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사기 시작하고, 2012? 2013년부터 알라딘 중고매장을 부지런히 다닌 결과 내가 소장한 책 중 절판된 게 꽤 많이 생겼다. 생물로 따지면 멸종된 셈인데 DNA 정보는 있으니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든 다시 생명을 되찾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이?' 하게 만드는 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책이 절판된 걸 확인하면 씁쓸한 마음이 들긴 한다. 학술서는 성격상 대중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다 쳐도 한국의 출판 ㅡ 학술 인프라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장목록 중 절판된 책 목록(알라딘 기준)
김춘수 시 전집(현대문학)
부조리극(한길사)
파르지팔(한길사)
니체(문예출판사)
한국영화연감 2010(커뮤니케이션북스)
수학과 음악(경문사)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존재와 진리(철학과현실사)
신학요강(나남출판사)
헐리웃 문화혁명(한나래)
산티아고 가는 길(민음사)
아날로그맨1(새만화책)
현대문학이론 입문(시유시)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이후)
아미엥에서의 주장(솔)
남성성과 젠더(자음과모음)


절판된 책 중에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코넬의 남성성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카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로
루이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
라인홀트 메스너의 죽음의 지대
는 정가보다 좀 더 비싸게 팔았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최초의 주문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불로소득이랄까 예전에 페북에서 어떤 젊은 인문학자 분이 꼭 필요한 학술서인데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측정해서 못 샀다는 얘기가 마음에 걸려서 중고최저가보다 9천원 정도 싸게 해서 팔아치웠는데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이 책정한 최저가에 맞추거나 일단 비싸게 책정해놓고 안 팔리면 점진적으로 낮추는 식의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다.
읽었던 책이나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을 지금 당장 필요한 책이나 생활비로 전환할 수 있어 좋긴 한데 책을 보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빈 서판은 아직 못 읽었는데 스캔을 하기에 책이 너무 두꺼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고책 셀러를 하면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어떤 책을 어디 사는 분이 주문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교회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을 주문했을 때. 한국에는 그렇게 극단적 무신론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비판하는) 논자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극우 반공 ㅡ 반동성애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기독교에 진보적 기독교 세력과 페미니즘 세력 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부류가 추가된다면 논쟁의 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다.

 

죽음의 지대 같은 경우 이동진의 언급 및 추천으로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4년 전 히말라야 트랙킹 갔을 때 재밌게 읽고, 정가보다 만원 정도 더 받고 팔게 돼서 이동진 님께 심심한 감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책을 팔다 보니 문득 책이란 사물의 생산과 유통, 상품으로서 책이란 사물, 매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여유가 된다면 낭시의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를 읽어 내용을 좀 더 풍성하게 채우고 싶지만 그 일은 추석 연휴로 미루고 생각나는 대로 단상을 늘여놓아 볼까 한다.

 

로쟈는 📚종이책이 더 이상 진화하기 힘든 완벽한 사물에 가까워 전자책이나 다른 매체에 의해 쉽게 대체되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얘기한 적이 있다. 확실히 '가성비'로 따지면 책만 한 게 없다. 하드커버 는 꼭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페이퍼백은 넘사벽이다. 물론 🌳로 남아 있는 게 나았을 쓰레기 또한 출판시장에 판을 친다. 푸코 말대로 자기에게 운명적으로 정해진 독자를 초과하며 잉여의 대중소비자를 끌어모으는 책이 있는데 82년생 김지영처럼 시대정신과 만나면서 인민의 사유와 감수성을 집결시키는 병참기지와 같은 베스트셀러가 있다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이 시장의 트렌드를 잘 읽어 히트친, 그래서 유행이 지나가고 나면 폐기물로 버려질 일회용 상품들도 있다 ㅡ 그들 모두 독서사 연구의 중요한 자원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ㅡ

바우만의 책 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 이란 제목이 있는데 어떤 책들은 자신의 사용가치만으로 끝끝내 쓰레기가 되기는커녕 조물이 되어 세월을 견뎌낸다. 이는 저자를 비롯한 출판노동자들의 장인적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시간에 쉽게 풍화 침식되지 않는 뿌리가 깊고 줄기가 튼튼한 지식 ㅡ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고, 성실하게 주체적으로 앎의 네트워크를 조직해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지성체들의 존재 때문이다.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의 중요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대중출판을 통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걸 보면 책이라는 게, 사람 얼굴만한 종이뭉치에 혁명적 잠재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더불어 도서관이란 공간, 소사회가 생각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란 생각이 든다(영화관 또한 민주주의를 공간적으로 생각할 때 중요한 모델로 참조될 수 있다).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공유경제의 기원적 모델이 도서관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용해도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과 휴대하기 편하다는 점으로 인해 책 ㅡ 도서관의 공유모델이 빨리 만들어진 것일 뿐 사물 인터넷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좀 더 많은 공유지, 공통적인 신체의 발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에 실린 배인철의 <알파고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하나의 가설>을 읽어보면 알파고가 상대방과의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수가 아니라 자신의 학습에 있어 가장 도움이 되는 '최선의 수'를 둔다고 했을 때 알파고vs알파고의 대국에서 양쪽이 데칼코마니 같이 대칭적으로 수를 배치하는 형국이 연출된다는 식으로 설명한 바 있다. 승부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당황시킬 만한 변칙적인 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만 승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는 알파고에게는 이를 테면 추접한 난투극에 의한 승리보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예술로서의 바둑’을 두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이를 테면 알파고에게는 먹여 살릴 처자식이나 승패에 따른 심리적 동요가 없기에 프로그래밍된 언어를 그대로 실현하는 순수이성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에서 협력으로 패러다임 시프트를 하자는 주장은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생물학을 위시한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입을 모아 인류의 발전 원동력으로 이타심 및 협력의 증가로 꼽는다. 미래사회는 초연결사회라 불리는 현대사회보다 좀 더 연결될 것이다. 기계와 신체 및 정신의 결합이 늘어날 것이며(포스트 휴먼), 기계와 도시의 결합이 늘어날 것이며(스마트 도시, <1984>빅 브라더?), 트랜스한 운동들이 기존의 경계들을 넘나들 것이다. 책-도서관의 모델에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를 발견할 수 없을까? 사실 거칠게 생각해서 책-도서관에서 연구만 추가되면 이게 대학(<살롱 안드로메다>의 트인 선생님이 얘기했듯 대학‘교’가 아닌)의 원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인문사회 계열에 한정시켜야겠지만 대학의 연구자는 책을 읽고 홀로 지식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의 새로운 것을 생산해 선순환적 구조를 이룬다. 이걸 우정의 고리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건 함께 읽고 쓰고 사유하고 느낌으로써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와 젊은이들이 그랬듯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육체적이고 에로틱한 활동이라 하지 않는가. 누군가 자신의 글을 세심하게 읽고, 공감하고, 자신이 글로 미처 다 쓰지 못한 ‘쓰여진’ 공백을 말해준다면, ‘쓰여지지 않은’ 문자를 읽어준다면 영혼이 어떤 흥분도 느끼지 못하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 사유의 거래, 감정의 교통, 누군가의 독자가 되겠다는/되었다는 선언은 그/녀를 사랑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가장 내밀하면서도 가장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기술이 책과 도서관을 통해 발명되고, 재발명된다.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 우리 시대 최고의 책쟁이 중 한 명이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책 제목이다. 출판사에서 붙인 제목이지만 원제와 상관없이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잠깐 자랑을 하자면 나는 2010년경 즈음에 이벤트에 당첨돼서 움베르토 에코 컬렉션 + 미의역사 + 추의 역사를 열린책들 출판사로부터 받은 바 있다. 흥해라 열린책들-미메시스!!). 열린책들 얘기가 나온 김에 베르나르 베르베르 얘기를 잠깐 하자면 그는 어디선가 정치가 천 년이나 미래 후속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좇는 세태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한탄한 바 있다. 뭐, 이 발상 자체는 굉장히 나이브하지만 어쨌든 권력의 마수에서 벗어나 있는 지성인들은 고민해야 한다. 천 년을 살 것처럼 오늘을 사는 방법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 저절로 우리는 별의 자식들이란 생각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이렇게 바꿔야겠다. 우리는 책의 자식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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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역사적 인간 4
하타노 세츠코 지음, 최주한 옮김 / 푸른역사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1 문청

 

 20살 3월에 6학년 때 좋아했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이후 몇 번 수원에 놀러왔고, 한 번은 길가다가 마주쳤지만 인사를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 친구와 같이 있던 얘(나도 아는 사이였던)가 과자를 사달라고 부탁해서(삥을 뜯어서) 과자를 사준 기억이 있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이후 그 친구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문을 닫은 싸이월드에서 몇 장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20살 입시를 망치고 방에 틀어막혀 동굴러로 살아서 외로움이 고여 있어서 그랬는지, 단순히 남들이 다 하니까 유행의 시류에 편승했던 것인지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하루는 종일 기억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검색해보며 쉴새없이 친구추가를 요청하고, 승인하는 작업을 반복했고, 한 일주일 동안 타임라인을 기웃거리다가 소외감과 열등감에 절어 탈출하듯 빠져나왔다.

 

 이 일주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학년 때 좋아했던 친구와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아 하루 시간을 함께 보낸 일과 중학교 1학년 때 음악시간에 내가 자위를 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인생 최대의 곤혹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 친구와의 채팅이었다. 전자는 내가 먼저 연락을 했으며, 후자는 상대방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사건의 발달은 점심시간에 미친 듯이 뛰어놀고, 5교시 음악시간에 바지에 손을 집어넣어 사타구니를 긁었던 게 화근이었다. 참기 힘든 수준의 가려움이었던 것도 있지만 사실 학원에서나 그 동안 대놓고 한 건 아니고, 나름대로 은밀하게 해왔던 행동이라 습관적으로 별 생각 없이 긁었던 게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다섯 명 정도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쉬는 시간에 나를 불러 음악시간에 자위를 했냐고 물어보았을 때 ...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이 밀려 들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더 헌트>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원인이 여기 있었던 것 같다) .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친구가 이야기를 퍼뜨린 여자 아이에게 해명을 전달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후에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섬뜩하다. 그런 기억을 안겨주었던 친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저 연락을 걸어와서 굉장히 심경이 불편했고, 그 사건을 언급하며 일종의 사과를 요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생기는 격이 될까 싶어 상투적인 대화만 나누다가 연락이 끊겼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성년이 되어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인데 청소년기를 불완전하고, 자기통제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미시정치적 통치를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에 격렬하게 반발심을 느끼면서도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이제 막 성에 눈을 떠 성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기의 여중생과 아직 자신을 객관화시켜 유아론적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탈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남중생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딱히 그 친구가 내게 피해준 것도 없기에 원한 감정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한 가지 궁금증은 남아 있다. 만약 그때 내가 채팅창에 그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면 그녀는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 - 혹시라도 나중에 중학교 동창회를 간다면 나를 음악실에서 '딸딸이' 친 변태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갈 일도 없겠지만.

 

 이광수에게 고아 컴플렉스가 무의식상의 핵심적인 중추를 이루듯 내게 있어 무의식에 남겨진 원초적인 상흔은 카프카식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대문자 '아버지'의 형상이거나-그래서 초자아란 빅브라더의 감시 아래 내 욕망을 끊임없이 유예하거나 어느 수준이 되면 포기하거나- 내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언행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를 삼키는 형상-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흰 종이 위에 모든 생각과 감정을 배설하려 해도 정신적, 심리적 괄약근에 가해진 일정 수준 이상의 긴장이 풀어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 공간에는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청문회'적 상황을 생각하며 자기검열을 반복적으로 해온 탓에 말하고자 하는 욕구 자체가 조금 감퇴되는 데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또, 올해에만 생애 최초, 그리고 두 번째로 필름을 끊기는 경험을 했는데 정말 공포스러웠다 -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문학소년' 같다는 얘기를 듣고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스스로를 문학소년으로 정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타자에 의해 그렇게 '호명'된 경우는 거의 처음이었기에 기분이 묘했다. '문''학''소''년'. 새삼 어감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문구를 마주할 때를 제외하고 책에서나 박제화되어 있지 실생활에서 만날 수 없는 화석 같은 '소년'이란 단어가 이렇게 상냥하고 몽글몽글할 수 있다니 ! 친구에게 문학소년이라고 불릴 수 있음에 문학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별동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2 끔찍한 모더니티

 

 문학소년 시절 백지와도 같은 상태였기에 스펀지처럼 예민하게 텍스트를 흡수하면서 생각에 있어서나 감정에 있어서 과잉과 결핍이 자주 돌출되었다. 이원 시인은 이런 과잉과 결핍에서 시적인 것이 출현한다는 식으로 얘기한 바 있는데 나는 그런 과잉과 결핍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중도에 가깝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모난 부분들을 깎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문학이 그런 '모범생'적인, 거짓된 완벽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진실된 불완정성을 용기 있게 보여주는 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내게 문학은 철학의 개념적 사유로 포착되지 않은 감성적인 부분까지 아울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예술, 뭐 그런 비스무레한 것이었다. 이런 인식은 대두와 같은 형상을 띠고 있을 내면적 자아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광수가 세상을 움직이는 동인을 욕망과 힘에서 찾고,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에 감화되어 민족의 개조와 계몽을 외치는 민족지도자를 자처하기까지(그래서 최남선은 이광수를 <무정>을 두고 칠흑 같이 깜깜한 밤에 홀로 울리는 쇠북과도 같았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 불모의 땅 조선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뜨거운 피가 되기를 자처한 춘원...) 그의 고아의식과 자전적 정보들, 특히 일본유학의 경험-근대(성)과의 충격적인 조우 : 황지우가 문학앨범에서 기차를 처음 본 경험을 두고 모더니티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해 증언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경우 근대를 우리가 따라잡아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일본으로 표상되는 근대를 선망과 열등의 이중적인 시선으로 봤다는 차이가 있지만- 등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에서 마음의 지도와 궤적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오늘날 우리도 한국보다 선진적인(사실 이 표현 자체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먼저' 나아갔다는 측정기준에 대해, 먼저 나아간 국가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catch up modernity의 무의식에 대해 말이다) 나라에 가서 그 나라를 거울 삼아 '헬조선'의 후진성과 선진국(천조국과 구라파)의 선진성이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선망과 열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 당시 자신의 왜소한 체구를 강렬하게 자각했으며 서구인들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꼈다. 얼마 전부터 읽고 있는 <산시로>의 초입 부분을 보면 서양 미녀에 대한 찬미적인 시선이 제시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효석이 러시아 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어 동양 및 한국남자들의 서양미녀에 대한 동경과 배면에 깔려 있는 열등감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서 여성학자 정희진, 권김형영이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글을 실었고, 오혜진 등의 여성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주제인데 제국주의-인종주의 담론과 더불어 복합적으로 고민해보고 싶은 주제이다.

 (고대 웹진 민연에 연재되었던 염운옥 선생님의 글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에 의해 그리스적 미적 기준이 보편적 미의 표본으로 승격되고, 이 쿠데타가 정당한 권력으로 인준받아 역사를 왜곡하고 재구성했음을 보여준다. 동물원의 동물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고통받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고국의 땅에 묻힐 수 있었던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갈등 등 정치적 갈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특한 질감의 애니메이션과 기계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극을 통해 색다르게, 시적으로 보여준 윌리엄 켄트리지 전에 대한 비평 등 흥미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550&selectCategory_id=70[출처] 서양사의 재조명 강의 참고자료 안내 (역사는 즐거워) |작성자 염운옥)

 

 여행을 통한 자타의 구분 및 인식,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이런 관점에서 많은 징후들을 읽어낼 수 있는 문제적 텍스트이다. 팟캐스트 <살롱 안드로메다>에서 조셉 콘래드, 유길준, 발터 벤야민의 여행을 비교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초반에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식론적 논의는 조금 정신없는 감이 있는데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어를 작가언어로 선택함으로써 모국어로부터 추방을 스스로 선택한 콘래드의 이중언어적 상황, 지배엘리트 계급의 문자인 한자의 철장에서 나와 '언문'과 '영어'를 혼용해서 글을 썼던 유길준(심지어 윤치호의 경우 나쓰메 소세키와 같이 영어로 글을 쓰면 갑자기 조선어(일본어)가 튀어나오고, 조선어(일본어)로 글을 쓰면 영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번역하는 근대, 번역된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상황, 파리-베를린-모스크바- '유대인'으로서, 또 주류 학계에 인정을 받지 못한 아웃사이더로서 유럽을 주유하며 스페인 국경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비평가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The task of translator'라는 획기적인 글을 제기했으며, 보들레르 등의 번역가였다. 문화는 필연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에 의한 번역의 과정을 거처 발전하게 되는데(때문에 문화의originality-고유성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강화하는 데 동원된다. 원본과 사본, 모방과 창조 그리고 표절, 문화 간 번역 등의 주제들을 다룬 단편소설의 박형서의 <아르판>이 있다) 근대는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번역이 국가와 문명 단위로 전개된 시기였다. 경전 같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번역이 아닌 서양과 동양(이 번역어 자체가 메이지 유신의 번역가들이 만들어낸 용어라고 들었다), 구라파/미국과 아시아, 일본 (고유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같은 문제의식들이 본격적으로 발아하고 성장하기 시작했고, 에르네스트 르낭이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서술된 도식대로 이런 타자와의 조우를 통한 민족-국가nation state 단위의 자기인식은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통해 수행되었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일본의 정신을 이식시켜 세계의 중심부에 서고자 했던 일제의 멘탈리티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수상한 수사학(물론 다른 식으로 읽힐 여지가 얼마든지 열려 있지만)에서 변형된 형태로 회귀하여 출현했다.

 

 이런 인식론적 논의에 있어 동아시아 차원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 이는 다케우치 요시미이다.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였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이란 타자를 통해 일본사회를 보고자 했다. 타자 없이 자기동일적 인식의 굴레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다케우치 요시미는 동아시아적 지평, 보편성의 차원을 확보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를 연구한 쑨거는 동아시아 학자 윤여일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타자는 내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안에 있다고도 바깥에 있다고도 고정시킬 수 없는 타자에 의해 구축되는 '시차성'은 사유의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간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나 김상봉이 말하는 서로주체성이 주체 중심적 서양철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제기된 '시차적 관점'들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 등 아직까지 식민지 역사의 적폐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과 일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역사를 어떻게 다시/새로 쓸 수 있을지, 연극 <1945>가 하고자 했던 것처럼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국정화 교과서 논란에서 굴절된 방식으로 비판이 제기된 민족사관의 한계를 뛰어넘어 심판할 것들을 심판하고, 화해할 것들을 화해하고,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3 국민문학, 국민국가

 

 내게 문학이 타인으로부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준 처소이자 친구였고, 빈곤한 어휘와 무딘 언어감각을 단련시키고 연만하는 대장간이었다고 한다면 이광수에게 문학은 민족개조의 소명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자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이 끝나고 대한제국이 탄생하는 시점에 태어나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했던 이광수. 천재적인 두뇌로 사서삼경을 통달했으나 전통적인 지식이 쓰레기가 되어버린 급변하는 격동의 시기에 '힘'과 '실력'을 양성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생물학'을 모르면 안 된다는 격) <무정>의 결론이 기차역에서 만난 네 남녀는 신식 학문을 배워 민족을 부흥시키자는 계몽적 의지에 가득 차 일본과 미국으로의 유학길을 응원하며 헤어지는 게 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서 지적했듯 구텐베르크 혁명의 사회적 파급력을 현행화시키는 매체로서 신문은 '민족어'라는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민족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순국문체로 쓰여진 <무정>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언문일치, 벤야민이 그 유명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적했듯 영화의 발명으로 인해 시지각의 방식 자체에 변화가 일어났듯 말과 글이 일치된 소설 텍스트 읽기경험은 언어를 운반하고 매개하는 대리인agent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감각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입말을 문자언어로 고정하는 데 있어 표기, 글쓰기ecriture의 문제가 개입되고, 애초에 한자를 훈독하여 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고안된 한글이란 매체의 문제가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이었고, 그는 국한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이광수, 최남선을 거쳐 순국문의 언문일치라는 이상을 실현한 것은 '-다'체를 적극적으로 주장, 활용한 김동인 이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503&cid=41799&categoryId=41800)

 

 표음주의와 내면의 발견, 근대적 자아의 확립은 걸어둔 링크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단,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문자체계를 어떤 식으로 한자를 읽고, 소리를 고정할 것이냐의 관점으로 읽어낸 황호덕의 흥미로운 주장을 조금 소개해볼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sinographic cosmopolis 한문공유체에서 sinographic mediapolis한자매개체로의 이행을 논증한다(“The Geopolitics of Vernacularity and Sinographs and the Making of Bilingual Dictionaries in Modern Korea: from Sinographic Cosmopolis to ‘Sinographic Mediapolis’”.) 한문맥,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 등 동아시아를 묶는 범주로 한문공유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구라파 국가들이 라틴어라는 보편문화를 자국의 민족언어로 번역하면서 vernacular한 universality 토착적/지역적 보편성(사실 보편적 토착성과 토착적 보편성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을 구현했듯 동아시아 국가들은 한자라는 보편문화를 각자의 음성적 테크놀로지에 의해 소리를 고정시키는(문학/문쉐?/분가쿠) mediapolis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조선어-한국어의 형성과정에서 일제의 식민통치 등 정치적인 힘이 강력하게 개입했기에 mediapolis 개념은 지리정치학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규율장치로서 언어를 동아시아의 지평과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읽어내려는 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김현은 이광수에 대해 한국문학사의 너무나도 아픈 상처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1960년대 생활문화사>에 실린 글에서 표현했던 대로 한국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패배의 역사, 일본의 식민통치와 미소의 신탁통치, 6.25 동란과 이승만 독재, 군부 쿠데타 및 군부독재로 얼룩진 주인됨과 주체성이 소거된 역사였기에 이런 비극의 역사에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이광수가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을 선동하고 부역했던 사실은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에서 말한 바 있는 '부끄러운' 역사의 결정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 카뮈와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들이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종전 이후 독일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과 정리가 제대로 이뤄진 반면 한국은 제 힘으로 해방을 이뤄내지 못한 탓에 일제 시대에 근무했던 경찰이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근무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 5.18 - 6월 민주항쟁으로 상징되는 투쟁의 역사가 있어 건국 이후에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하기도 하고, 부패한 반민주주의적 정권을 민주주의의 힘으로 몰아낸 승리의 역사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런 역사의 시점에서 이광수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각자가 고민해볼 문제겠지만 후기식민적 상황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죽기살기로 생존해야 하는 헬조선에서 난민들에게 이광수는, 또 무정은 문학사에 박제된 화석이 아닌 돌, 몸속 깊숙이 숨어 있다가 고통스럽게 배출되는 결석과도 같은 게 아닐까. 이광수를 읽는다는 건 그런 돌들을 꺼내 잠복된 상처/고통과 마주하고 고뇌하는, 현재에 남아 있는 식민지의 중층적 시간성, 비동시적 동시성을 겪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s 황호덕 교수님이 언급한 1962년도 판 무정을 영상자료원에 볼 기회가 생기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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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난감

 

 

 

 

  건담기? 에반게리온? 한자 까막눈이 나에게 建談記는 어떤 힌트가 되지 못했기에 극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연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지구용사 선가드 등 로봇이 등장하는 만화영화’(그때 내겐 애니메이션이나 재패니메이션이란 개념이 없었기에)를 즐겨 보는 소년이었지만(그렇다고 웨딩 피치, 카드캡터 체리 등을 즐기지 아니 하지 않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테크트리를 타지 않았기에 로봇 및 건담과의 인연은 교복착용을 기점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 교복을 벗을 때쯤 보기 시작한 영화들에서 꾸준히 로봇들이 다시 출현하긴 했지만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로봇이나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로봇이 어렸을 때 양손에 쥐고 놀았던 건담들과 같은 로봇일 순 없었다.

 

 만화영화를 대신하여 장난감이 되어준 친구는 컴퓨터 게임이었다.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필두로 메이플스토리, 스타크래프트, 카트라이더, 웜즈 등 많은 게임을 체험했다. 생각해보면 내 순수한 자의가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시작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게임을 안 하면 대화에 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축구도 즐겼지만 아직 학원에 속박되기 전 학교가 끝나고, 주말에 CA 활동이 끝나고 PC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순서였기에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지언정 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극장 간 경험이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친척 고모), 괴물로 손에 꼽고, 중학생 때 학교 끝나고 학원가기 전까지 주어진 자유시간이 두 시간 남짓이었기에 게임과 나는 특별한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했던 평범한 남중생의 마음을 달래주는 단짝이 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에도 스타크래프트나 위닝일레븐 같은 게임을 하긴 했지만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 야자레짐의 마지막 세대였기에 다른 취미가 필요했다. 중3 겨울방학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읽었지만 정작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등장인물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감정들을 겪어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느낀 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으면서였다. 이후 세계문학전집이란 장르에 확실히 재미를 붙이면서 독서를 취미로 삼았다. 처음 맛을 '세계'문학으로 들여놔서 그런지 다른 독자들이 얘기하는 번역투의 어색함이나 낯섦에서 오는 어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오히려 (한국)'문학' 수업 시간에 만나는 텍스트들에 질려 있어 한국소설들에 손을 데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카뮈의 이방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권장도서'들을 '격파''정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만났고, 이를 필두로 김연수, 김영하, 박민규, 김애란 같은 젊은 작가, 한국의 대표 작가들과 만나며 한국문학과의 사귐이 시작되었다.

 

 문학은 언제 어디서나 책이란 매체만 있으면 놀 수 있었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 그것도 평소에 알지 못했던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자아와 내밀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장난감으로서 합격점을 받았다. 문장들의 공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새로운 어휘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생각이 다른 궤적들을 그리며 지금까지 닿아본 적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사회라는 곳이 얼마나 중층적인 모순과 아이러니로 점철되어 있는지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가며 깨치면서 짐짓 다른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엿본 것 같아 우월감과 자만심에 살짝 도취되기도 하고, 거짓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 미움에 맞서 사랑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킨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렇게 읽고 쓰고, 생각하며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이어져 한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쩌다 보니 관심이 가지 않았던 근대문학의 선구자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어 문장들을 처음으로 써내려 갔던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색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찰나에 이상과 박태원이 21세기 미래의 청중들에게 발신하는 '건담'을 줄거리로 하는 <20세기 건담기>를 '얼굴책' 게시판에서 발견했고, 곧바로 같은 과 친구들을 단체 전자대화방에 초대해 날을 잡았다. 그런데 일이 생겨 결국 나는 9월 10일에 혼자 관람했고, 친구들은 9월 9일에 다 같이 모여 육회 비빔밥을 먹고, 연극을 보고 감상을 나눴다. 

 

 

 2 경성의 남자들    

 

 기차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지각하고 말았다. 그래도 요즘은 공연 시작 후 15분 후에 지각한 관객들을 위해 입장하는 시간을 갖고, 스크린을 통해 연극 실황을 생중계해줘서 대사 한 토씨 한 토씨 다 듣지는 못해도 대략적인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마이크 앞에 서서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 두 명이 만담을 떨고 있다. 스탠딩 코미디언을 연상시키는 이들은 다름 아닌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구인회의 박태원과 이상. 점잖은 젠틀맨 분위기의 박태원과 약간 촐싹거리는 희극적인 캐릭터 이상은 책에서 읽고 상상했던 모습과 일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이상 역할의 배우를 이상이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러니'를 즐겨 사용하고, 언어유희를 즐겼던 이상이 실생활에서도 말장난(일종의 아재개그)을 남발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작가'(선생님)의 점잖고 무게감 있는 모습과 거리가 있는 게 '이상답다'는 게 조금씩 납득되기 시작했다.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긴 하지만 글을 쓰는 오늘 9월 17일 백남준 아트센터를 다녀와서 그런지

백남준과 이상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움과 권위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 예술이란 장난감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두 사람. 당대 누구보다도 전위적이고 모던한 감각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해받기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이해에 깔려 있는 동일성의 메커니즘을, 관습적인 사고방식과 타성에 젖은 감각에 균열을 내는 불편함을 조장하는 걸 자신의 미학적 윤리로 삼은 모더니스트들. 만약 이상이 식민지 경성이 아니라 동경이나 파리 같은 당대 문화예술의 중심지에서 활동했다면 많은 작품을 남기고, 당대에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칠흑과 같이 어두웠던 시기에 소원이었던 동경에 가서 옥사한 파란만장한 삶의 화룡정점을 찍으며 신화가 되지는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터그 김슬기 선생님이 지적하셨듯 이상이 왜 동경에 갔는지, 이상의 드라마틱한 최후에 대한 질문은 김연수의 <굳빠이 이상>에서도 제기된 바 있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로 독자들에게 남겨질 것 같다.

 

 

 사실 '건담'이라는 형식상 이 연극은 일반적인 연극의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국어시간에 배우는 발단 전개 절정 하강 대단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만한 갈등과 갈등의 해소가 작품의 척추를 이루는 모양새가 아니다. 마치 오늘날 팟캐스트 방송에서 책 좀 읽었다 하는 '먹물'들이 수다를 떨듯 박태원, 이상, 김유정, 구본웅, 그리고 이상의 제비다방에서 일한 바 있는 소년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케미를 빚어낸다. 유랑극단 느낌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문학'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이는 만담을 이어가는 남자들을 보면서(그렇다. 여성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리는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와 조선어가 혼재된 단어 뭉치들을 끝없이 쏟아내는 이상을 보며 '퀵마우스' '돌아이' 노홍철이 떠올랐고(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9월 9일에 노홍철 씨가 연극을 관람하러 왔다고 한다), 점잖게 중심을 잡아주면서도 여자 문제에 있어 서툴고 찌질한 모습을 노출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박태원은 유재석을, 겉으로 소심해보이지만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무려 '혈서'로 사랑을 구하다 퇴짜를 맞는 양가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초기 정형돈 캐릭터가 연상되기도 했다. 일부러 끼워맞춘 감도 있지만 어찌됐든 집단에서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상호보완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전체적인 조화-케미를 빚는데 정지용, 김기림, 김태환 또한 극화되었다면 어떤 캐릭터로 구인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상과 박태원이 술자리 등에서 만담 콤비처럼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하니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30년대 초반 제비다방으로, 흠 그러니까 오감도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1934년 즈음으로 가보고 싶다. 현재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 문단의 구라 3대장은 황석영, 성석제, 김영하 라고 하는데 한국(현대)문학사 야사에 술자리에서 문인들의 언행이 기록된다면 한국문학이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성기웅 연출가는 낭독극이 아니라 '연극'이기에 대사에 치우진 무게중심을 어떤 식으로 균형을 맞출지 고민한 결과 폐병에 걸린 이상과 김유정이 방에서 고통에 신음하여 처절하게 뒹구는 행동이라든지, 김유정과 이상이 각각 방과 감옥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모습들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생각하면 이상의 시나 박태원, 김유정 소설의 유명한 대목들이 인용될 법도 한데 연극은 글이 아닌 '말'에 집중해 식민지 시기 입말을 비롯한 소리들을 무대에 옮겨놓는 데 주력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소리의 정치>의 저자 이화진 선생님에게 자문을 많이 구했다 하고, 성기웅 연출가 자체가 엄청난 자료를 쌓아 놓고 고증에 심혈을 기울이는 성향이라 설명해주셔서 이렇게 역사극을 무대에 올리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그 노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메우기 위한 상상력의 고투가 필요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본 구보 씨 시리즈였는데 시리즈와 함께 해온 관객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해리포터나 비포 시리즈가 그러하듯 관객들이 구보와 이상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감각을 공유한다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문학천재들과 경성살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마음 속으로나마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서울이라는 곳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대사가 쫀득쫀득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사에도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소소한 재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라디오극을 만들 때 '수공업'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낸 온갖 효과음들을 보고 들을 때의 재미가 쏠쏠했고, 84년 '미래'를 예상해보는 구보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한강 변에서의 괴물의 출현을 예언하는 대목 등 빵빵 터질 수 있는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문학덕후들만이 웃을 수 있는 지점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와 같은 연극 및 문화콘텐츠- 장르 간 번역이 좀 더 활발하게 이뤄지길 소망하게 되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뮤지컬을 기대하고 있다.)

 

 

 연극의 영어 제목은 From the 20th century인데 20세기로부터 온 편지의 마지막 대목이 일제의 중일전쟁 및 총동원 체제하에서 소년이 자원입대를 하고, 김유정과 이상이 죽고, 박태원이 검열로 인해 창작활동은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번역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구본웅과 박태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 갈 길을 가는 장면인 걸 보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블랙리스트를 통해 예술가들의 입을 막으려 했던 국가권력의 횡포가 있었던 걸 보면 그때에 비해 우리가 얼마만큼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오늘날 예술가들의 지위는 또 어떠한가. 문학은 또 어떠한가. 20세기에 그들이 남긴 글에서, 그들이 했던 고뇌와 좌절, 꿈과 희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읽어내야 할까. 사실 이런 커다란 질문들 앞에서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세심하게 작품을 읽었더라면 좀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영화가 아니라 연극인지라 재관람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내게 <20세기 건담기>는 작품 속 인물들이 극화되어 노는 모습을 봤다는 데 만족감을 느껴야 하는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있어 <20세기 건담기>에서 얻은 최대의 수확은 김유정과 박태원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만약 문학에 관심이 없는 친구와 동행했다면 그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구인회 인물들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 궁금해진다.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가는 김에 김유정 문학관에 들려야겠다. 가는 길에 한컴 타자연습을 접했던 '점순이네 암탉'과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쓰여진 작품이라 외우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지 못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소리내어 읽어보리라. 이제는 <마의 산>과 같은 작품이 소설의 정수라는, 그래서 전반적으로 세계문학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한국근대소설이란 도식을 갖고 있지 않으니 한국어로 차려진 풍요로운 밥상을 맛있게 먹을 차례만 남아 있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p.s 더불어 <20세기 건담기>를 참고해 팟캐스트를 만들려는 계획을 다시 추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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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수원사람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수원에서 살게 될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골목골목을 누비고, 밤 8시가 넘어 캄캄해져 조급한 마음으로 가슴이 터져라 집까지 뛰어간 적이 있고, 문방구 앞에서 딱지, 미니카 등 모르는 아이들과 같이 놀고, 초3 때 비슷한 또래의 아이에게 '씨팔' '개새끼' 같은 욕을 처음 배웠고, 아빠 따라서 몇번이고 다녔던 숙지산(의 족구장), 팔달산에 올라가 아이들과 드래곤볼 상황극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 화서동, 인조잔디가 깔리기 전 흙바닥에서 점심시간이면, 심지어 쉬는 시간 10분에도 나가서 뛰어놀았던 율전초등학교, 성균관대를 가로질러 다녔던 20여분 정도의 정천중 통학길, 밤꽃 향기가 풍기는 구간이 있었던 50여분 정도의 동원고 통학길, 피씨방들, 친구네 아파트들, 인근에서 인조잔디가 가장 먼저 깔렸던 상률초등학교, 북수원도서관, 얘들과 가끔 가곤 했던 북수원 온천, 천천동의 학원가, 저녁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걸었던 화성행궁-초3?초4 때 참여했던 사생대회도 여기서 했었다, 고등학생까지 거의 유일한 영화관이었던 수원cgv, 양념감자(양파맛) 먹으려고 5살 정도였던 여동생 손을 잡고 갔던 화서시장의 롯데리아, 가족들과 운동하러, 자전거 타러 갔던 서호공원, 비행청소년을 만나 삥 뜯길 뻔했던 지동 시장,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만석 공원(고3 때 친구들이 비행청소년들에게 핸드폰과 MP3 등 전자기기를 다 뺏긴 바 있는), 광교산 보리밥, 막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 홍등가를 지나 1시간 동안 걸었던 새벽 길, 수원국제연극제를 보러 갔던 정자동의 SK아트리움, 이름만 들어본 파장동-우만동-고색동-오목천동-영화동... <문라이트>-한의원-나혜석거리를 만나봤던 인계동, 경기도문화의전당 공연을 보러 몇 번 방문한 적 있는 영통, 그리고 곧 열릴 수원재즈페스티벌을 구경하기 위해 최초로 방문하게 될 광교신도시. 

 

 20대 초반을 함께 한 대전이란 도시와의 추억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대전 엑스포 이응노미술관, 탈북다문화멘토링 친구와 함께 갔던 카이스트, 유성온천에서의 온천욕과 오모리 찌개, 대전 아트시네마-좋은 영화들을 많이 봤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사요나라, 안녕! 용문객잔, 미치광이 삐에로 등등등-, 선뜻 자신의 보금자리 한켠을 내줬던 후배의 자취방, 자동차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렸던 혜화문화관 옥상, 나만의 노래방이 되어주었던 용운터널, 복도훈 선생님의 강추로 먹게 된 농민순대, 교수님 차 타고 다녔던 원미냉면, 시 모임 '시시'에서 갔던 탄다 디비라- 대패삼겹살 집, 튀김소보로 성심당, 가끔 걷곤 했던 도시 대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에 지분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부암동, 숱하게 들렀던 국현미에서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빌 비올라의 <트리스탄의 승천>과 <불의 여인> 이때를 꼽을 것 같다, 시청 교동 전집, 광화문에서 세월호 천막과 탄핵 시위, 을지로 모듬순대, 지인의 옥상에서 올려다봤던 별들Estrella, 2010년 1월 뮤즈의 공연을 시작으로 몇 번 공연을 보러 갔던 올림픽공원, 2008년 내 생애 첫 콘서트였던 에이브릴 라빈 3집 내한공연을 봤던 악스홀(yes24 라이브홀), 국현미-서울시립미술관을 몰랐던 시절에 다녔던 한가람미술관, 청년 할인이 끝나기 전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예술의 전당, 이제 일산으로 이전하면서 갈 일이 없게 된 매봉역의 EBS 사옥에서 봤던 <스페이스 공감>-충격으로 따지면 잠비나이 1집 공연이 최고였지만 감동으로 따지면 누구를 꼽을 수 있으려나- 대학로에서 만나 성북천을 따라 고대 극회동아리 동방까지 갔던 밤 산책, 모이면 3~4차까지 가곤 했던 스무살의 술자리, 외대 역 근처에서 블로그 이웃들끼리의 회동(달팽이 님의 환대), 석계 역에서 먹었던 딱딱한 떡볶이와 곱창볶음, 날 좋은 날 걷기 좋았던 돌곶이 역에서 한예종 가는 길, 고대 생활도서관, 법학관 옥상에서 먹었던 피자, 맥주와 소시지가 맛있었던 독일 주택, 이제는 신촌에 사라지고 혜화에만 남은 도어즈, 이제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친구를 보러 들렀던 합주실, 알라딘 중고서점들, 이음책방, 종로서적이 들어서기 전에 애용했던 종각역 반디앤루니스, 세계적인 작가들과 석학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교보생명 23층 컨벤션홀, 가장 문학적인 체험을 했던 북촌 창우극장,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극장 위치를 찾지 못해 몇 번 표(생긴 표이긴 했지만)를 날렸던 대학로, 전국고등학교 독서감상문말하기 대회? 참석차 두 번 들린 바 있는 서초동, 들뢰즈 사후 20주기 학술행사 보러 처음 가봤던 서울대, 샤로수길 베트남 음식, 술 취해서 들어가 있었던 신촌의 어느 PC방 화장실- 알라딘 중고서점 대학로점 화장실 - 신촌 우드스탁 화장실 ... 종각? 종로 쪽 포장마차에서 외국인 한예종 영상원 교수랑 동국대? 영화과 교수랑 술 마시고 김승옥 서울 1964 겨울 얘기하다가 토함 - 첫 번째 구토부터 올해 삼일절 잭 다니엘 붓다가 한 구토까지... 조성룡 건축가와 함께 구경했던 선유도 공원, 신형철 평론가에게 싸인을 받았던 서촌 이상의 집, 김경주 시인을 처음 만났던 상수 이리 카페, 잠실 종합운동장, 삼각지 선방, 남산, 동국대 양 적고 맛 없었던 학식, 등록금 인하 현수막(2011), 아트하우스 모모 - 캐롤, 파우스트, 만신, 나의 시 나의 도시, 헤르보르 이야기, 타인의 삶, 공동정범, 낙원상가 앞 1500원? 2천원 짜리 국밥, 안암 참치무한리필, 학림다방, 압구정cgv 늑대아이 gv 이동진, 씨네큐브 미라클 여행기 허철(곧 만나게 될 김종관 정은채), 상상마당, 카페 꼼마, 돈키호테의 식탁, 명동역 씨네 라이브러리 외국영화잡지, 빨간책방 카페 이동진, 합정역 홈플러스, 인문카페 창비(합정 시절, 망원 시절), 사당 양꼬치, 구로cgv 베트남영화제, 광장시장 파전 떡갈비 족발?, 수유너머/수유너머104, 안국동 W스테이지 열린연단,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서촌 독서모임을 진행한 적 있는 한옥식 카페... 막차가 끊긴 사당, 막차가 끊긴 구로, 수원역, 병점역, 금정역? 여의도 KBS 탑밴드 로맨틱펀치 등등, 여의도 2만원 짜리 노래방, 신촌 찜질방, 용산 asus 서비스센터, 용산 아이파크 스타리그 4강전 이제동vs이영호, 이태원 Rabbit hole, 이태원 red rock 생맥주, 홍대 미대 실습실, 연대 도서관 대학생고전읽기 토론대회?, 굽은다리역, 노량진? 옥탑방 올리브, 불광역 혁신파크, 푸른역사아카데미, 통인시장 튀김떡볶이, 홍대 레드빅스페이스, 노랑통닭, 썬더치킨, 건대 석촌호수 슈퍼문, 아트앤스터디, 대안연구공동체, 명지대?, 중앙대, 한양대 레드벨벳?, 서강대 맑스코뮤날레, 성공회대 맑스코뮤날레, 서강대 카페 숨도, 산울림 소극장, 대학로 나온씨어터, 연우소극장, 명동프린스호텔 별관 황현산 조재룡 보들레르 말라르메 한용운, 대학로 예술가의 집 김중혁, 황정은, 오은, 박준, ......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추억-Adieu, Paradise. 서울아트시네마가 서울극장으로 이전하기 전, 낙원상가 4층에서 <우리들>을 보았다. 개봉했을 때 놓쳤으나 어떤 기획의 일환이었는지 몰라도 아트시네마에서 단발적으로 상영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마 일요일로 기억된다. 생각보다 극장에 빈 자리가 많아서 아쉬움이, 예상 외로 나이대가 있으신 분들이 많이 오셔서 놀라움이 일었다. 영화 상영 전 내 주변에 앉았던 관객들의 대화와 영화 상영 이후 엘리베이버에 동승한 중년 부부의 대화는 주로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와 공감으로 이뤄졌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질문의 책>에서 네루다가 던졌던 질문들을 알게 모르게 스스로에게 던지며, 최초의 순연한 마음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려 간지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한데 그 마음을 움직였을 때 오는 느낌이 너무 망연해서 설핏 설움이 닥쳤을 지도.

 14년에 아트시네마를 자주 찾았다. 14년 겨울에 불현듯 걸려온 전화를 끊지 못하고, 1시간 정도 통화를 하는 바람에 여차저차해서 공연 관련 멤버십에 가입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입선물 식으로 끊은 뮤지컬 <카르멘>은 성에 차지 않았고(바다 대신 차지연 이 카르멘으로 공연하는 분을 봤다면 조금이나마 만족도가 올라갔을 것 같지만), 후에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공연이 카르멘과 같은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2개월에 한 번씩 열리는 콘서트는 몇 번 가지 못했다. 박재범-그레이-로꼬, BMK, YB 정도가 생각나는데... 두 달에 한 번씩 스트레스 풀자는 심산으로 가입했으나 시간이 안 맞거나 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결과적으로 돈을 버렸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쌓였던 ...

 그나마 이벤트 식으로 연극, 영화, 전시 등의 티켓을 추첨을 통해 줬는데 아무래도 경쟁률이 낮아서 그런지 아트시네마에서 영화 볼 기회가 많았다. 아쉬운 건 1인 2매였으나 대부분 1매를 버렸다는 것. 매표소로 향하는 사람을 붙잡아 표를 줄까도 생각해봤지만 고작 해야 눈에 잘 띠는데 티켓을 올려놓고 온 게 전부였다. 미국으로 유학 간 Y와 <안드레이 류블료프>를 같이 본 기억(나는 GV까지 듣고, 그녀는 영화가 끝난 다음 가버린 기억), 순천에서 온 친구 J와 파졸리니의 <종이꽃> 단편(아마 제목이 종이꽃이었을 것이다. 로마? (혹은 파리)의 거리와 카스트로, 정치인들의 이미지가 몽타주되면서 낯선 감각들을 촉발시켰던)과 강도와 살인사건으로 당대 이탈리아 사회의 어두운 면을 풀어낸 장편을 같이 본 기억 등이 동반관람의 몇 안 되는 추억들이다.

<철의 꿈> <거미의 땅> 전위적인 한국의 다큐멘터리들도 좋았고, <바이 바이 몽키>(마코 페레리), <거울의 여자들>(요시다 기주) 같이 평생 이름 한 번 들어보기 힘든 영화를 보기도 했고, <솔라리스>를 바로 이 극장에서 봤으며,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GV로 정성일 평론가를 처음으로 영접했으며(질문해주신 분 중에서 영상원은 아니지만 한예종에 다니신다고 밝히신 분이 학교건물이 있던 터가 예전에 고문실로 쓰여서 그런지 땅을 파보면 유골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비록 나는 조는 바람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코언 형제의 <블러드 심플>을 보기 위해 모인 영화학도들, 영화인들 - 한예종 점퍼 등 -을 보며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각기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게 문학작품의 낭독이나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 모인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고, 극장에서만 두 번 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을 처음 본 극장이 이곳이었으며, 마이클 만의 <히트>를 틀 때 지금까지 극장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큰 음향으로 인해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으며(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수준... 영화를 보고 난 후 얼마간 귀가 멍멍하고, 이명 같은 게 들렸을 정도로. 사실 난 <히트>보다 <콜래트럴>을 더 좋아한다. 그래도 <히트>에 어렸을 때 재밌게 본 <세인트>의 주인공 발 킬머가 나와서 좋았다. 또 다른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기수 브라이언 드 팔마 최고작으로 나는 <스카페이스>를 꼽겠다. <언터쳐블>도 괜찮았지만. <미션 임파서블>을 다시 보면 순위에 변동이 있을 수도?!) 모두 낙원에서의 일이다. 왕빙과 더불어 끝까지 다 보는 게 도전이었던 자크 리베트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은 낙원인지, 서울극장인지 살짝 헷갈리는데 아마 낙원일듯. 중간에 가야 해서 그랬는지 가끔 의자들 옆 복도에 서서 영화를 보던 기억 또한 낙원 시절만의 전유물이다.

 

 

 서울에서 잠을 잔 적이 별로 없다. 날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첫 차 타고 집에 와서 잤으니까. 데이트는 서울에서 했지만, 사랑은 수원에서 나눴다. 아마 서울에서 살았다면, 서울에 내 집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있었다면 많이 달려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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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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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이란 무엇인가

 

 나는 수원사람이다. 그래도 24살 때까지 살았던 집이 성대역 5분 거리여서 지하철 타고 많이 돌아다녔다. 지하철에서 읽은 페이지수만 따져도 몇 십권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대구나 부산 사람처럼 맘 먹고 서울구경을 하는 여행자tourist는 아니지만 밤늦게 한강에서 운동을 하거나 홍대/상수/망원 쪽에 아침에 잠옷 차림으로 나와서 커피를 마시는 현지인 또한 아니다. 항상 막차시간을 의식해야 하고,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의 직선적인 동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非산책자. 강남이나 신촌에 가면 내가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는 외부인의 정서를 강하게 느낀다. 소위 '문화의 거리'로 조성된 번화가를 지날 때마다 이곳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적 수단이라 간주하게 된다. 그건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 받는 인상과 거의 동일한데 전반적으로 이런 장소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번화가의 스펙터클한 규모가 사람들을 '군중'으로 소외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번화가는 항상 최신의 새롭고 화려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기에 여기서 역사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지난한 일이다. 오사카 도톤보리를 갔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차이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미학화시키면서 예술의 타자성을 자본의 동일성으로 흡수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하지만(서동진 등) 도톤보리에서 내가 마주한 건 메트로폴리스의 번화가, 고유명사가 아닌 어떤 일반명사적 stereotype이었다. 차이, 타자, 나를 변화시킬 만한 낯선 경험에 경도되어 있는 그대로의 여행지를 보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본적인 것'이라 정체화된 기호에 대한 소비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인터넷쇼핑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기에 '여행의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걸 절감했다. 그건 고향에서, 실상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익숙하기만 한 곳에서 요구될 필요가 있는 사안이었다. 

 

 서울의 역사를 다룬 책에 관심이 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래 신간 목록에서 도시 인문학 혹은 인문지리학이란 카테고리로 분류될 만한 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산책자(만보객)의 시선으로 파리를 탐사했듯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를 비롯해 문학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서울을 탐사한 류신 교수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방민호 교수와 함께 걷는 문학도시 서울'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방민호 교수의 <서울 문학 기행>, (더러운 서울지상주의!!) 부산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부산은 넓다> 등 도시라는 풍부한 콘/텍스트에 주목하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 아닌 공간, 아니 공간space이라기보다 장소place에 주목하는 시선은 학계에서 '공간적 전회spatial turn'이라 불리는 흐름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 연대기적 서술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공간은 시-공간, 시간의 부산물 격으로 따라오는 일종의 배경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속성을 지니는 시간에 반기를 들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의 속살에 새겨진 문자를 읽어내는 데 퍽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못했지만 항상 중력을 매개로 공간의 피부인 땅과 함께 호흡했기 때문일 것이다.

  

 I SEOUL U. 서울을 고정된 실체로서 명사가 아닌 역동적인 행위성의 동사로 표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무슨 뜻인지 한번에 와닿지 않아 약간의 질타와 비판을 받은 슬로건이다. 나는 너를 서울한다. 나는 너에게 서울한다. 각자마다 정의가 다를 것이고, 이 해석의 자유와 다의성을 최대한 폭넓게 끌어안고자 하는 의지가 이 슬로건에는 내포되어 있다. 행정구역으로 경계가 확정되어 있는 지리적 공간으로서 서울이 아닌 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매개가 되어주었던 인문지리적 장소, 문화적 미디어로서 서울. 그 서울의 가장 깊은 내력을 살펴보기에 몇백 년전부터 국가의 중심적인 장소로 사용된 문화재를 다루는 이 책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2. 종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1권은 종묘를 표지로 삼고 있다. 덕수궁, 경복궁은 현대미술관 나들이 겸 자주 가는 데 반해 책에서 다룬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은 가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에 종묘하면 종묘제례악 같은 행사가 먼저 떠오르고, 평평한 공터가 뒤따라 연상되었다. 종묘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 종교행사가 이뤄진 장소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해서 종묘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원인을 따져 보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유교가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의 이미지보다 일상 생활에 스며 들어 있는 생활규범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긴 하지만 유교사원에 찾아가 절대자를 경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번 겨울에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숱하게 봤던 성당들은 아직까지 문화유산이나 관광지 이전에 종교기관으로 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종묘는 그렇지 못하다. 현재완료 진행형(?)과 과거완료의 차이랄까.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은 바르셀로나 도심 중심지에 위치해 멀리서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멋이 있지만 종묘의 경우 숲속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위치선정은 세속과의 단절을 통해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데 도움을 준다. 유교문화권 나라들 중에서도 종묘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멋이 있기에 '종묘 예찬'으로 책이 시작되는 것은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종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살펴보자.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p16

 

 이 종묘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건 70년대라고 하니 아직 우리에게 종묘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종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도록 하자.

 

 종묘를 종묘답게 담아낸 최초의 건축사진집은 사진작가 임응식의 <한국의 고건축>(광장 1977) 3권 종묘편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건축가 김원은 종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묘의 좁고 긴 평면 형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펼쳐진 조형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기단은 대문으로부터 점차 높아져서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 건물 역시 기품 있는 자세로 그 분위기의 주역이 된다. 이런 건축적 표현과 공간의 구성은 대단히 세련된 솜씨로 그 세련미는 겉으로 뛰어나게 돋보이기보다는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어서 그 공간적인 감동을 더욱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건축으로서 이런 정밀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조형의지의 발로이기보다는 영원에는 염원이 격조 높은 솜씨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빚어진 일품이다. 조형의지라는 것은 인간적인 한계를 갖지만 어떤 염원이 만든 작품은 그 한계를 초극한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p20

 

 이 설명을 읽었을 때 종묘는 서양의 고딕식 성당의 수직적 초월과 대비되는 수평적 초월, 하늘로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게 아니라 길게 뻗은 건물을 통해 땅과 하늘을 중간에서 매개하는 것 같은 안정감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종묘 정전의 본질은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고 한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p21

 

 동양적 미학을 논하면서 비움의 미학, 여백, 느림, 空 등이 자주 호명되곤 하는데 글을 보고 가을이나 겨울, 특히 눈 덮인 종묘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무도 발도장을 찍지 않아 굉장히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의 장막으로 덮여진 종묘. 살얼음판을 밟으며 나아가다가 풍덩! 빠져 침묵의 두께가 두터워지는 경험을 상상하게 된다.

 

 승효상이 본 월대. 건축가 승효상은 종묘의 박석을 두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p21

 

 정전 앞 월대.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넓은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이 월대가 있음으로 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더욱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p22

 

 <살롱안드로메다> 팟캐스트에서 불교도상학 편을 재밌게 들었다. 사찰을 좋아하는 나지만 불교건축과 미술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다시피했던 내게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해 따라가기가 어려웠지만 딱 하나 일주문이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를 역할을 하고, 바로 이 '문'을 넘어가는 의례적 실천을 통해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성과 속>에서 지적했듯) 속에서 성으로 진입하여 사찰에 당도하기 전까지 마음가짐을 바로 할 수 있는 준비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종묘 정전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월대가 일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나는 이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에서 그가 설계한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에 다녀왔다. 정말 좋았다) 또한 종묘 방문 당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따.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다 느낄 텐데."

 

 신문에서 박석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도 그는 성큼 내딛지 않았다. 안내원이 '올라가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니, 아직은"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큰며느리에게 말했다.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p25

 

 

   

종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 근거였다.

 (...)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의 [고공기]에서는 도읍(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고 했다. 이를 '좌묘우사'라 한다.

 사직에서 사는 토지의 신, 직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p28

 

 종묘가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확실하게 학습했다. 그렇다면 종묘를 지은 건 누구일까? 물론 왕의 명령이 하달되어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지었겠지만 정확히 어떤 왕에 의해 종묘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며 종묘의 면모를 일신했다. 태종은 일(-)자 형태의 긴 건물 양끝에 월랑을 달아 짧은 디귿 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p31

 

 이럴 때 보면 역시 윗대가리, 아니 우두머리, 아니 정치적 지도자를 잘 선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중국 황제는 어땠는지 그 사정을 모르겠으나 조선의 국왕 역시 만만찮은 중압감을 견뎌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와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군자,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과 같은 이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의 국왕들은 흡사 아이돌 연습생과 같이 강도 높은 트레이닝과 감시 속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다. 그 무게를 견디고 훈민정음과 장영실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을 꽃피우며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과 조선 제2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정조가 있었는가 하면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도세자와 권력다툼에 의해 독살로 희생된 이가 있었다. 경복궁과 같은 궁궐을 돌면서 거기서 살았던 왕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훌륭한 고궁 관람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좁게는 타인과, 넓게는 세상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보여주듯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첨예하고 치명적인 갈등을 권력들이 충돌하는 왕실의 이야기들이 보여주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유물, 화석이 아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교하며 겉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속내,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낸 바 있다. 왕뿐만 장희빈, 대장금, 허준 같은 이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 끄는 면이 있지만 말이다.

 

 태종은 종묘에 경건하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게 하기 위해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했따. 그 당시에 이처럼 건축 공간에 주변 환경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p32 태종 매우 칭찬해!

 

 유홍준 교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따라가고 있자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에서 열심히 해설을 듣고, 듣는 사람들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 가족성당에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해설사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경청을 하다가 해설사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은 분명 익숙한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 설명을 꼭 들어보고 싶은 경우가 아니면 잘 안 듣는 편인데 세계 각국의 언어로 인류의 유산이라 볼 수 있는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모양새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았던 덕택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귀동냥으로 잠깐잠깐 설명을 주워듣기도 했다. 특히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기계에서 나오는 영어해설이 띄엄띄엄 해석되었지만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는 현대미술에 다가갈 수 있는 해석적 발판들을 얻을 수 있어 그냥 내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상하는 주관주의적, 직관주의적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역시 공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속 얘기가 옆으로 새서 좀 그렇지만 한 가지만 더 얘기한다면 한가람미술관에서 어느 수집가의 컬렉션 전시에서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두 점 봤는데 다른 작품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나를 압도했던 포스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로만 채워진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다. 훨씬 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람한지 네 시간 여가 지난 시점이었기에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비슷한 류의 추상회화들을 많이 본 상태에서 마크 로스코 작품만의 본질에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읽은 잔상이 남아 있어 '마크 로스코'라는 표상 자체에 강렬하게 반응했던 한가람미술관 때에 비해 이미 그것을 영접한 바 있는 상태에서 순수한 미술품으로서, 색깔 덩어리로서 작품을 만났지만 그것에 조응할 만한 내면의 뭔가가 부재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문화재의 경우 정말 배경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순수하게 외형적인 모양새만 보는 게 커뮤니케이션의 전부였는데 그 조형적 형식에 깃든 정신적, 사상적 내용이라들지, 건축물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라들지, 콘텍스트가 풍부해지면 텍스트 자체도 좀 더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처음엔 백지를 채워나가는 상황이라 팍팍 채워지는 느낌이 있어 재밌기도 하고, 동시에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는 느낌이라 막막하기도 하지만 연습을 통해 심미안을 기르고, 예술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시작이 반이라는 긍정적 마인드로 앞으로 즐겁게 읽어나갈 생각을 해본다.

 

 다른 무엇보다 종묘에 대한 설명이 와닿고, 읽자마자 이해가 돼서 종묘만큼은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과 혼을 담은 신전이다. 그 신전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문화력에서 나온다.

 (...)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운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의 건축적 표현이다.

 이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끝을 짧은 월랑으로 마감하여 하나의 건축으로서 완결성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는 이 건축에 친근함을 가져다준다. 동서 월랑의 구조는 대칭이 아니다. 하나의 열린 공간이고 하나는 막힌 공간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p46

 

 하나 더,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 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p52

 

 이 글을 읽고 종묘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이가 있을까.

 

 답사기를 읽으며 든 생각 : 정조와 같은 왕들이나 문장가들이 지은 문장을 음미하는 재미는 탁월했다. '문화유산답사기'가 왜 스테디셀러로 세월을 이겨내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자의 박식함이 책 한 권을 어느 한 장르로 고정시킬 수 없는 종합교양서적, 르네상스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건축, 역사, 문화, 문학, 여행, 예술을 넘나들며 한 권 안에 녹여내는 내공하며, 이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꼼꼼히 정독해야 했지만 나처럼 이쪽에 문외한인 독자의 경우 초벌구이하듯 가볍게 넘겨보고, 직접 책에 소개된 장소에 가서 문화재 해설사의 해설을 듣거나 안내판을 읽고, 산책하면서 구경한 이후에 모르는 단어 사전으로 찾아보듯 답사기에서 궁금했던 부분을 찾아 읽는 것도 괜찮은 답사기 사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3 창덕궁

 

 

4 답사기를 기약하며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기를 좋아한다. <세계테마기행> 같은 여행 다큐멘터리를 통해 현지 모습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는 데서 오는 쾌락이 있지만 몇 장의 사진만 단서로 두고, 나머지 부분을 글을 통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오는 쾌락의 고유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각문화의 홍수 속에서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수많은 이미지들에 파묻혀 사는 오늘날 오로지 활자와의 교감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은 상상력의 이용과 발현이 그 어떤 화려하고 독창적인 상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응시와 수용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일임을 체험케 한다.

 그렇다고 책을 통한 상상에만 만족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화유산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덕궁 후원 혹은 창덕궁의 어느 부분을 자주 들릴 수 있음을 서울살이의 최대 즐거움으로 꼽기도 했다. 나 역시 최근 들어 기분이 내킬 때 수원 화성행궁을 찾곤 한다. 일상으로부터 한 발짝 비껴 서 있는 건축물과 조경이 빚어내는 다른 기분과 분위기가 있기에 그렇게 일상에 변주를 주고 싶을 때 산책장소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 선희>에 경복궁이 나오듯,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화성행궁 일대가 등장하여 가끔 마음 속으로 영화를 곱씹으며, 1부와 2부의 차이에 대해, '지금'와 '그때'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독서골든벨 준비를 위해 (정작 그 행사는 신종플루의 유행으로 취소되었지만. 그리고 소독기를 열심히 썼던 나는 신종플루에 걸렸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를 재밌게 읽었으면서 '알면 사랑한다'는 등식에 따라 생긴 내 고장, 내 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국뽕'은 좋은 것 같다. 전국 국토순례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식민지 시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군산이라든지, 작년에 최고의 기분을 선사해줬던 천년고도의 경주, 부석사, 낙산사, 겨울의 오대산 월정사, 해인사, 제주도 등등 여권을 들지 않고도 '멀리'/깊게 갈 수 있는 여행을 앞으로 많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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