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사기 시작하고, 2012? 2013년부터 알라딘 중고매장을 부지런히 다닌 결과 내가 소장한 책 중 절판된 게 꽤 많이 생겼다. 생물로 따지면 멸종된 셈인데 DNA 정보는 있으니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든 다시 생명을 되찾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이?' 하게 만드는 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책이 절판된 걸 확인하면 씁쓸한 마음이 들긴 한다. 학술서는 성격상 대중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다 쳐도 한국의 출판 ㅡ 학술 인프라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장목록 중 절판된 책 목록(알라딘 기준)
김춘수 시 전집(현대문학)
부조리극(한길사)
파르지팔(한길사)
니체(문예출판사)
한국영화연감 2010(커뮤니케이션북스)
수학과 음악(경문사)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존재와 진리(철학과현실사)
신학요강(나남출판사)
헐리웃 문화혁명(한나래)
산티아고 가는 길(민음사)
아날로그맨1(새만화책)
현대문학이론 입문(시유시)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이후)
아미엥에서의 주장(솔)
남성성과 젠더(자음과모음)


절판된 책 중에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코넬의 남성성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카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로
루이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
라인홀트 메스너의 죽음의 지대
는 정가보다 좀 더 비싸게 팔았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최초의 주문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불로소득이랄까 예전에 페북에서 어떤 젊은 인문학자 분이 꼭 필요한 학술서인데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측정해서 못 샀다는 얘기가 마음에 걸려서 중고최저가보다 9천원 정도 싸게 해서 팔아치웠는데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이 책정한 최저가에 맞추거나 일단 비싸게 책정해놓고 안 팔리면 점진적으로 낮추는 식의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다.
읽었던 책이나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을 지금 당장 필요한 책이나 생활비로 전환할 수 있어 좋긴 한데 책을 보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빈 서판은 아직 못 읽었는데 스캔을 하기에 책이 너무 두꺼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고책 셀러를 하면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어떤 책을 어디 사는 분이 주문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교회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을 주문했을 때. 한국에는 그렇게 극단적 무신론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비판하는) 논자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극우 반공 ㅡ 반동성애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기독교에 진보적 기독교 세력과 페미니즘 세력 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부류가 추가된다면 논쟁의 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다.

 

죽음의 지대 같은 경우 이동진의 언급 및 추천으로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4년 전 히말라야 트랙킹 갔을 때 재밌게 읽고, 정가보다 만원 정도 더 받고 팔게 돼서 이동진 님께 심심한 감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책을 팔다 보니 문득 책이란 사물의 생산과 유통, 상품으로서 책이란 사물, 매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여유가 된다면 낭시의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를 읽어 내용을 좀 더 풍성하게 채우고 싶지만 그 일은 추석 연휴로 미루고 생각나는 대로 단상을 늘여놓아 볼까 한다.

 

로쟈는 📚종이책이 더 이상 진화하기 힘든 완벽한 사물에 가까워 전자책이나 다른 매체에 의해 쉽게 대체되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얘기한 적이 있다. 확실히 '가성비'로 따지면 책만 한 게 없다. 하드커버 는 꼭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페이퍼백은 넘사벽이다. 물론 🌳로 남아 있는 게 나았을 쓰레기 또한 출판시장에 판을 친다. 푸코 말대로 자기에게 운명적으로 정해진 독자를 초과하며 잉여의 대중소비자를 끌어모으는 책이 있는데 82년생 김지영처럼 시대정신과 만나면서 인민의 사유와 감수성을 집결시키는 병참기지와 같은 베스트셀러가 있다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이 시장의 트렌드를 잘 읽어 히트친, 그래서 유행이 지나가고 나면 폐기물로 버려질 일회용 상품들도 있다 ㅡ 그들 모두 독서사 연구의 중요한 자원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ㅡ

바우만의 책 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 이란 제목이 있는데 어떤 책들은 자신의 사용가치만으로 끝끝내 쓰레기가 되기는커녕 조물이 되어 세월을 견뎌낸다. 이는 저자를 비롯한 출판노동자들의 장인적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시간에 쉽게 풍화 침식되지 않는 뿌리가 깊고 줄기가 튼튼한 지식 ㅡ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고, 성실하게 주체적으로 앎의 네트워크를 조직해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지성체들의 존재 때문이다.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의 중요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대중출판을 통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걸 보면 책이라는 게, 사람 얼굴만한 종이뭉치에 혁명적 잠재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더불어 도서관이란 공간, 소사회가 생각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란 생각이 든다(영화관 또한 민주주의를 공간적으로 생각할 때 중요한 모델로 참조될 수 있다).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공유경제의 기원적 모델이 도서관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용해도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과 휴대하기 편하다는 점으로 인해 책 ㅡ 도서관의 공유모델이 빨리 만들어진 것일 뿐 사물 인터넷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좀 더 많은 공유지, 공통적인 신체의 발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에 실린 배인철의 <알파고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하나의 가설>을 읽어보면 알파고가 상대방과의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수가 아니라 자신의 학습에 있어 가장 도움이 되는 '최선의 수'를 둔다고 했을 때 알파고vs알파고의 대국에서 양쪽이 데칼코마니 같이 대칭적으로 수를 배치하는 형국이 연출된다는 식으로 설명한 바 있다. 승부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당황시킬 만한 변칙적인 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만 승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는 알파고에게는 이를 테면 추접한 난투극에 의한 승리보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예술로서의 바둑’을 두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이를 테면 알파고에게는 먹여 살릴 처자식이나 승패에 따른 심리적 동요가 없기에 프로그래밍된 언어를 그대로 실현하는 순수이성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에서 협력으로 패러다임 시프트를 하자는 주장은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생물학을 위시한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입을 모아 인류의 발전 원동력으로 이타심 및 협력의 증가로 꼽는다. 미래사회는 초연결사회라 불리는 현대사회보다 좀 더 연결될 것이다. 기계와 신체 및 정신의 결합이 늘어날 것이며(포스트 휴먼), 기계와 도시의 결합이 늘어날 것이며(스마트 도시, <1984>빅 브라더?), 트랜스한 운동들이 기존의 경계들을 넘나들 것이다. 책-도서관의 모델에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를 발견할 수 없을까? 사실 거칠게 생각해서 책-도서관에서 연구만 추가되면 이게 대학(<살롱 안드로메다>의 트인 선생님이 얘기했듯 대학‘교’가 아닌)의 원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인문사회 계열에 한정시켜야겠지만 대학의 연구자는 책을 읽고 홀로 지식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의 새로운 것을 생산해 선순환적 구조를 이룬다. 이걸 우정의 고리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건 함께 읽고 쓰고 사유하고 느낌으로써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와 젊은이들이 그랬듯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육체적이고 에로틱한 활동이라 하지 않는가. 누군가 자신의 글을 세심하게 읽고, 공감하고, 자신이 글로 미처 다 쓰지 못한 ‘쓰여진’ 공백을 말해준다면, ‘쓰여지지 않은’ 문자를 읽어준다면 영혼이 어떤 흥분도 느끼지 못하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 사유의 거래, 감정의 교통, 누군가의 독자가 되겠다는/되었다는 선언은 그/녀를 사랑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가장 내밀하면서도 가장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기술이 책과 도서관을 통해 발명되고, 재발명된다.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 우리 시대 최고의 책쟁이 중 한 명이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책 제목이다. 출판사에서 붙인 제목이지만 원제와 상관없이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잠깐 자랑을 하자면 나는 2010년경 즈음에 이벤트에 당첨돼서 움베르토 에코 컬렉션 + 미의역사 + 추의 역사를 열린책들 출판사로부터 받은 바 있다. 흥해라 열린책들-미메시스!!). 열린책들 얘기가 나온 김에 베르나르 베르베르 얘기를 잠깐 하자면 그는 어디선가 정치가 천 년이나 미래 후속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좇는 세태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한탄한 바 있다. 뭐, 이 발상 자체는 굉장히 나이브하지만 어쨌든 권력의 마수에서 벗어나 있는 지성인들은 고민해야 한다. 천 년을 살 것처럼 오늘을 사는 방법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 저절로 우리는 별의 자식들이란 생각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이렇게 바꿔야겠다. 우리는 책의 자식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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