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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담 : 한정판 (2disc)
이현주 감독, 이상희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작년에 인디스페이스에서 본 직후 작성한 메모. 올해 초 영상자료원에서 감독, 주연배우 두 분과 함께 GV 행사가 있음을 확인했으나 결국 가지 못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더불에 작년에 봤던 '독립'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은 영화. 웬만하면 예전에 쓴 글을 건드리지 않는 편인데 인스타그램에 직접 한 자 한 자 적느라 비문이나 눈 뜨고 봐주기 힘든 부분이 있어 손을 좀 봤다.

1 재작년 여름 어느 시인의 특강을 들었다. 시인이 출강을 나가는 예대에서 수업하는 방식과 같은지 다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뭔가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문장을 어떤 식으로 쓰라 일차원적으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지, 감각의 사용법과 시의 구성원리가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시인은 얘기들(학생들을 이렇게 부르신다)에게 연애를 권한다고 했다.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애인이 자주 바뀌는 사람을 지칭했는지,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만드는 소모적 관계양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을 지칭했는지 제3의 다른 무엇인지... 그때는 연애 잘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조차 안 잡혔는데 이제 좀 알 것 같다. 자기 욕망을 잘 알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 자기랑 잘 맞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사람, 잘 반하고 잘 거기서 빠져나오는 사람, 뭐 다 틀린 소리일지도 모르겠으나 내 생각은 그렇다. 연애를 잘한다는 것은 무튼 한 사람과 오래오래 잘 사귀는 것보단 다양한 사람과 사귀면서 자기를 알아가고 자기 욕망과 윤리적인 ㅡ 진실된 관계를 맺는 사람일 것 같다.

 

2 연애담에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눈에 띠었다. 연애 유경험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애'담'이라는 평가는 그만큼 영화가 연애의 보편적인 특질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이동진 평론가가 <캐롤>에 있어 루니 마라가 케이트 블란쳇에 끌리는 과정이 물리학적 법칙에 따른 역학적 운동인 것 같다는 인상을 표한 바 있듯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연애에는 뭔가 인간의 주관을 초과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캐롤> <연애담> 영화들을 한 줄에 놓고 보니 공통점이 드러났다. 개방적이고 능동적이고 화려한 이가 자기 삶에 손써볼 방법 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폭풍 같이 사랑에 빠져 열병을 앓다 이별을 경험하지만 이로 인해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는 주체화를 통해 <캐롤>, <연애담>에서처럼 자신을 버린 연인과 재회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사랑을 예감하게 만들고, 사랑이 회복되지 않더라도 우주적 충돌collision에 버금가는 만남의 파장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 축이 크게 이동하는 결과를 낳는 식이다. 세 영화를 바탕으로 사랑에 빠지는 공식을 추출해볼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상대적인 차이의 관계에 따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공식화한다면, 즉 성격 등 범주를 구분해 혈액형보다 좀 더 과학적인 연애학을 기술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 인간학이라면, 무엇보다 과학적인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잉여가 남는 사랑을 다루는 게 예술의 소명이라면 양운덕의 <사랑의 인문학>처럼 문학적 감수성과 미학적 통찰력을 갖춘 글이 뇌과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다른 분야보다 더 뛰어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언제나 패턴을 탈구축하는 사건적인 성격을 띠더라도 사랑을 더 잘하기 위해, 사랑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되어야 하고,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 이럴 때 <사랑의 단상>의 구절을 인용해주면 딱 좋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말고 아는 게 없으니... ㅠㅠ -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세 영화 모두 레즈비언 퀴어 ... )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세 영화의 관계적 양상-역학과 내가 경험했던 연애가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아델-테레즈(루니 마라)-윤주(이상희). 그중에서도 학교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의 인간관계도 겉으로 보기에 원만해 보이지만 어딘가 결정적인 하나가 빠져 무료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윤주. 나 또한 윤주처럼 관계에서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노력하면 될 거라는 순박한 믿음을 가진 미숙한 노동자. 하지만 연애에서 진심을 더 많이 보여준 사람이 더 다친다는 말이 있듯 연애에 있어 성실한 노동은 사랑의 수확으로 이어지지 않는 편이다. 사랑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의 열렬한 구애에 결국 월계수 나무가 되어버리는 선택을 한 다프네의 비극적인 일화처럼 노동과 교환의 원리를 초과하는 소비와 탕진이 지배하는 에로티즘의 세계에서 힘을 써야 할 때 쓸 줄 알고, 빼야 할 때 뺄 줄 아는 기술자나 다른 방식으로 힘을 다루는 예술가들이 우세종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성실한 노동자들끼리 만나거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확고하게 감정을 주는 이에게 끌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연애에 있어 권력 차이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면서 사랑의 유지를 위협하는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 있다>일 것으로 기억되는데 박준 시인은 마음들 사이 편차-권력 차이의 양상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를 소묘한 바 있는데 범박하게 말하면 처음에 감정의 편차가 존재하더라도 '썸'타는 과정에서 혹은 연애 초기에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야 행복하고 건강한 연애로 진입할 수 있는데 더 좋아하는 쪽과 덜 좋아하는 쪽의 불균형적 구도가 역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면 서로 힘들어지는 소모적인 관계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노력을 하면 될 거라 믿고 열심히 사랑을 퍼붓는 쪽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맺히는 건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순애보적 사랑의 투사라기보다 사랑을 구걸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로 비치는 걸인에 가까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상대에게 이별을 먼저 고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짓되고 위선적인 태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착취하게 되겠지...   

윤주는 자기 마음 전부를 지수에게 쏟으려 하지만 지수는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연애감정에 적절하게 반응한다. 지수가 감정을 장악하고 컨트롤하며 감정의 격류 위에서 서핑을 하는 격이라면 윤주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아이처럼 지수의 사랑을 갈구한다. 지수에게 윤주는 일상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이지만 윤주에게 지수는 전부다. 비대칭적 관계는 더 사랑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덜 사랑하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지수는 윤주가 채워줘야 할 마음의 몫까지 자기 것을 쏟아 부으며 힘들어하고, 윤주는 내려가지 않는 시소 위에서 권태를 느낀다. 연애 초기의 좋기만 한 순간이 지나가자 서로의 차이가 수면으로 부상하고 더 사랑하는 이는 고통이 자기의 몫임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의 가시화 자체는 관계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문제는 관계의 비대칭성이 적당한 수준일 때 이해와 타협을 통한 차이의 평화적 조정이 가능하지, 비대칭성이 심하면 차이는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다툼이나 한쪽의 희생이 강요된다. 이 비정한 파워 게임에서 역전의 순간, 밀당의 변증법적 운동, 상호배려가 수반되지 않으면 사랑은 점점 파괴적으로 바뀐다. 타인을 집착하고 소유하려 들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거나. 지수가 만취해 집에 들어온 다음날 윤주는 지수가 전날의 일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직감하지만 추궁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사랑에 자신의 전부를 내던졌지만 그럴수록 식어가는 지수의 마음에 상처받으며 만신창이가 된다.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온 윤주가 저렇게 태어나서 저렇게 살아온 지수와 사랑하면 다르게 사랑할순 없었을 거라고. 첫사랑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흑역사로 생명을 마감하듯 지수의 마음은 별다른 사건 없이 식고, 윤주는 다시 아이였던 때로 돌아간듯 엉엉 울고. 지수에게 윤주는 연애상대 중 하나,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대상 혹은 외로움을 달래고 즐거움을 주는 상대였지만 윤주에게 지수는 대문자 애인, 자신의 사랑을 총동원해 전면전을 치뤄야 하는 대상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고 여자는 사랑받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는데 윤주와 지수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윤주와 지수가 레즈비언 커플이란 점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내가 마음이 끌리는 부분은 '연알못'과 '연잘알'의 연애, 그리고 그 연애의 수많은 내용을 특정한 의도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배열해 '연애담'으로 서사화하는 방식이었다. 윤주는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불쑥 등장한 윤주를 앞에 두고 고뇌한다. 배우 이상희는 표정으로 언어화될 수 없는 복잡하고 격정적인 내면을 그려낸다. 느리지만 진득하고 우직하게 오래 머무르는 내향적 인간... 미련하지만 차분하고 깊은 사람. 영화 마지막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기만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는 윤주를 보며 그녀가 앞으로 더 좋은 사랑을 하고 더 좋은 연인이 될 거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지수처럼 감정을 잘 표현하고 많은 사람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적확하게 써내려갈 것 같았다

3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쓰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윤주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듯 나 또한 친구들과 통화를 하며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상황을 납득하고자 했다. 우리가 주고 받았던 모든 말과 행동,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끝마치고 나면 헤어지자라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 올라왔다. 단념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어떻게든 매달려서 붙잡아야 하는 게 아닌지. 단념할 때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봐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닌지, 이별통보의 인풋에 단념이란 아웃풋이 별다른 중간과정 없이 바로 산출되는 게 맞는 건지... 내가 보기에 애매모호한 말들을 상대방에게 해석해달라고 부탁하고, 네 생각은 네 한정적인 경험세계에 근거한 주관적이고 견해에 불과하다고 윽박 지르며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친구가 풀어준 문제의 풀이과정을 되뇌이며 ... 친구의 시각에 입각해 카톡 대화 내보내기를 통해 얻은 텍스트들을 다시 읽고, 기억을 소환해서 재판에 세우고,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날 사랑하긴 했었는지는 여부는 차치하고, 현재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사실로 구성하고, 지금까지 숱하게 해왔던 것처럼 이 또한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노력들을 수행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별에 대처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어야 하는지, 끝없이 찌질해지는 속마음을 토하듯 후련하게 까뒤집어야 하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람으로 사람을 잊어야 하는지, 자해나 자살 같은 생각이 병리적인 낭만성의 소산이라는 판단을 거부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 나만큼 아프게끔 상처를 줘야 하는지... 썼다. 적었다. 그러면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쓰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씀으로써 내가 노트북 화면에 글자들이 적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누구도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더 이상 마음을 내비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동굴에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근신하면 되니까. 내가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던 건 산문으로도 커버가 되었기 때문일까. 결국은 납득을 했기 때문일까, 납득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때 쓴 글을 다시 읽지 않았다. 읽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니까. 단지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기 위해, 고통을 멈추고 지연시키기 위해 쓴 글이었으니까 제 역할을 다해 명이 끊어진 셈이었다.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이 지나 만남을 가졌고, 대화를 나눴고, 헤어졌다. 이별이 모양새를 갖추고 완성된 기분이었다. 만나줘서 고마웠다. 나 또한 이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줘서.   ​

​권희철의 낭독으로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몇 번 들었다.

<이별의 능력>을 몇 번 읽는 동안 누가 낭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애담>을 보며 이별의 거푸집을 만들었던 것 같다. 사실 거기서 논리적인 완성은 끝났지만 '실감'이 필요했기에 '마지막'이란 기치를 내걸고 만남을 가졌다.

돈 키호테의 식탁 방문기. 단체손님을 제외하고 첫 손님이라 해서 엄청난 서비스를 받았다. 소주를 마시면 홍상수 영화 속 찌질남을 재현할 것 같아 두려웠는데 식당의 품격이 찌질함을 봉인시킨 것만 같다. 다행이고 다행이다.(2016/12/16)  

릿터 3호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랜선 ㅡ 자아. 블로그를 열심히 하던 시절 친구와 나누던 얘기에서 이미 나온 개념이었다. 망각될 권리,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 제기 ㅡ 환기한 데이터화된 기억의 무한복제 가능성... 리벤지 포르노가 끊임없이 웹하드에 올라오고, 피해 당사자가 업체에 문의해 삭제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의 반복, 악무한. 술 먹고 트위터에 쓴 글이 계속 올라오고 '실수' 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 실수가 미디어 인민재판을 통해 세속적 차원에서 죄로 격상되는 상황. 글자 하나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강해서 그동안 sns에 긴 글 쓰기를 주저했다. 줄창 일기와 편지만 쓰다가 지치고 심심할 무렵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아마 최종적으로 블로그에 정착하겠지만)

예전에 좋아했던 친구와 1년 4개월 만에 만났을 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에게 니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 내 얘기를 왜 많이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는 '선'을 지켜가며 얘기했고, 공동의 기억이다 보니 내 얘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네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녀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 실패해 테러에 가까운 폭로나 범죄행위로 이어지는 사례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고전적 테제를 바탕으로 생각을 펼쳐나가고 싶다.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한다 는 루만의 체계이론도 흥미로운 아이디어 박스이다. 오늘날 미디어 플랫폼, 거기에 따른 글쓰기 및 정보의 유통방식, 시공간의 재구성, 이미지와 영상언어의 패권적 지위... 연애담을 보고 든 생각은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였으나 역시 그건 힘들 것 같아 연애를 하게 된다면 잘하자 로 바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좀 더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갖는 것? 낯선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짝을 찾아 나설 것? 내 욕망 ㅡ 무의식에 대해 더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것? 미용과 운동에 신경 쓰는 것?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습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기회가 희소하게 찾아오고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어마어마한 비경제적인 게 연애 ㅡ 사랑 말고 또 있을까. 직장인의 연애와 대학생의 연애는 연륜이나 경험을 배제하고 시스템상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사치, 사치롭기에 자신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청춘의 사랑. 연애하는 동안 '그녀her'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역시 좋은 영화였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랑, '에로스의 종말', 부정과 타자성이 빈사상태에 이른 안전한 만족과 쾌락의 교환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시대의 사랑. 개인적으로 영화 그녀가 퀴어 버전으로 나왔다면 또 어땠을까 싶다. 암튼 개인적으로 연애담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보다 좋았다. 좀 더 담담하게 감정을 꼭꼭 담아놓은 영화. 근래 본 베드신 중에 거의 최고 수준의 에로티시즘이 넘실대는 영화. 감독의 차기작과 윤주 역의 이상희 씨의 다음 작품을 찾아볼 것이다...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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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나라 혹은 선진국에 가면 그 나라의 좋은 면이 부각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편파적 관점이랄까. 적어도 내게는 독일이 각계 각층 인사들이 롤모델로 꼽는 킹왕짱 나라로 지난 몇 년 동안 회자되었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은 독일 대학의 학비와 유학생에 대한 독일 정부의 대우를 높이 샀다. 아이를 낳았을 때 지원되는 생활비, 보모 는 처음 들었을 때 꽤 쇼킹하기까지 했다. 비정상회담의 다니엘을 통해 노잼 이미지가 굳어지긴 했지만 아무말대잔치와 어그로 키배로 얼룩진 온라인상에서도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합리적인 토론을 이어가는 성찰적 면모가 한국에 비해 두드러진다고 하니 역시 칸트의 나라-철학의 나라라 불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은 공무원 생활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번역가로서 삶을 개척한 배수아 의 도시로, 유럽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고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핫한 곳으로, 페이스북 포스팅에 따르면 성폭력 또한 제일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지인이 베를린에서 1년 정도 생활을 하면서 만든 팟캐스트를 통해 베를린이란 도시와 베를리너로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집값이 비싸져 다른 도시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은 베를린에서 프랑스인 룸메이트와 함께 지냈는데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며 클럽으로 출퇴근했던 그녀의 마음이 이제 조금 이해될 것 같다고, 자기도 또 한 번 기회가 된다면 혹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문화예술의 도시, 가장 리버럴한 도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글로벌한 공간, <생각은자유>에 그려진 베를린 또한 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2 연구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1년 동안 생활하게 된 극작가/교수와 배우 부부(아마 아내가 배우였던 걸로 기억). 전반적으로 연극은 이 여행-체류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외국에 나오자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좀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독일사회를 거울 삼아 한국사회를 바라보게 되는 구도는 내게 굉장히 익숙했다. 싱가포르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나가야만 내부가 보이는 안과 밖, 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적 운동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싱가포르에 있는 한 달 동안만큼은 한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치, 사회 면의 기사들이 알게 모르게 행사하던 중력으로부터 풀려나 부분적 무중력 상태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무관하다는 느낌 - 마치 이전에 신자유주의 사회가 각자도생하게 만듦으로써 개인으로부터 공동체적 감각을 박탈시킨다는 지적, 바로 상대방의 고통과 불행이 나와 '무관'하다는 감각을 만든다는 지적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세 번째 출국만에 1달이란 생활 리듬이 교체되는 기간 동안의 타지 생활을 통해 모국어-모국과 이어져 있던 심리적, 정신적 탯줄이 끊어진, 실은 끊어진 건 아니지만 너무 익숙해져 느껴지지 않았던 텐션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의식한 순간이었다. 어쨌든 나처럼 고국에 대한 관심에서 풀려나는 경우와 외국으로 유학 간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이 종종 보인다는 '애국심 포텐'이 터져 정신적 고아 상태를 상징적 아버지와의 유대를 통해 극복하는 경우 두 가지 유형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애국심 포텐'이라 희화화시킨 감이 있지만(사실 극중에서 한인협회 관련 이들을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감이 있다. 보수라기보다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국뽕으로 말이다.) 사실 공동체적 감각의 각성은 중요한 문제이다.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경계가 해체되고, '한민족' 감각이 피부에 뿌리내린 세대들이 다 가고 나면 어떤 구호와 논리와 감각으로 우리가 공동체임을 자임할 수 있을까, 연대할 수 있을까. 물론 아직까지 민족주의의 문화적 유전자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미가 보이지만 베를린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304켤레의 구두 퍼포먼스를 하고, 탄핵 정국에서 시위를 하는 등 이역만리의 타지에서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시민권 여부를 떠나서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했다손 치더라도) 공동체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공동체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 다르게 상상된 공동체가 어떻게 도래할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3 ​혹자는 이 연극이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쳤다고 평가했는데 나 또한 일기와 기사의 조각들을 이어붙인 에세이 혹은 다큐멘터리를 읽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연출가/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걸 일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서술한 감이 있어 좀 더 작가적 관점이 투영되어 입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았다. '생각은 자유' 구호가 결과적으로 너무 나이브하게 들렸달까. 그건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작가이자 시민으로서 개입하려는 연출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문매체에 기고를 하고, 퍼포먼스를 조직하고 등등) 한 발짝 뒤에 서서 관찰자의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였달까. 한마디로 일반적인 의미의 '연극적'이지 않은 연극이었다. 다큐멘터리 연극 장르를 표방했다고 하나 지식인의 고뇌를 바라보는 관객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니 수평적, 민주적인 소통이 어려웠다고 할까. 가장 민주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연극의 장점이 어떤 부분에서 발현되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는 시간이 처지고 지루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이렇게 극적 사건 없이 일정한 톤으로 이어지는 연극치고) 소소한 재미와 유머가 흘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지난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가 함께 지나온 자리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s 그러고 보니 베를린'자유'대학... 베를린이란 도시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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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대로 일단 정리해보았다. 본격적으로 꿰 맞춰서 쓸 지는 미지수...

 

1 Bifan 최대의 화제작이라 불리는 영화를 이제 봤다. Bifan 당시 예매를 했음에도 날씨 영향인지 기분 탓인지 표를 취소했다. 6천원에 괜찮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9천원에 맨 앞줄 구석에서 봤으니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꽤 '힘든' 영화였기에 bifan 때 무리해서 보러 가지 않은 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시놉시스만 보고 스토리를 예상해보았다. '채식주의자였으나 자신의 숨겨진 식인 욕망을 우연히 깨닫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영화' 라 하길래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으로써 채식을 고수하는 이가 식인의 욕망에 눈을 떠 실재를 가로지르는 윤리적 전회를 경험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예상해봤다. 돼지가, 소가, 닭이, 오리가, 인간들의 인식론적 망에서 '고기'라 통칭되는 물고기가 맛있어서, 팍팍한 세상에 먹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욕망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충실성으로, 골고루 먹는 게 건강에 좋다는 이데올로기적 냄새를 풍기는 말을 어설픈 알리바이로 삼아,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기에 먹는다는 육식의 논리에 동물이면서도 '인간'이라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외부로 설정되어 있던 식인을 이성의 법정에 회부하는 방향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그렇다면 굳이 식인이 아닌 육식을 소재로 삼았어도 충분했을 테니까. 그래도 결과적으로 채식으로 인해 억압되어 있던 본능이 깨어나면서 폭주와 탈주가 이어질 거란 예상 정도는 들어맞은 듯하다

3 본격적으로 스포일러가 포함된 영화 내용을 다뤄보기 전 <로우>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축약해서 표현한다면 왓챠에 베스트 코멘트로 올라온 것처럼 ‘금지된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 공동체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빼놓을 수 없지만 <로우>는 무엇보다 자매의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 집안의 주인공은 매쉬 포테이토에 들어간 고기에 구역질을 한다. 채식 내력이 꽤 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은 수재라 불린다는 점이나 아직까지 성경험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일탈하지 않는 모범생으로 자랐을 거라 예상된다. 수의사를 키우는 대학교에 입학한 그녀를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토끼 생간을 먹으라고 하자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히고, 이를 증명해줄 증인으로 언니를 찾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언니는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잡아떼며, 생간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동생에게 토끼 생간을 먹으라고 부추긴다. 먹지 않으면 왕따가 될 테니 눈 딱 감고 해치우라고. 억지로 먹은 생간이 부작용을 일으켜서인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고생한다. 내장이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룬 이후 주인공의 몸은 스위치가 켜지듯 동물적인 본능이 날뛰기 시작한다. 새벽에 허기를 느껴 새벽에 생고기를 뜯어먹고, 왁싱을 하다가 그동안 쌓였던 언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짜증의 발길질이 낳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잘린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이내 씹어 먹는다. 족발이나 닭발이랑 비슷해 보이는 ... 이때 Jim Williams의 사운드트랙이 하드캐리하는데(유튜브로 검색해서 다시 들었는데 온몸이 소름이 쫙...) 전자 파이프오르간 소리라 추정되는데 파이프오르간의 종교적인 느낌을 컬트적인 분위기를 입어 굉장히 오묘하고 역설적인 감정을 촉발시킨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감정을 고조시키는데 장엄하고 숭고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펐다. 축복이자 저주인 여성괴물의 탄생.

손가락이 잘린 걸 보고 기절한 언니는 동생이 자기 손가락을 먹는 모습을 오히려 덤덤하게 바라본다. 가족 내에서 별종이었던 장녀 언니와 꽃길만 걸었을 수재 동생, 자기 욕망에 먼저 눈을 뜨고 동생의 개안을 도와주려 하지만 호의적인 뜻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언니와 자신을 안전한 세계로부터 추방하는 데 앞장서는 것 같아 원망스럽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언니에게 기대는 동생.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동생이 좋아하는 게이 룸메이트를 먹어버린 언니를 차마 죽이지 못한 건 혼자 남겨질 세상이 너무 외로울 거란 자각에서였을까. 자매와 게이 룸메이트가 그리는 삼각형은 세즈윅이 얘기한 호모소셜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삼각관계가 말 그대로 삼각형의 역학적 구도를 띠고 있다면 남성 연대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함으로써 그 혐오와 구별짓기의 동일한 거리를 공유함으로써 친밀성을 구축하는 이등변삼각형 같은 꼴이 아닐까 싶다. 왜 하필이면 언니는 동생이 좋아하는 게이 룸메이트를 먹어버린 걸까? 배가 고파서, 는 아닐 테고 실은 자신도 게이 룸메이트에게 감정이 있어서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동생에게도 줄 수 없다는 심리가 발현된 걸까, 동생이 자립하길 바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품을 떠나지 않았으면 애착으로 인해 사랑의 경쟁자를 해치운 것일까, 동생이 먹어버리기 전에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먹어버린 것일까.

 

4 자매만의 케미와 더불어 타자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매, 형제, 남매, 누나-남동생, 오빠-여동생, 연년생, 쌍둥이, 두 살 터울, 10살 터울, 이복형제, 장남/녀인지, 막내인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이란 관계는 참으로 미스터리한 것 같다. 혹자는 가족을 가장 가까운 타자라 칭한 바 있는데 이는 앎과 무지의 극적 대비에서 비롯된다. 가족과 공유하는 것과 공유하지 않는 것/공유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명확할수록 친숙하고 익숙한 타자성, uncanny가 극대화된다. 감정표현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가정에서 감정은 공유되지 않는다. 정치성향이 완전히 갈리는 가정에서 정치적 사유는 공유되지 않는다. 성정체성-섹슈얼리티는 공유되지 않는다. 주체가 individual,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부분으로 구성되기에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의 존재는 필수적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공유된다면 앎은 권력의 문제인데 고백에 있어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가 불균형할 때 고백은 이뤄지기 힘들다. 여행지에서 만난, 다시 볼 일이 없는 이에게 딱히 리스크가 없기에 손쉽게 비밀을 고백할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일상의 관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가족에게 속마음을 꺼냄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낙차를 견디기가 꺼려져 고백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아내에게 살점이 뜯겨나간 상처로 뒤덮인 남편-아버지의 몸을 딸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서 좋았다. 아마 아버지는 식인을 하지 않고, 어머니만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를 보며 사랑을 통해 공동체에서 살아갈 여지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에 자신의 본능을 꼭꼭 누르며 정상성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할지라도 계속 쫓아다니고 매달리는 구애를 펼칠 정도의 사랑이라면 자신의 살점이 뜯기는 것까지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희망의 그림자를 엿본 셈이다.

 

5 <로우>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렛 미 인>이었다.(혹자는 <박쥐>를 떠올린다고 했는데) 사회에서 공존이 용인되기 힘든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나 고기는 아니지만 피를 마신다는 점에서 살인-식인의 모티프 등 유사점이 있었고, 식인이 생존의 조건이 아닌 <로우>에 비해 <렛 미 인>은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는 점, <로우>는 공동체적 연대의 모색이 가족 내부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짙은 반면 <렛 미 인>은 소수자적 위치에 있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과의 우정과 사랑, 환대(let me in)가 다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아예 태생적으로 종이 다른 <렛 미 인>과 달리 후천적으로 사회에서 용인되기 힘든 소수자적 정체성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고뇌한다는 점에서 <박쥐>와의 친연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를 마시는 것과 살을 먹는 것, 몸에 있어 회복 및 재생산의 문제, 먹고 싸고 자고 씹하는 존재의 기본값에 대하여, 단식과 불면, 변비와 설사, SM과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 각종 간음행위에 대하여,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하여, 에로스와 타나토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에서 아마 마루야마 겐지를 다루는 파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타자에게 자신의 살을 내주는 일은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데리다의 선물론을 인용했던 부분이 나온다. <옥자>를 비롯해 홍승은 작가,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과 여러 매체에서 공장제 축산에 대한 비판을 넘어 육식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이 이뤄지고, 채식이 다뤄지는데 ... 이성복이 지적했듯 타자를 먹음으로써 자기보존을 하는 생사성식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식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접근과 더불어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이고 헤겔 식으로 이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각을 시각적 포르노그래피로 상품화하는 푸드 포르노가 범람하는 시대에 ‘먹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의식적인 각성과 감각적인 갱신 양 측면에서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세미나 장이었던 선생님은 냄새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어렸을 때 소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어 소냄새를 맡으면 그 소가 생각나서 차마 먹을 수 없다고. 독서모임을 통해 만났던 다른 분의 경우 ‘고기’가 상품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영상을 본 충격으로 인해 채식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채식으로의 전회를 ‘회심’으로 서술한 바 있는데 이성적 결단이라기보다 감각적 차원에서 변화를 ‘회심’으로 명명하는 게 적절한지 비판을 받았다. 별다른 계기가 없다면 육식을 계속 하게 될 것 같은데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아도르노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지점, 근대화-도시화-우리가 이룩한 기계문명/물질문명이 경험세계를 파괴하여 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원초적인 감각의 마비됨을 인지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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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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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가장 유명한 소설의 도입부로 꼽히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소설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암시하고 있고, 대구를 통해 수사학적 효과를 내고 있기에 소설적으로 좋은 문장이기에 틀림없지만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지는 건 문장의 역도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나름나름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다. 비트겐슈타인이었다면 이 명제가 유의미한지 무의미한지 구분했을 테지만 문학에서 좋은 문장은 비문非文이거나 특정한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문장은 인생과 행복에 대한 톨스토이의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다. 이를 테면 톨스토이와 같이 러시아 문학계의 대문호로 뽑히는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이라면 톨스토이와 반대로 썼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행복과 불행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점이다. 행복한 가정의 구성원들은 모두 행복한가, 불행한 가정의 구성원들은 모두 불행한가 같은 질문들이 촉발되고, 본능적인 정열에 이끌린 안나-브론스키 커플과 의무와 책임을 따르는 레빈-키티 커플 모두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나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어떻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평가 이현우는 행복해야 한다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 삶이 행복하다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 행복에 대한 물음은 불행이나 결핍의 자각에 따른 반작용인 경우가 많기에 행복이라는 인위에 얽매이지 않은 무위적 상태가 행복하다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복을 정의내리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행복의 형이상학을 주창하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진리와 사건의 철학자 바디우는 언어학적 전회 이후 언어의 의미 해석(해석학), 언어 게임의 규칙(분석철학), 새로운 삶의 형식들-복수성의 발명(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반철학자들의 세이렌의 노래에 맞서 진리로의 여정을 떠나는 오디세우스를 자처한다. ‘존재는 언어에 선행한다는 명제로 주체는 술어의 수행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주체의 죽음을 부정하고 제1철학으로서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복권시킨다. 진리철학은 다시 이론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삶을 철학의 무대로 불러내고, 행복은 당당히 주인공으로 사유의 향연에 중심에 선다.

 

1 행복은 진리들에 이르는 모든 통로를 가리키는 틀림없는 표지이다.(10) 행복은 미덕의 보상이 아니라 미덕 그 자체이다(스피노자, 11) 9 행복은 오직 개별자로서 주체 됨을 받아들이는 자를 위한 것이다(53). 그의 통찰을 빌리면 웰빙부터 행복에 대한 담론이 양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질적 행복에 있어 변화가 미비한 한국사회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추구한 행복은 사실 실제적 행복아니라 만족이었을 지도 모른다. 부연하자면 행복의 성취보다 불행의 회피에 중점을 두고, 불행하지 않음에서 만족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행복이라는 정상summit에 도달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외부의 물질에서 행복을 찾는 소유하는 삶이 아닌 성찰적 태도로 내면을 보살피고 다스리는 존재하는 삶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분명 행복의 기준을 사회에서 제시한 척도가 아니라 자율적 주체에 두는 것은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이 또한 만족 추구의 변형된 형태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례로 달관 족이라 불리는 사토리 세대는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미니멀한 일상 자체를 긍정하는 모습으로 내면적 행복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보통 사람들보다 높은 불안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를 테면 탈정치적 지평에서 행복은 행복감이라는 형태의 심리적 차원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정신승리가 아닌 존재의 승리, 유한성에 맞서 유한성의 무한한 향유일 때 행복은 오롯이 삶에 깃든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철학은 구체적인 처세의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지만 나침반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제시한다.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자 진리와 친구가 되는 삶의 태도이자 방법이고, 온전히 진리를 따랐을 때 행복이라는 참된 정동이 젖과 꿀처럼 흐를 것이다. 행복은 일정 정도의 절망을 요구하기에 우리는 안전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바디우는 이 위험성과 고단함을 받아들이고 충실성을 견지하라고 한다. 그렇게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행복하자라는 혁명적 욕망을 설파하는 보편적 구호로 답변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민음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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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알아요

 

 

엘르 코리아에서 배우 한예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중 일부를 옮긴다.

 

행복지수도 높아졌나요 :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청춘시대>만 봐도 20대는 많이 흔들리잖아요. 저도 그랬고, 서른이란 나이의 안정감을 기대했어요. 그 나이가 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시간이 한결 선명해지고 생각도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대로 됐나요 : 확실히 30대가 좋아요. 저란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된 만큼 재미있고 행복해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 특수한 지식은 전적으로 행복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재료들이다. 자신에 대한 앎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이다. 자신은 동적인 사람인데 이를 평생 인식하지 못하고 데스크 업무만 보고, 집에서만 여가시간을 보낸다면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행복의 방정식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 다르겠으나 행복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감정, 정동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은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때 생성되는 감정이다. 들뢰즈는 어느 강연에서 길에서 사람을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이는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자기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다는 것,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살고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30대가 되면 조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에 심심한 위로를 받으면서 한편으로 이십대의 격렬한 방황과 좌충우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20대는 실험의 연속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다운 나를 찾기 위한, 또 만들어나가기 위한 연습과 연마의 시간. 연애를 통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시행하고, 소비와 문화적인 편력을 통해 자기만의 감수성과 취향을 실험하고, 독립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공간의 디자인을 실험하고, 취업 및 도전을 통해 이상과 현실 사이 적절한 타협점을 실험한다.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기 몸과 처음으로 내밀한 소통을 시작하게 되고,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연주에 따라 자신이 어떤 음을 낼 때 가장 빛나는 악기인지 차차 알아가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그 시공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면서 멋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욕망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고 자신의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노래 부를 수 있는게 아닐까.

 

 이렇게 자신에 대한 앎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호명 및 심문은 중대한 역할을 차지한다. ‘누구냐,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기소개를 하고, 자소설이란 오명이 씌워지긴 했지만 자소서를 쓰는 등 사실은 나는 누구인가반복적으로 규정하게끔 유도·강제하는 규율을 통해 자아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는 누구인가. 알튀쎄의 호명 메커니즘을 적용시킨다면 나는 누구인가묻는 는 대타자-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이기 때문에 실상 누구냐, 이란 질문의 뒤집힌 형태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양동혁이다, 남자다, 한국인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다, 대학원생이다, 이런 식의 답변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 주술 구조를 갖춰 서술했을 때 내 본질을 조금이나마 담아낼 수 있다. ‘누구인가도 문제적이지만 라는 개념 자체도 그 못지 않다. 니체가 말했듯 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고, 행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수행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한 행동들의 총체 정도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정희진이 데카르트 식 코기토에 대항하며 피력한 의견과도 동일한데 이와 더불어 나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는 관계론적 관점이 탈근대 철학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주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설명하면 나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브레인라이팅-생각하는 즉시 그대로 문자로 옮겨지는 기술-과 카메라로 전 생애 전체를 기록하고, 텍스트로 남긴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볼 수 있게 해놓더라도 내 삶이 전부 기록되고 있다는 의식이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망각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인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평전을 쓸 수 없듯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비평적 관점을 취하기 힘든 반성적인 내면 성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가의 경우 작품을 통해 창작자의 심리와 세계를 해석하는 게 가능하지만 작품 및 기록물archive 자체가 양적으로 빈약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보니 기술의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이 기록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공산이 농후해보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면 남의 인생을 사후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하는 데는 유용한 자료가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예상되었다. 영상이든 문자든 이미지든 기호들은 해석을 통해 주체로 편입되는데 해석할 자료가 양적으로 많다고 해서 해석의 질적 깊이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신식의 심리테스트나 과학기술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지식은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걸 보면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지식의 윤리성(윤여일은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에서 지식을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논하면서 지식의 윤리성을 화두로 독자들에게 건넨다)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리고행동하면서 자아라는 허상,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뿐더러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지금의 함춘수(정재영), 내면이 배배 꼬여 있지 않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꾸고 욕망을 바꿔야 했다.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욕망하는 도주선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삶.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라캉)

p.s 난 알아요. 무엇을? 난 날 알아요. 어떻게? 난 날 잘 알아요. ? 왜 난 날 잘 알아요? 왜 난 알아요(김승일). 왜 무가 아니라 존재인지 물었던 것처럼 왜 무지가 아니라 앎인지 물어보자.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그만큼 잘 알고 있는지, 나아가 윤리적인지 따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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