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대로 일단 정리해보았다. 본격적으로 꿰 맞춰서 쓸 지는 미지수...
1 Bifan 최대의 화제작이라 불리는 영화를 이제 봤다. Bifan 당시 예매를 했음에도 날씨 영향인지 기분 탓인지 표를 취소했다. 6천원에 괜찮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9천원에 맨 앞줄 구석에서 봤으니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꽤 '힘든' 영화였기에 bifan 때 무리해서 보러 가지 않은 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시놉시스만 보고 스토리를 예상해보았다. '채식주의자였으나 자신의 숨겨진 식인 욕망을 우연히 깨닫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영화' 라 하길래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으로써 채식을 고수하는 이가 식인의 욕망에 눈을 떠 실재를 가로지르는 윤리적 전회를 경험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예상해봤다. 돼지가, 소가, 닭이, 오리가, 인간들의 인식론적 망에서 '고기'라 통칭되는 물고기가 맛있어서, 팍팍한 세상에 먹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욕망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충실성으로, 골고루 먹는 게 건강에 좋다는 이데올로기적 냄새를 풍기는 말을 어설픈 알리바이로 삼아,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기에 먹는다는 육식의 논리에 동물이면서도 '인간'이라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외부로 설정되어 있던 식인을 이성의 법정에 회부하는 방향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그렇다면 굳이 식인이 아닌 육식을 소재로 삼았어도 충분했을 테니까. 그래도 결과적으로 채식으로 인해 억압되어 있던 본능이 깨어나면서 폭주와 탈주가 이어질 거란 예상 정도는 들어맞은 듯하다
3 본격적으로 스포일러가 포함된 영화 내용을 다뤄보기 전 <로우>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축약해서 표현한다면 왓챠에 베스트 코멘트로 올라온 것처럼 ‘금지된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 공동체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빼놓을 수 없지만 <로우>는 무엇보다 자매의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 집안의 주인공은 매쉬 포테이토에 들어간 고기에 구역질을 한다. 채식 내력이 꽤 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은 수재라 불린다는 점이나 아직까지 성경험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일탈하지 않는 모범생으로 자랐을 거라 예상된다. 수의사를 키우는 대학교에 입학한 그녀를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토끼 생간을 먹으라고 하자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히고, 이를 증명해줄 증인으로 언니를 찾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언니는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잡아떼며, 생간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동생에게 토끼 생간을 먹으라고 부추긴다. 먹지 않으면 왕따가 될 테니 눈 딱 감고 해치우라고. 억지로 먹은 생간이 부작용을 일으켜서인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고생한다. 내장이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룬 이후 주인공의 몸은 스위치가 켜지듯 동물적인 본능이 날뛰기 시작한다. 새벽에 허기를 느껴 새벽에 생고기를 뜯어먹고, 왁싱을 하다가 그동안 쌓였던 언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짜증의 발길질이 낳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잘린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이내 씹어 먹는다. 족발이나 닭발이랑 비슷해 보이는 ... 이때 Jim Williams의 사운드트랙이 하드캐리하는데(유튜브로 검색해서 다시 들었는데 온몸이 소름이 쫙...) 전자 파이프오르간 소리라 추정되는데 파이프오르간의 종교적인 느낌을 컬트적인 분위기를 입어 굉장히 오묘하고 역설적인 감정을 촉발시킨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감정을 고조시키는데 장엄하고 숭고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펐다. 축복이자 저주인 여성괴물의 탄생.
손가락이 잘린 걸 보고 기절한 언니는 동생이 자기 손가락을 먹는 모습을 오히려 덤덤하게 바라본다. 가족 내에서 별종이었던 장녀 언니와 꽃길만 걸었을 수재 동생, 자기 욕망에 먼저 눈을 뜨고 동생의 개안을 도와주려 하지만 호의적인 뜻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언니와 자신을 안전한 세계로부터 추방하는 데 앞장서는 것 같아 원망스럽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언니에게 기대는 동생.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동생이 좋아하는 게이 룸메이트를 먹어버린 언니를 차마 죽이지 못한 건 혼자 남겨질 세상이 너무 외로울 거란 자각에서였을까. 자매와 게이 룸메이트가 그리는 삼각형은 세즈윅이 얘기한 호모소셜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삼각관계가 말 그대로 삼각형의 역학적 구도를 띠고 있다면 남성 연대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함으로써 그 혐오와 구별짓기의 동일한 거리를 공유함으로써 친밀성을 구축하는 이등변삼각형 같은 꼴이 아닐까 싶다. 왜 하필이면 언니는 동생이 좋아하는 게이 룸메이트를 먹어버린 걸까? 배가 고파서, 는 아닐 테고 실은 자신도 게이 룸메이트에게 감정이 있어서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동생에게도 줄 수 없다는 심리가 발현된 걸까, 동생이 자립하길 바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품을 떠나지 않았으면 애착으로 인해 사랑의 경쟁자를 해치운 것일까, 동생이 먹어버리기 전에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먹어버린 것일까.
4 자매만의 케미와 더불어 타자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매, 형제, 남매, 누나-남동생, 오빠-여동생, 연년생, 쌍둥이, 두 살 터울, 10살 터울, 이복형제, 장남/녀인지, 막내인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이란 관계는 참으로 미스터리한 것 같다. 혹자는 가족을 가장 가까운 타자라 칭한 바 있는데 이는 앎과 무지의 극적 대비에서 비롯된다. 가족과 공유하는 것과 공유하지 않는 것/공유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명확할수록 친숙하고 익숙한 타자성, uncanny가 극대화된다. 감정표현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가정에서 감정은 공유되지 않는다. 정치성향이 완전히 갈리는 가정에서 정치적 사유는 공유되지 않는다. 성정체성-섹슈얼리티는 공유되지 않는다. 주체가 individual,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부분으로 구성되기에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의 존재는 필수적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공유된다면 앎은 권력의 문제인데 고백에 있어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가 불균형할 때 고백은 이뤄지기 힘들다. 여행지에서 만난, 다시 볼 일이 없는 이에게 딱히 리스크가 없기에 손쉽게 비밀을 고백할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일상의 관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가족에게 속마음을 꺼냄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낙차를 견디기가 꺼려져 고백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아내에게 살점이 뜯겨나간 상처로 뒤덮인 남편-아버지의 몸을 딸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서 좋았다. 아마 아버지는 식인을 하지 않고, 어머니만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를 보며 사랑을 통해 공동체에서 살아갈 여지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에 자신의 본능을 꼭꼭 누르며 정상성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할지라도 계속 쫓아다니고 매달리는 구애를 펼칠 정도의 사랑이라면 자신의 살점이 뜯기는 것까지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희망의 그림자를 엿본 셈이다.
5 <로우>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렛 미 인>이었다.(혹자는 <박쥐>를 떠올린다고 했는데) 사회에서 공존이 용인되기 힘든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나 고기는 아니지만 피를 마신다는 점에서 살인-식인의 모티프 등 유사점이 있었고, 식인이 생존의 조건이 아닌 <로우>에 비해 <렛 미 인>은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는 점, <로우>는 공동체적 연대의 모색이 가족 내부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짙은 반면 <렛 미 인>은 소수자적 위치에 있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과의 우정과 사랑, 환대(let me in)가 다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아예 태생적으로 종이 다른 <렛 미 인>과 달리 후천적으로 사회에서 용인되기 힘든 소수자적 정체성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고뇌한다는 점에서 <박쥐>와의 친연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를 마시는 것과 살을 먹는 것, 몸에 있어 회복 및 재생산의 문제, 먹고 싸고 자고 씹하는 존재의 기본값에 대하여, 단식과 불면, 변비와 설사, SM과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 각종 간음행위에 대하여,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하여, 에로스와 타나토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에서 아마 마루야마 겐지를 다루는 파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타자에게 자신의 살을 내주는 일은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데리다의 선물론을 인용했던 부분이 나온다. <옥자>를 비롯해 홍승은 작가,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과 여러 매체에서 공장제 축산에 대한 비판을 넘어 육식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이 이뤄지고, 채식이 다뤄지는데 ... 이성복이 지적했듯 타자를 먹음으로써 자기보존을 하는 생사성식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식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접근과 더불어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이고 헤겔 식으로 이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각을 시각적 포르노그래피로 상품화하는 푸드 포르노가 범람하는 시대에 ‘먹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의식적인 각성과 감각적인 갱신 양 측면에서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세미나 장이었던 선생님은 냄새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어렸을 때 소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어 소냄새를 맡으면 그 소가 생각나서 차마 먹을 수 없다고. 독서모임을 통해 만났던 다른 분의 경우 ‘고기’가 상품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영상을 본 충격으로 인해 채식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채식으로의 전회를 ‘회심’으로 서술한 바 있는데 이성적 결단이라기보다 감각적 차원에서 변화를 ‘회심’으로 명명하는 게 적절한지 비판을 받았다. 별다른 계기가 없다면 육식을 계속 하게 될 것 같은데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아도르노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지점, 근대화-도시화-우리가 이룩한 기계문명/물질문명이 경험세계를 파괴하여 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원초적인 감각의 마비됨을 인지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