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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장 중요한 20세기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철학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제자들에게 의사나 기술자의 길을 권했다. 자신의 충고를 거부하고 교수가 되려하는 제자 노먼 말콤에게는 다음과 같이 경계하기도 했다. "만약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얻는 효용이 그저 어떤 심오한 논리학의 문제들 등에 관해서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너의 생각을 개선시키지 않는다면, 만약 그것이 너를,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위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여느 기자들보다 더 양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확실성, 확률, 지각 등에 관해서 잘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 진정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어렵다.“
철학의 길이 얼마나 배타적인지, 자칫 범인(凡人)이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소리로 철학적 탐구가 끝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독한 천재로, 세속의 성자로 철학을 한다기보다 철학을 살아낸 그였기에 그의 충고에서 허세나 소명의식이 아닌 진심을읽어낼 수 있었다. 천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소설의 화자인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루드비히가 교향곡을 통쨰로 휘파람으로 불었다고 하는데 파울 역시 오페라공연의 성공여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오페라 광이었다. 루드비히가 어렸을 때 집안에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유명음악가들이 초대되기도 하고, 그의 형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걸 보면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음악적 기질은 유전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음...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군!
천재적 철학자는 칸트가 천재라 부른 이들은 예술가였다. 자신을 끊임없이 뛰어넘는 초인사상을 전개했던 니체가 어린이를 찬양한 것도 예술가와 어린이의 근친성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요즘 자주 사용되는 ‘뇌가 섹시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토마스의 시선에서 매우 아름답게 그려진다. 과거 축구황제라 불렸던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무릎부상 등으로 기량이 하락한 것을 두고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논평했다. 인간의 육체가 신적 재능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파울의 정신병도 인간의 육체가 감당해낼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 재능의 악마성의 영향이 있었던 건 아닐까? 물론 그가 작가의 진술처럼 정말 삼촌만큼의 명석한 두뇌를 자랑했는지(‘나는 그와 같이 예리한 관찰력과 비상한 사고력을 갖춘 사람을 예전에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p34)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사실진위 여부가 그다지 중요해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광기에 있어서는 파울이 천재적이었다는 것을, 그가 광기의 천재였음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토마스는 이를 ‘특유의 냉소적 모놀로그’로 읊조린다.
단지 파울은, 그의 재산을 그랬듯이 사고력마저도 끊임없이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창밖으로 던져진 재산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바닥나버린 것에 반해 그의 사고력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그는 사고력을 쉴 새 없이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러면 사고력은 (동시에) 쉴 새 없이 증폭되었다. 그가 사고력을 (머리속의) 창밖으로 던지면 던질수록, 사고력은 더더욱 증가했다. 자꾸만 쉴 새 없이 정신적 능력을 (그들 머릿속의)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동싱, 머릿속에서는 (그들 머릿소의) 창밖으로 정신적 능력을 던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속도로 정신적 능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처음에는 미쳤다가 나중에는 광증환자로 발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이 점점 더 많은 정신적 능력을 (그들 머릿속의)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더 늘어나고, 따라서 당연히 점점 더 위협적이 되고, 종구에 가면 그들이 정신적 능력을 (그들의 머리에서) 밖으로 집어던지는 속도가 머릿속 정신적 능력의 증가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어,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정신적 능력이 꾸역꾸역 쌓이다 못해 마침내 머리가 터져 버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파울의 머리도 터져 버린 것이다. 정신적 능력을 (그의 머리에서) 밖으로 집어던지는 속도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니체의 머리도 터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광적인 철학자의 머리가 마침내는 터져 버린 것이다.(p34~35)
이 작품이 자전소설로 알려졌는데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토마스는 왜 굳이 파울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소설의 소재로 삼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분명 파울은 루드비히와의 혈연적 관계를 차치하고서라도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소설의 무대에 올린데 이견이 없지만 그와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전소설이라 해서 특별한 독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과거에 읽었던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나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에 비해 입구를 찾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 아마도 자전소설이지만 주인공의 내면보다 파울에 집중하는 관찰자 시점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옮기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는 인간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그만큼 냉혹하게 증오했다. 그는 부자의 입장에서 부자를 보았으며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를 보았다. 건강한 자의 입장에서 건강한 자를, 병자의 입자에서 병자를 보았다. 그리고 미치광이의 입장에서 미치광이를 보았으며 정신착란자의 입장에서 정신착란자를 보았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다시 한 번 더, 이미 수십 년 전에 자신과 친구들이 만들어 낸 화려한 전설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장전된 리볼버 총을 손에 들고 잔뜩 흥분한 상태로 노이에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쾨세르트 보석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문턱에 서서 진열대 뒤편에 서 있는 보석상 주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고트프리트에게, 어떤 특정한 진주를 내놓지 않으면 당장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는 것이다.(...)그러자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왕관에 박혀 있는 진주 말이다! 그가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것은 파울의 마지막 장난이었다.(...)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 주었으면 해, 하고 파울은 나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합해서 여덟 명 혹은 아홉 명이 저부였다고 한다. 그때 나는 크레타에 머물면서 희곡을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 썼던 희곡은 완성된 다음에 찢어 버렸다. 나중에 나는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그는 사촌의 보석상을 습격한 지 며칠 뒤, 내 짐작과는 달리 그가 매번 실려 갔던 곳이고 그 자신도 사실상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그 슈타인호프가 아니라, 린츠의 한 병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빈의 중앙묘지에서, 흔히 하는 표현대로하면, 안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그의 무덤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p139~141)
‘오직 떠나 온 장소와 도착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하’는 토마스는 이렇게 친구를 보냈다. ‘머리를 최대한 사용하면서 살아야 하는’ ‘대도시’가 자신에게 ‘아둔한 맹목에 빠진 채 자연을 감상적으로 칭송하면서 그 안에서 퇴화해가’게 하는 ‘시골’보다 ‘백배나 더 나은 장소’라고 말하는 토마스는 이렇게 친구를 보냈다. ‘상이란 한 사람에게 똥물을 뿌리는 행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토마스는 이렇게 친구를 보냈다. 물론 그는 크레타 섬과 장례식장 사이의 물리적 거리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그만의 애도 방식이 아닐까 희미한 의심을 가져 본다. 슬픔의 해소를 거부함으로써, 슬픔을 생의 끝까지 유예시킴으로써 슬픔과 결부한 한 인간의 기억을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가겠다는 삐뚤어진 사랑이 그의 부재를 꽉 채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그의 마음을 내 맘대로 해석하기로 한다. 불온하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