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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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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장 중요한 20세기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철학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제자들에게 의사나 기술자의 길을 권했다. 자신의 충고를 거부하고 교수가 되려하는 제자 노먼 말콤에게는 다음과 같이 경계하기도 했다. "만약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얻는 효용이 그저 어떤 심오한 논리학의 문제들 등에 관해서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너의 생각을 개선시키지 않는다면, 만약 그것이 너를,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위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여느 기자들보다 더 양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확실성, 확률, 지각 등에 관해서 잘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 진정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어렵다.“

 철학의 길이 얼마나 배타적인지, 자칫 범인(凡人)이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소리로 철학적 탐구가 끝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독한 천재로, 세속의 성자로 철학을 한다기보다 철학을 살아낸 그였기에 그의 충고에서 허세나 소명의식이 아닌 진심을읽어낼 수 있었다. 천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소설의 화자인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루드비히가 교향곡을 통쨰로 휘파람으로 불었다고 하는데 파울 역시 오페라공연의 성공여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오페라 광이었다. 루드비히가 어렸을 때 집안에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유명음악가들이 초대되기도 하고, 그의 형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걸 보면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음악적 기질은 유전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군!

 

 천재적 철학자는 칸트가 천재라 부른 이들은 예술가였다. 자신을 끊임없이 뛰어넘는 초인사상을 전개했던 니체가 어린이를 찬양한 것도 예술가와 어린이의 근친성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요즘 자주 사용되는 뇌가 섹시한파울 비트겐슈타인은 토마스의 시선에서 매우 아름답게 그려진다. 과거 축구황제라 불렸던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무릎부상 등으로 기량이 하락한 것을 두고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논평했다. 인간의 육체가 신적 재능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파울의 정신병도 인간의 육체가 감당해낼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 재능의 악마성의 영향이 있었던 건 아닐까? 물론 그가 작가의 진술처럼 정말 삼촌만큼의 명석한 두뇌를 자랑했는지(‘나는 그와 같이 예리한 관찰력과 비상한 사고력을 갖춘 사람을 예전에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p34)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사실진위 여부가 그다지 중요해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광기에 있어서는 파울이 천재적이었다는 것을, 그가 광기의 천재였음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토마스는 이를 특유의 냉소적 모놀로그로 읊조린다.

 

단지 파울은, 그의 재산을 그랬듯이 사고력마저도 끊임없이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창밖으로 던져진 재산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바닥나버린 것에 반해 그의 사고력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그는 사고력을 쉴 새 없이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러면 사고력은 (동시에) 쉴 새 없이 증폭되었다. 그가 사고력을 (머리속의) 창밖으로 던지면 던질수록, 사고력은 더더욱 증가했다. 자꾸만 쉴 새 없이 정신적 능력을 (그들 머릿속의)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동싱, 머릿속에서는 (그들 머릿소의) 창밖으로 정신적 능력을 던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속도로 정신적 능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처음에는 미쳤다가 나중에는 광증환자로 발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이 점점 더 많은 정신적 능력을 (그들 머릿속의)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더 늘어나고, 따라서 당연히 점점 더 위협적이 되고, 종구에 가면 그들이 정신적 능력을 (그들의 머리에서) 밖으로 집어던지는 속도가 머릿속 정신적 능력의 증가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어,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정신적 능력이 꾸역꾸역 쌓이다 못해 마침내 머리가 터져 버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파울의 머리도 터져 버린 것이다. 정신적 능력을 (그의 머리에서) 밖으로 집어던지는 속도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니체의 머리도 터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광적인 철학자의 머리가 마침내는 터져 버린 것이다.(p34~35)

 

 이 작품이 자전소설로 알려졌는데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토마스는 왜 굳이 파울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소설의 소재로 삼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분명 파울은 루드비히와의 혈연적 관계를 차치하고서라도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소설의 무대에 올린데 이견이 없지만 그와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전소설이라 해서 특별한 독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과거에 읽었던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나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에 비해 입구를 찾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 아마도 자전소설이지만 주인공의 내면보다 파울에 집중하는 관찰자 시점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옮기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는 인간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그만큼 냉혹하게 증오했다. 그는 부자의 입장에서 부자를 보았으며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를 보았다. 건강한 자의 입장에서 건강한 자를, 병자의 입자에서 병자를 보았다. 그리고 미치광이의 입장에서 미치광이를 보았으며 정신착란자의 입장에서 정신착란자를 보았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다시 한 번 더, 이미 수십 년 전에 자신과 친구들이 만들어 낸 화려한 전설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장전된 리볼버 총을 손에 들고 잔뜩 흥분한 상태로 노이에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쾨세르트 보석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문턱에 서서 진열대 뒤편에 서 있는 보석상 주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고트프리트에게, 어떤 특정한 진주를 내놓지 않으면 당장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는 것이다.(...)그러자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왕관에 박혀 있는 진주 말이다! 그가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것은 파울의 마지막 장난이었다.(...)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 주었으면 해, 하고 파울은 나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합해서 여덟 명 혹은 아홉 명이 저부였다고 한다. 그때 나는 크레타에 머물면서 희곡을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 썼던 희곡은 완성된 다음에 찢어 버렸다. 나중에 나는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그는 사촌의 보석상을 습격한 지 며칠 뒤, 내 짐작과는 달리 그가 매번 실려 갔던 곳이고 그 자신도 사실상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그 슈타인호프가 아니라, 린츠의 한 병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빈의 중앙묘지에서, 흔히 하는 표현대로하면, 안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그의 무덤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p139~141)

 

 ‘오직 떠나 온 장소와 도착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하는 토마스는 이렇게 친구를 보냈다. ‘머리를 최대한 사용하면서 살아야 하는’ ‘대도시가 자신에게 아둔한 맹목에 빠진 채 자연을 감상적으로 칭송하면서 그 안에서 퇴화해가게 하는 시골보다 백배나 더 나은 장소라고 말하는 토마스는 이렇게 친구를 보냈다. ‘상이란 한 사람에게 똥물을 뿌리는 행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토마스는 이렇게 친구를 보냈다. 물론 그는 크레타 섬과 장례식장 사이의 물리적 거리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그만의 애도 방식이 아닐까 희미한 의심을 가져 본다. 슬픔의 해소를 거부함으로써, 슬픔을 생의 끝까지 유예시킴으로써 슬픔과 결부한 한 인간의 기억을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가겠다는 삐뚤어진 사랑이 그의 부재를 꽉 채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그의 마음을 내 맘대로 해석하기로 한다. 불온하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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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4-06-1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질문하신 부분 답글 달아놓았는데(질문이 좀 어렵더군요 ㅎㅎㅎ) 윤스리님이 안읽으셨는줄 알고, 댓글이 좀 엉뚱해진 것 같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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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저자이름을 눈으로 훑어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공동묘지잖아. 실로 그랬다. 책장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은 적게는 수십 년 전, 많게는 수 천 년 전 죽은 이들의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나무-숲 관계의 반대버전이었다. 나무 한 그루, 작가 개개인의 개별적인 작품과 약력을 봤을 때 이들은 그저 비범한 재능과 비상한 성실성으로 대단한 성취를 거둔, ‘성공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그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보니 이들을 한데 묶는 어떤 근원적인 에네르기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몇 천 년 전부터 내려져온 신화에서부터 가장 전위적인 언어로 쓰인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색깔(인종), 모양(외모), 장르도 제각각이었지만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물질적 근친성 때문인지 텍스트라는 기표적 통일성 때문인지 그들이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함께 흐르게 하는 뿌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문학의 신같은 낭만적, 추상적 표현보다 좀 더 실재적, 구체적인 표현을 찾고 싶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책의 등뼈를 응시해본다..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줄기를 뻗으며 곧게 서 있는 뿌리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지금의 나로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독


고독은 내면 깊은 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하고(릴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하며(고독의 발명-폴 오스터), 그렇게 실존적 고독을 통해 고독의 실존자가 된 이들은 고독이란 근본감정 속에서 연대한다(고독의 연대-은희경). 모든 문학이 고독을 다루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문학이 고독의 자궁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만난 책들 중에 가장 섹시한 뒤태의 소유자였던 김중혁 작가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통해 간간이 들을 수 있었던 그 소설이 소설’, 정확히 말하면 이런소설이란 걸 알게 되고 약간의 고충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떻게 리뷰를 쓸 것인가. 그의 스텝은 경쾌하다. 경쾌한 상상력과 유머로 무장해 좀 더 느슨한 세상”(빨간책방에서 언급)을 지향하는 그의 소설은 신형철 평론가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적었듯 37.5도의 미지근한 열정이 느껴진다. 독자를 주눅 들게 하면서 동시에 작가를 경탄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문장력이나 인간과 세상에 대한 대가적 통찰은 그의 소설의 무기가 아니다. 김천 출신 문인 3인방 김연수, 김중혁, 문태준을 놓고 각각 도서관형, 박물관형, 마을회관형이라 표현한 것처럼 김중혁의 세계는 박물관, 세상에 잡다한 존재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독특한 온도와 분위기,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그 느낌이 꼭 밴드음악과 닮았다. 보컬과 기타, 베이스, 드럼 혹은 트럼펫, 키보드 같은 악기들이 처음엔 좀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더니 투덕거리며 시간을 함께 견뎌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내게 볼매. 뇌쇄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으로 어필하기보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천천히 마음에 스미는 정든 친구 같은.

 

 실제로 '모든 게 음악' 음악에세이를 낸 작가이기에 밴드 이야기를 조금 꺼내봤다. 그의 부드러운 칼날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멀어져가는 휘파람 소리처럼 은은하게 유혹해오는 책의 뒤태를 살펴보자.

 

제 귀는 아주 깊은 우물입니다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세요

 

나를 둘러싼, 내가 모르는 세계로 향하는 비밀의 문

여기가 구동치 사무실이 맞습니까?”

 

당신은 그토록 무미건조한 월요일에 나를 찾아왔군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이여,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사랑만이 덧없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어요.

 

 뒤표지의 그림이나 전체적인 느낌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제법 닮았다. 비밀의 은유로 그림자가 자주 쓰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빛을 받으면 내 안에 숨어 있던 어둠이 내장처럼 길게 늘어진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다. 인간에 내재한 어둠 속에 고이는 비밀은 인간이 스스로를 이성(빛의 언어)으로 정복할 수 없게 만든다. 근원적 한계이자 일종의 안전장치라 볼 수 있다. 존재 내 이질성, 내가 아닌 나,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나, ‘라는 확고한 주체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작은 나()와의 끊임없는 불화를 통해 페소아나 이상 같은 시인들은 헤테로의 언어를 발명해냈다. 비밀이 그 자체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문학은 비밀의 비밀을 꿰뚫고 있다. 비밀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형식 중 하나이다. 인식론의 문제나 물 자체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뭔가를 아는 존재라기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에 가깝다. 광활한 우주에서 코딱지보다 한참 작은 지구에 살지만 우리는 당장 옆집에 사는 이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 정보의 영역은 물론이요, 진위를 가려내기 어려운 진실의 영역이 천 길 물속보다 알기 힘들다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러니까 70억 이상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단지 중력의 존재로 말미암아 추측할 수 있는 암흑물질이라고 하니 그런 점에서 볼 때 어쨌든 우리는 우주의 섭리에 잘 따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비슷한 문장을 다른 탐정 이야기에서 들은 적이 있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10기 탐정들의 진혼가에서 한 남자는 비밀은 남녀의 사랑을 돈독하게 해준다고 했다. 자신의 일부지만 그 일부로 인해 전부인 자신이 파괴될 수 있는 비밀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뜻이 될 것이다. 관계는 상대방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많아지면서 깊어지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어느 한계선을 넘어가면 비밀과 관계의 역학 그래프가 변곡점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범이 아닌 이상 상대방의 살인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의 신뢰가 굳건히 유지되리라 생각하기 힘들다. 비밀에 의한 신뢰도 형성에도 브레이크 포인트, ‘알면 다치는판도라의 상자가 있는 것이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비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는 자신의 모든 기록들을 딜리팅하는 직업을 가진 전직 경찰 겸 사립탐정 겸 딜리터(deleter)이다. 줄거리를 자세하게 적어 독자들의 서사를 따라가는 재미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핑계를 댄다). 비밀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들의 각축전을 작가는 노련한 솜씨로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그의 소설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는 섹스묘사도 비록 영화 속 장면이긴 하지만 있다(그것도 떼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는 남녀 주인공의 밀당이나 조금은 엉뚱한 매력을 어필하는 조연 캐릭터의 존재가 그의 전작 장편 좀비들을 연상시켰다. 당신의 그림자의 월요일의 후배탐정과 좀비들의 뚱보가 오버랩됐다. 어떤 매너리즘에 대해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김중혁 세계의 고유성, 그만의 느낌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다. 김중혁 월드의 입구에는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딱 귀여운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상한 포즈로.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정소윤이 그랬듯 나의 기억은 우리의 기억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숙명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기억, 우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자세에서(이영광 우물) 윤리를 논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지식은 체계화된 기억이다. 90%이상 소멸되는 죽음의 늪을 지나 살아남은 기억이 장기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말로, 글로, 음악으로, 영상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져 인간은 현생에서 수많은 영혼이 농축된 오래된 현재를 살고 있다.

 하지만 망각의 문제 역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공공선을 침해하지도, ‘일리아드‘let it be’처럼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망각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자신의 기록을 지워 저승에서까지 이생에서 좋은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망을 이기적이라 지적했지만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반영구적으로 보존돼 자연스럽게 망각, 정신적 차원에서의 죽음을 맞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기억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력한 바 있다. 이는 마지막 딜리팅의 대상인 사진을 피오르드 바다에 던짐으로써 망각의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간에게 우의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기록하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은 하드디스크에 파일이 저장되듯 기계적으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의 정보의 감각과 감성의 영역이 뒤섞인 총체적 감각에 의해 이뤄진다. 단순암기라 생각되는 작업의 경우에도 우리는 텍스트를 읽어 청각적 자료로 변환하거나 머릿속에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등 감각과 감성을 이용한다. 또한 기억할 수 있는 양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지향성에 의해 선택된기억만이 생을 이어갈 수 있다. 물론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만 인간이 기억과 망각의 세계를 오가며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재단하는 존재라는 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구만 지키지 말고 그림자도 지켜야 할 것이다. 이승에 버려진 그림자가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물에서 허우적대는 이처럼 길을 잃지 않도록 기억(망각)의 책임이 있는 자들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생사를 결정하는 천계의 심판관처럼 무엇을 기억하고(잊고) 살 것인지, 무엇으로 기억되고(잊히고) 죽을 것인지.

 

p.s 이제야 읽는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 중 종이물고기에서 공동묘지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발견했다. 기억이여, 당신은 언제나 태어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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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푼짜리 오페라 - 베르톨트 브레히트 희곡선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200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은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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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전까지 브레히트는 읽어야 하는 작가였다. 서사극의 대가, 망명생활을 하면서 조국 나치를 진실한 목소리로 비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 탁월한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낸 극작가이자 시인. 그의 이름이 가장 강하게 각인된 에피소드는 아마도 브레히트 - 아도르노 - 첼란의 '서정시' 쓰기에 대한 코멘트였던 것 같다.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Schlechte Zeit Fur Lyrik  

 

분량이 짧으니 전문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하자.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방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 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번쨰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1939년)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없다고 선언했지만 전후 시인 중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명인 파울 첼란은 아도르노의 부정을 그의 시로써 부정했다.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프리모 레비의 '살아남은 자의 아픔'과 함께 기억되었고, 시인 브레히트가 기억되는 동안 극작가 브레히트는 잠시 잊혔다. 


 극작가 브레히트를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소리꾼 이자람이었다. 이자람이란 걸출한 아티스트를 알게 되고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억척가의 원작이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브레히트는 읽어야 하는 작가에서 읽고 싶은 작가가 되었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서푼짜리 오페라는 서푼짜리 오페라와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두 작품을 수록된 희곡집이었다. 분량이 조금 아쉬웠지만 두 작품에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기조, '브레히트적'이라 말할 수 있는 예술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사극이란 장르, 그리고 이 장르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브레히트의 예술관과 시대적, 역사적 상황은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이성의 시대에서 반합리주의를 내세우는 파시즘, 나치즘으로 서구가 몰락하기까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반성하지 않는, 절망하지 않는 무사유의 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몰락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술가로서, 리얼리스트로서 브레히트는 연극무대를 가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반 사람들보다 잘난 사람들이 나와 몰락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비극이 아닌 소위 말하는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고상하고 고매한 정신적 갈등이 아닌 저열하고 이기적이고 경우에 따라 거리낌없이 비겁해지는 욕망이 서로 물고 늘어지는 이야기, 영웅이나 신화 속 인물이 아닌 내 주변의, 우리네 이야기. 

 

 작품을 낭독하면서 나름대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봤는데 억척 어멈이 끄는 수레는 영화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에 등장한 수레를 떠올렸다. 온갖 잡다한 물건을 싣고 다니는 '없는 게 없는' 수레, 그래서 정말 있어야 할 것은 없는 수레. 억척 어멈은 수레가 있었기 때문에 집을 가지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이 문장은 이렇게 고쳐야 더 적절할 것이다. 집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수레를 끌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소라게처럼 수레와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떠도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 억척 어멈은 전쟁을 환영하는,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전쟁광'의 이미지에서 한참 벗어난 특이한 전쟁광의 모습을 하게 된다. 그녀의 곁에는 전쟁이 끝났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없었고, 남자들에게 해코지당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얼굴에 상처가 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연약(하다고 생각되는)한 벙어리 딸과 아들들만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개봉한 스티브 맥퀸 감독의 '노예 12년'의 대사를 조금 바꿔보면 그녀는 생존해야 했다(have to survive). 그리스에서 말하는 의미 있는 비오스bios의 삶이 아닌 생명 그 자체로의 조에zoe, 의미 있는 삶live이 아닌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생존survive, 당장 내일 눈을 뜰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삶을 말하는 건 그녀에게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억척스럽게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는 삶도 있었고, 이 예외적 삶의 방식은 전쟁이란 바이러스가 퍼지는 곧바로 규칙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죽음이 일상이 돼서 삶이 기형이 되는, 죽음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돼서 죽은 자들을 대신해 살아'남은' 것 같아 죄스러워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는 모른다. 아직까지 그야말로 삶만을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 더 나은 삶eu zen에 대한 생각을 거미줄처럼 뿌리고 뿌렸을 뿐 삶zen 그 자체가 이뤄지는 콧구멍과 똥구멍을 응시해본 적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땅이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라는 것을, 최근에도 불의의 사고로 인해 수많은 죄없는 생명들이 아직까지 캄캄하고 차가운 바닷 속에 '있다'는 것을,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거짓말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Ich, Der Uberlebende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1944년)

70년이 지난 지금 누가 살아 남았는가. 슬픔에서 자유로운 자의 살아남음을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가, 슬퍼해야 하는가.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살아남았다면, 정말 그랬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슬픔은 계속 누군가를 미워하길 부추기도 있다. 이 낯선 선동 앞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학로에 가면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희망이 진실이라면 희망을 보여주라. 하지만 오직 희망만이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망이 진실이라면 나는 절망을 보여주라 말하고 싶다. 절망의 끝에서('에밀 시오랑')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이다. 진실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진실이란 희망을 희망하는 것, 이것이 리얼리스트가 불가능한 꿈을 현실적으로 꾸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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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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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4권(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롭게 번역됐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만난 건 고1 때로 기억하는데 독서력이 일정 수준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들었으니 결과는 (안 봐도)'비디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밌는 건 국일미디어 판으로 나온 이 시리즈를 7권까지 읽었다는 것이다(스피노자의 에티카나 칸트의 순수이성/실천이상 비판 같은 책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그땐 정말 지금보다 미련했었던 것 같다. 좋은 교육자는 정말 필요한 것이다!). 아니 읽었다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다. 봤다. 시각 정보를 책에서 머리를 운반했다. 문장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숫자 세듯 눈으로 좇았다. 때로 반 장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하마터면 한 문장으로 한 장을 다 채울 뻔한, 혹은 채우기도 하는 '신기한' 문장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내겐 특별한 독서경험이었다. 


재작년 파주 북소리축제에서 르 끌레지오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강연을 했는데, 그 이후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이런저런 강연이나 글귀에서 프루스트의 문학적 가치와 의의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워들으면서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왕이면 새롭게 번역된 책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읽고 싶어서 리스트에 살짝 올려본다. 



3. 얼간이 윌슨(마크 트웨인)


창비 세계문학 전집 31번째로 마크 트웨인의 얼간이 윌슨이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참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정작 톰 소여의 모험 한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꼭 읽을 생각인데 요즘 소설을 잘 읽지 않다 보니... 언제가 될 지 기약할 수 없는, '통일' 같은 약속인 것이다. 한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는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되었던, 지금은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된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에서 톰 소여의 모험을 한 적이 있는데 읽어준 한국작가가 다름 아닌 박민규 작가였다. 나는 이 연재를 꼬박꼬박 챙겨봤는데 그 이유는 한 줄 백일장을 통해 당선된 이에게 책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가면의 고백, 톰 소여의 모험, 수레바퀴 아래서, 총 세 번 당선된 걸로 기억한다. 그때 박민규 작가가 내 덧글에 덧글을 달아줘서 꽤 기분이 좋았는데 창비 홈페이지에서 피터, 폴 앤 매리 연재글을 보니 매 덧글마다 덧글을 달아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면서 그때의 기쁨이 조금 퇴색된 감이 없지 않다. 어쩄든 문학동네에서 덧글을 달아준 박민규 작가의 아이디는 killboy였고, 마크 트웨인의 얼간이 윌슨은 'killboy' 못지 않게 섹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리틀 드러머 걸(존 르 까레)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작품으로 친숙한 스파이소설의 대가 존 르 까레의 작품이다. 잘 몰라서 이하 생략.(근데 읽고 싶은... )





5. 느리게 배우는 사람(토마스 핀천) 


해럴드 블룸이란 미국평론가에 의해 돈 드릴로, 코맥 매카시, 필립 로스와 더불어 현존하는 미국의 4대 작가로 꼽히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토마스 핀천의 작품이다.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샀는데 아직 못 읽어봤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과 함께 읽어야 겠다는, 통일 같은 약속을 다시금 해본다. 어쨌든 언젠가 이뤄질 약속이니까. 죽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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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5-01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갈이와 리틀드러머 읽고 싶네요. 카레.. 이 양반 확실히 매력덩어리입니다.
그보다는 마크 트웨인 할아버지가 한수 위죠... ㅎㅎㅎㅎㅎ
이 할아버지 정말 좋습니다.

rendevous 2014-05-01 12:54   좋아요 0 | URL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제목이 쥑여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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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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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작, 전은경 옮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이 친구와 만나면 대부분 12시간은 넘겨야 헤어지기 때문에 기록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이상 친구에 대한 애정만 커질 뿐 친구와 나눴던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몇몇 편린들. 기형도 25주기, 함돈균 문학평론가, 미쉘 뷔토르 '변경', 알랭 로브그리예, 페르난두 페소아, 로만 야콥슨... (왜 우리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더 유창해지는가!) 실상 이름만 알 뿐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무명으로 이뤄진 대화 속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란 이름이 나왔다. 난 문지 시집 뒷장을 뒤적거리며 보았던 황인숙의 시집 제목을 떠올렸고 아는 척을 했으나(이 책도 역시 읽어보지 않았다) 그는 해외소설이라며 나의 허튼 수작을 단칼에 단죄했다. <변경> 뒷표지에 적힌 줄거리를 읽더니 친구는 그 책과 이 책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차라는 공간, 포르투갈이란 유럽이지만 약간 변방의 느낌을 갖고 있는, 옛날 같았으면 에우제비오와 루이스 피구, 파울레타, 콘세이상,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나라였겠지만 지금 내겐 페소아의 나라로 기억되는 나라. 2007년에 발간된 적 있는 이 책이 7년만에 단행본으로 묶여나오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추천글 중 하퍼스의 글이 가장 인상적인데 저자의 철학적 면모를 사르트르에 비교하고, 작품적으로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에 비교하다니... 음... 닥치고 읽어야 겠다. 


 토마스 베른하트르 작, 배수아 옮김


번역가로서 맹작업 중이신 배수아 작가?번역가 님의 신작?이라고 해야 하나? 무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배수아의 손을 거쳐 97년 판에 이어 17년 만에 재탄생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문학동네 세계문학 '몰락하는 자'로 이름은 낯설지 않았지만 이 책 역시 읽어보지 않았으므로...(추천리스트를 쓰면서 자괴감이 점점 쌓여가네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란 20세기 천재 철학자와의 저자와의 요상한 인맥 - 실상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나눈 기이한 우정에 대한 회고록

이라고 하는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 


뭔가 에곤 실레 그림 같은 삐딱하고 불온한 표지 그림이 반은 먹고 들어가고?! 

뭔가 지적이고 어려울 것 같지만 읽어보고 싶은 느낌을 팍팍 주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안토니오 타부키 작, 박상진 옮김


드디어 읽어본 작가 등장! 후훗.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선집을 통해 '꿈의 꿈'이란 독특한 타부키의 세계를 만나본 기억이 있다. 이 책은 페소아를 사랑한 그가 보내는 연서, 이런 표현이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죽음으로 인해 '빈집'에 갇힌 사랑의 노래, 자기위로와 연인-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연서 같은 레퀴엠이다.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페레이라가 주장하다'가 있는데 추천글을 보니 레퀴엠을 먼저 읽어보고 싶어진다. 페소아의 일기를 모은 불안의 책이 있지만 배수아 작가가 새롭게 번역한(완역한) 불안의 서와 함께 페소아, 리스본, 타부키 - 꿈, 환상, 현실이 뒤섞인 아름다운 세계로 훌쩍 떠나보는 건 어떨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작, 김윤하 옮김


나보코프의 유작. 그는 가족에게 이 미완성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카프카의 원고들처럼 다행히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작품들(근데 태우고 싶은데 자기가 태우지 왜 이렇게 지인에게 부탁을 하는 걸까요? 갑자기 궁금해지네... 하긴 소송 같은 작품을 보면 대가들이 생각하는 '완성'과 범인이 생각하는 '완성'의 갭이 좀 큰 것 같긴 하지만 ㅜㅜ) 고등학교 때 읽었던 작품들 중에 기억이 전혀 안 나는 몇몇 작품이 있는데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그 중 하나였다(그 그룹의 대장들은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등이 있다...) 롤리타, 절망 같은 작품들을 갖고 있는데 나보코프의 창작노트를 엿볼 수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조금은 더 수월하게 그 책들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중혁 저 


빨간 책방에서 흑임자로 맹활약 중이신 김중혁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펭귄뉴스에 수록된 단편 몇 개와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수록된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장편소설 좀비들 정도를 읽어봤다. 최근 한국과 영어로 두 개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링궐에디션 시리즈에서 김중혁 작가의 작품이 하나 실렸는데 카테고리가 '유머'란다. 적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최대 무기는 유머라고 생각한다. 웃음으로 상대방의 긴장을 풀게 만들면서 조금씩 접근해 보통 같으면 기억에 남는 강펀치 한 방을 날리고 퇴장할 텐데 그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읽을 때는 무슨 내용인지 다 알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다 읽고 나면 뭐가 뭔지 헷갈려 다시 읽게 되는... 

뛰어난 가독성과 유머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이상한 꿈을 꾼 듯한 찝찝한 기분이랄까, 눈 뜨고 코 베인 격이랄까. 역시 '구들링'(구들장에서 뒹글뒹글하며 몽상을 하는 것)의 달인답다. 리드미컬한 문장과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독자를 소설의 '막장'까지 쉴 틈 없이 끌고 간다. 아마도 그와 주파수가 맞는 독자라면 그 열차는 'express'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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