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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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줄거리를 읽으며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김태우의 <폭격>과 허영철박건웅의 <어느 혁명가의 삶 1920~2010>, 최수철의 <거제, 포로들의 춤>을 합쳐 놓은 소설이겠구나. <폭격>은 북한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이 형성되는 데 있어 한국전쟁 시기 북한 인민들 전체를 항시적인 불안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폭격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에서 김태우 선생님이 직접 출연하셔서 특강을 해준 적이 있다. 북한의 선제공격과 이승만의 한강다리 폭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개입, 휴전으로 이어지는 한국전쟁의 지배 서사 이면의 복합적인 역사적 진실들을 마주하고 싶은 독자 분들에게 적극 권하는 바이다. 북한에서 남과 북 모두에서 인민위원장을 지낸 허영철 선생의 삶을 그려낸 <어느 혁명가의 삶>(스포일러주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의 정찬우와 달리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했으며, 출소 이후의 삶까지 담아내고 있어 비교해서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거제, 포로들의 춤>은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긴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와 같이 실존인물의 수기 및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덧대 만들어졌으며 전쟁포로들의 처절한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곡진하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이상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직접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레퍼런스들인데 사실 어렸을 때 극장에서 본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사창작물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차라리 1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사창작물들을 접해본 경우가 많은 듯한데 특별히 내가 서구중심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거나 문화 사대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닌 듯하다. 국문학을 전공한 지라 수업시간에 1950년대 대표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전쟁의 참상을 절절하게 담아내고 있는 작품을 읽어본 바 있지만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고발하는 내용(‘휴머니즘’)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내용을 제외하고 나면 별다른 게 남지 않는 느낌이었다. 전쟁의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 상태에서 써내려간 작품들의 경우 역사와 적절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서술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전후의 트라우마를 녹여낸 <오발탄> 같은 작품이 내게는 흥미롭게 읽혔다. 약간의 선입견과 더불어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을 만나지 못해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책들로 퍼즐들을 맞춰나갔던 한국전쟁의 실상을 정찬우라는 인간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났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아는 만큼 재밌는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그려내는 문학은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매개하지 않고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진 게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의 디테일들이 첨가되었을 때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통과해낸 한 영혼을 더 뜨겁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최근 한반도의 봄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통일 글짓기 시간에만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통일의 꿈이 부풀고 있는 시점인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통일의 실감을 과거의 잊혀진 전쟁의 기억의 조각을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있어 우리와는 어떤 식으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지, ‘잊혀진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진실들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 고민하고, 충분히 기억되고 애도되지 못한 영들을 추모하는 일. 사실 이렇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소설의 인물과 진실된 소통을 하는 것이 소설을 읽는 체험이 줄 수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해보았다. 끝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작가의 말이었는데 인터넷 서점에 게재된 책 소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을 가져와봤다. 작가의 말이 그 어떤 서평보다 독서욕을 고취시킬 거란 생각에.

안재성의 한 마디
 
불행했던 우리 역사의 숨겨지거나 외면된 진실을 복원하고 비극적으로 숨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글 무당처럼 살아온 내게 정찬우의 증언은 흥미로웠다.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미시적으로 생생히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현대사 공부를 깊이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당대의 전설적 인물들이 조연처럼 잠깐씩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로서 이념 전쟁의 속죄양이 되어야 했던 정찬우라는 인물의 기구한 운명에도 동정이 갔다
내가 이전에 다룬 역사적 인물에는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가 여럿 있다. 그들은 전쟁을 반대해야 할 위치에 있었으나 막지 않았으며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정찬우를 비롯한 전쟁 참가자 대다수는 개전의 새벽까지도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정찬우의 수기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관념적인 작전명령과 실제 전선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 간의 괴리가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주며, 그의 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구상에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에 맞춰져 있다. 그의 수기에서 단순한 전쟁 체험기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소설화해 널리 알리고자 결심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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