이런 게 사막이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막‘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실재가 내 눈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뭔가‘가 내 눈앞에 있었다.

혼자서 몇 개의 모래언덕을 넘어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어디를 바라봐도 풍경이 똑같아서 차라리 어떤 풍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나왔다. 거기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말하자면 내가 살던 세계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감각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과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구분하지 못하리라는 것. 그러므로 육신이 죽을 때,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한순간 이 세상은 사라지리라는 것.

사막이란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죽음을 경험해 육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려는 은수자들은 자발적으로 사막을 찾아갔다.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둔황에서 터키 중부까지 그들의 흔적인 석굴 유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어서야 알게 된 진실을 살아서 경험했으리라. 그래서 그런 은수자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 악은 결코 다른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든 그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제거하라. (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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