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저자이름을 눈으로 훑어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공동묘지잖아. 실로 그랬다. 책장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은 적게는 수십 년 전, 많게는 수 천 년 전 죽은 이들의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나무-숲 관계의 반대버전이었다. 나무 한 그루, 작가 개개인의 개별적인 작품과 약력을 봤을 때 이들은 그저 비범한 재능과 비상한 성실성으로 대단한 성취를 거둔, ‘성공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그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보니 이들을 한데 묶는 어떤 근원적인 에네르기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몇 천 년 전부터 내려져온 신화에서부터 가장 전위적인 언어로 쓰인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색깔(인종)도, 모양(외모)도, 장르도 제각각이었지만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물질적 근친성 때문인지 텍스트라는 기표적 통일성 때문인지 그들이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함께 흐르게 하는 뿌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문학의 신’ 같은 낭만적, 추상적 표현보다 좀 더 실재적, 구체적인 표현을 찾고 싶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책의 등뼈를 응시해본다..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줄기를 뻗으며 곧게 서 있는 뿌리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지금의 나로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독.
고독은 내면 깊은 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하고(릴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하며(고독의 발명-폴 오스터), 그렇게 실존적 고독을 통해 고독의 실존자가 된 이들은 고독이란 근본감정 속에서 연대한다(고독의 연대-은희경). 모든 문학이 고독을 다루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문학이 고독의 자궁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만난 책들 중에 가장 섹시한 뒤태의 소유자였던 김중혁 작가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통해 간간이 들을 수 있었던 ‘그 소설’이 ‘이 소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소설이란 걸 알게 되고 약간의 고충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떻게 리뷰를 쓸 것인가. 그의 스텝은 경쾌하다. 경쾌한 상상력과 유머로 무장해 “좀 더 느슨한 세상”(빨간책방에서 언급)을 지향하는 그의 소설은 신형철 평론가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적었듯 37.5도의 미지근한 열정이 느껴진다. 독자를 주눅 들게 하면서 동시에 작가를 경탄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문장력이나 인간과 세상에 대한 대가적 통찰은 그의 소설의 무기가 아니다. 김천 출신 문인 3인방 – 김연수, 김중혁, 문태준을 놓고 각각 도서관형, 박물관형, 마을회관형이라 표현한 것처럼 김중혁의 세계는 박물관, 세상에 잡다한 존재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독특한 온도와 분위기,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그 느낌이 꼭 밴드음악과 닮았다. 보컬과 기타, 베이스, 드럼 혹은 트럼펫, 키보드 같은 악기들이 처음엔 좀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더니 투덕거리며 시간을 함께 견뎌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내게 ‘볼매’다. 뇌쇄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으로 어필하기보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천천히 마음에 스미는 정든 친구 같은.
실제로 '모든 게 음악' 음악에세이를 낸 작가이기에 밴드 이야기를 조금 꺼내봤다. 그의 부드러운 칼날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멀어져가는 휘파람 소리처럼 은은하게 유혹해오는 책의 뒤태를 살펴보자.
제 귀는 아주 깊은 우물입니다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세요
나를 둘러싼, 내가 모르는 세계로 향하는 비밀의 문
“여기가 구동치 사무실이 맞습니까?”
당신은 그토록 무미건조한 월요일에 나를 찾아왔군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이여,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사랑만이 덧없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어요.
뒤표지의 그림이나 전체적인 느낌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제법 닮았다. 비밀의 은유로 그림자가 자주 쓰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빛을 받으면 내 안에 숨어 있던 어둠이 내장처럼 길게 늘어진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다. 인간에 내재한 어둠 속에 고이는 비밀은 인간이 스스로를 이성(빛의 언어)으로 정복할 수 없게 만든다. 근원적 한계이자 일종의 안전장치라 볼 수 있다. 존재 내 이질성, 내가 아닌 나,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나, ‘나’라는 확고한 주체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작은 나(들)와의 끊임없는 불화를 통해 페소아나 이상 같은 시인들은 헤테로의 언어를 발명해냈다. 비밀이 그 자체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문학은 비밀의 비밀을 꿰뚫고 있다. 비밀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형식 중 하나이다. 인식론의 문제나 물 자체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뭔가를 아는 존재라기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에 가깝다. 광활한 우주에서 코딱지보다 한참 작은 지구에 살지만 우리는 당장 옆집에 사는 이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 정보의 영역은 물론이요, 진위를 가려내기 어려운 진실의 영역이 천 길 물속보다 알기 힘들다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러니까 70억 이상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단지 중력의 존재로 말미암아 추측할 수 있는 암흑물질이라고 하니 그런 점에서 볼 때 어쨌든 우리는 우주의 섭리에 잘 따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비슷한 문장을 다른 탐정 이야기에서 들은 적이 있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10기 탐정들의 진혼가에서 한 남자는 비밀은 남녀의 사랑을 돈독하게 해준다고 했다. 자신의 일부지만 그 일부로 인해 전부인 자신이 파괴될 수 있는 비밀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뜻이 될 것이다. 관계는 상대방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많아지면서 깊어지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어느 한계선을 넘어가면 비밀과 관계의 역학 그래프가 변곡점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범이 아닌 이상 상대방의 살인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의 신뢰가 굳건히 유지되리라 생각하기 힘들다. 비밀에 의한 신뢰도 형성에도 브레이크 포인트, ‘알면 다치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는 것이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비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는 자신의 모든 기록들을 ‘딜리팅’하는 직업을 가진 전직 경찰 겸 사립탐정 겸 딜리터(deleter)이다. 줄거리를 자세하게 적어 독자들의 서사를 따라가는 재미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핑계를 댄다). 비밀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들의 각축전을 작가는 노련한 솜씨로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그의 소설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는 ‘섹스’ 묘사도 비록 영화 속 장면이긴 하지만 있다(그것도 떼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썸’타는 남녀 주인공의 밀당이나 조금은 엉뚱한 매력을 어필하는 조연 캐릭터의 존재가 그의 전작 장편 ‘좀비들’을 연상시켰다. 당신의 그림자의 월요일의 후배탐정과 좀비들의 뚱보가 오버랩됐다. 어떤 매너리즘에 대해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김중혁 세계의 고유성, 그만의 느낌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다. 김중혁 월드의 입구에는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딱 귀여운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상한 포즈로.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정소윤이 그랬듯 나의 기억은 우리의 기억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숙명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기억, 우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자세에서(이영광 – 우물) 윤리를 논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지식은 체계화된 기억이다. 90%이상 소멸되는 죽음의 늪을 지나 살아남은 기억이 장기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말로, 글로, 음악으로, 영상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져 인간은 현생에서 수많은 영혼이 농축된 오래된 현재를 살고 있다.
하지만 망각의 문제 역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공공선을 침해하지도, ‘일리아드’나 ‘let it be’처럼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망각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자신의 기록을 지워 저승에서까지 이생에서 좋은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망을 이기적이라 지적했지만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반영구적으로 보존돼 자연스럽게 망각, 정신적 차원에서의 죽음을 맞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기억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력한 바 있다. 이는 마지막 딜리팅의 대상인 사진을 피오르드 바다에 던짐으로써 망각의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간에게 우의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기록하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은 하드디스크에 파일이 저장되듯 기계적으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의 정보의 감각과 감성의 영역이 뒤섞인 총체적 감각에 의해 이뤄진다. 단순암기라 생각되는 작업의 경우에도 우리는 텍스트를 읽어 청각적 자료로 변환하거나 머릿속에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등 감각과 감성을 이용한다. 또한 기억할 수 있는 양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지향성에 의해 ‘선택된’ 기억만이 생을 이어갈 수 있다. 물론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만 인간이 기억과 망각의 세계를 오가며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재단하는 존재라는 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구만 지키지 말고 그림자도 지켜야 할 것이다. 이승에 버려진 그림자가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물에서 허우적대는 이처럼 길을 잃지 않도록 기억(망각)의 책임이 있는 자들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생사를 결정하는 천계의 심판관처럼 무엇을 기억하고(잊고) 살 것인지, 무엇으로 기억되고(잊히고) 죽을 것인지.
p.s 이제야 읽는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 중 종이물고기에서 ‘공동묘지’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발견했다. 기억이여, 당신은 언제나 태어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