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역사적 인간 4
하타노 세츠코 지음, 최주한 옮김 / 푸른역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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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청

 

 20살 3월에 6학년 때 좋아했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이후 몇 번 수원에 놀러왔고, 한 번은 길가다가 마주쳤지만 인사를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 친구와 같이 있던 얘(나도 아는 사이였던)가 과자를 사달라고 부탁해서(삥을 뜯어서) 과자를 사준 기억이 있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이후 그 친구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문을 닫은 싸이월드에서 몇 장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20살 입시를 망치고 방에 틀어막혀 동굴러로 살아서 외로움이 고여 있어서 그랬는지, 단순히 남들이 다 하니까 유행의 시류에 편승했던 것인지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하루는 종일 기억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검색해보며 쉴새없이 친구추가를 요청하고, 승인하는 작업을 반복했고, 한 일주일 동안 타임라인을 기웃거리다가 소외감과 열등감에 절어 탈출하듯 빠져나왔다.

 

 이 일주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학년 때 좋아했던 친구와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아 하루 시간을 함께 보낸 일과 중학교 1학년 때 음악시간에 내가 자위를 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인생 최대의 곤혹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 친구와의 채팅이었다. 전자는 내가 먼저 연락을 했으며, 후자는 상대방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사건의 발달은 점심시간에 미친 듯이 뛰어놀고, 5교시 음악시간에 바지에 손을 집어넣어 사타구니를 긁었던 게 화근이었다. 참기 힘든 수준의 가려움이었던 것도 있지만 사실 학원에서나 그 동안 대놓고 한 건 아니고, 나름대로 은밀하게 해왔던 행동이라 습관적으로 별 생각 없이 긁었던 게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다섯 명 정도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쉬는 시간에 나를 불러 음악시간에 자위를 했냐고 물어보았을 때 ...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이 밀려 들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더 헌트>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원인이 여기 있었던 것 같다) .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친구가 이야기를 퍼뜨린 여자 아이에게 해명을 전달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후에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섬뜩하다. 그런 기억을 안겨주었던 친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저 연락을 걸어와서 굉장히 심경이 불편했고, 그 사건을 언급하며 일종의 사과를 요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생기는 격이 될까 싶어 상투적인 대화만 나누다가 연락이 끊겼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성년이 되어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인데 청소년기를 불완전하고, 자기통제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미시정치적 통치를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에 격렬하게 반발심을 느끼면서도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이제 막 성에 눈을 떠 성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기의 여중생과 아직 자신을 객관화시켜 유아론적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탈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남중생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딱히 그 친구가 내게 피해준 것도 없기에 원한 감정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한 가지 궁금증은 남아 있다. 만약 그때 내가 채팅창에 그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면 그녀는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 - 혹시라도 나중에 중학교 동창회를 간다면 나를 음악실에서 '딸딸이' 친 변태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갈 일도 없겠지만.

 

 이광수에게 고아 컴플렉스가 무의식상의 핵심적인 중추를 이루듯 내게 있어 무의식에 남겨진 원초적인 상흔은 카프카식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대문자 '아버지'의 형상이거나-그래서 초자아란 빅브라더의 감시 아래 내 욕망을 끊임없이 유예하거나 어느 수준이 되면 포기하거나- 내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언행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를 삼키는 형상-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흰 종이 위에 모든 생각과 감정을 배설하려 해도 정신적, 심리적 괄약근에 가해진 일정 수준 이상의 긴장이 풀어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 공간에는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청문회'적 상황을 생각하며 자기검열을 반복적으로 해온 탓에 말하고자 하는 욕구 자체가 조금 감퇴되는 데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또, 올해에만 생애 최초, 그리고 두 번째로 필름을 끊기는 경험을 했는데 정말 공포스러웠다 -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문학소년' 같다는 얘기를 듣고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스스로를 문학소년으로 정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타자에 의해 그렇게 '호명'된 경우는 거의 처음이었기에 기분이 묘했다. '문''학''소''년'. 새삼 어감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문구를 마주할 때를 제외하고 책에서나 박제화되어 있지 실생활에서 만날 수 없는 화석 같은 '소년'이란 단어가 이렇게 상냥하고 몽글몽글할 수 있다니 ! 친구에게 문학소년이라고 불릴 수 있음에 문학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별동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2 끔찍한 모더니티

 

 문학소년 시절 백지와도 같은 상태였기에 스펀지처럼 예민하게 텍스트를 흡수하면서 생각에 있어서나 감정에 있어서 과잉과 결핍이 자주 돌출되었다. 이원 시인은 이런 과잉과 결핍에서 시적인 것이 출현한다는 식으로 얘기한 바 있는데 나는 그런 과잉과 결핍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중도에 가깝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모난 부분들을 깎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문학이 그런 '모범생'적인, 거짓된 완벽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진실된 불완정성을 용기 있게 보여주는 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내게 문학은 철학의 개념적 사유로 포착되지 않은 감성적인 부분까지 아울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예술, 뭐 그런 비스무레한 것이었다. 이런 인식은 대두와 같은 형상을 띠고 있을 내면적 자아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광수가 세상을 움직이는 동인을 욕망과 힘에서 찾고,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에 감화되어 민족의 개조와 계몽을 외치는 민족지도자를 자처하기까지(그래서 최남선은 이광수를 <무정>을 두고 칠흑 같이 깜깜한 밤에 홀로 울리는 쇠북과도 같았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 불모의 땅 조선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뜨거운 피가 되기를 자처한 춘원...) 그의 고아의식과 자전적 정보들, 특히 일본유학의 경험-근대(성)과의 충격적인 조우 : 황지우가 문학앨범에서 기차를 처음 본 경험을 두고 모더니티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해 증언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경우 근대를 우리가 따라잡아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일본으로 표상되는 근대를 선망과 열등의 이중적인 시선으로 봤다는 차이가 있지만- 등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에서 마음의 지도와 궤적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오늘날 우리도 한국보다 선진적인(사실 이 표현 자체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먼저' 나아갔다는 측정기준에 대해, 먼저 나아간 국가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catch up modernity의 무의식에 대해 말이다) 나라에 가서 그 나라를 거울 삼아 '헬조선'의 후진성과 선진국(천조국과 구라파)의 선진성이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선망과 열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 당시 자신의 왜소한 체구를 강렬하게 자각했으며 서구인들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꼈다. 얼마 전부터 읽고 있는 <산시로>의 초입 부분을 보면 서양 미녀에 대한 찬미적인 시선이 제시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효석이 러시아 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어 동양 및 한국남자들의 서양미녀에 대한 동경과 배면에 깔려 있는 열등감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서 여성학자 정희진, 권김형영이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글을 실었고, 오혜진 등의 여성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주제인데 제국주의-인종주의 담론과 더불어 복합적으로 고민해보고 싶은 주제이다.

 (고대 웹진 민연에 연재되었던 염운옥 선생님의 글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에 의해 그리스적 미적 기준이 보편적 미의 표본으로 승격되고, 이 쿠데타가 정당한 권력으로 인준받아 역사를 왜곡하고 재구성했음을 보여준다. 동물원의 동물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고통받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고국의 땅에 묻힐 수 있었던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갈등 등 정치적 갈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특한 질감의 애니메이션과 기계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극을 통해 색다르게, 시적으로 보여준 윌리엄 켄트리지 전에 대한 비평 등 흥미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550&selectCategory_id=70[출처] 서양사의 재조명 강의 참고자료 안내 (역사는 즐거워) |작성자 염운옥)

 

 여행을 통한 자타의 구분 및 인식,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이런 관점에서 많은 징후들을 읽어낼 수 있는 문제적 텍스트이다. 팟캐스트 <살롱 안드로메다>에서 조셉 콘래드, 유길준, 발터 벤야민의 여행을 비교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초반에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식론적 논의는 조금 정신없는 감이 있는데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어를 작가언어로 선택함으로써 모국어로부터 추방을 스스로 선택한 콘래드의 이중언어적 상황, 지배엘리트 계급의 문자인 한자의 철장에서 나와 '언문'과 '영어'를 혼용해서 글을 썼던 유길준(심지어 윤치호의 경우 나쓰메 소세키와 같이 영어로 글을 쓰면 갑자기 조선어(일본어)가 튀어나오고, 조선어(일본어)로 글을 쓰면 영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번역하는 근대, 번역된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상황, 파리-베를린-모스크바- '유대인'으로서, 또 주류 학계에 인정을 받지 못한 아웃사이더로서 유럽을 주유하며 스페인 국경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비평가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The task of translator'라는 획기적인 글을 제기했으며, 보들레르 등의 번역가였다. 문화는 필연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에 의한 번역의 과정을 거처 발전하게 되는데(때문에 문화의originality-고유성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강화하는 데 동원된다. 원본과 사본, 모방과 창조 그리고 표절, 문화 간 번역 등의 주제들을 다룬 단편소설의 박형서의 <아르판>이 있다) 근대는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번역이 국가와 문명 단위로 전개된 시기였다. 경전 같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번역이 아닌 서양과 동양(이 번역어 자체가 메이지 유신의 번역가들이 만들어낸 용어라고 들었다), 구라파/미국과 아시아, 일본 (고유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같은 문제의식들이 본격적으로 발아하고 성장하기 시작했고, 에르네스트 르낭이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서술된 도식대로 이런 타자와의 조우를 통한 민족-국가nation state 단위의 자기인식은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통해 수행되었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일본의 정신을 이식시켜 세계의 중심부에 서고자 했던 일제의 멘탈리티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수상한 수사학(물론 다른 식으로 읽힐 여지가 얼마든지 열려 있지만)에서 변형된 형태로 회귀하여 출현했다.

 

 이런 인식론적 논의에 있어 동아시아 차원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 이는 다케우치 요시미이다.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였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이란 타자를 통해 일본사회를 보고자 했다. 타자 없이 자기동일적 인식의 굴레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다케우치 요시미는 동아시아적 지평, 보편성의 차원을 확보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를 연구한 쑨거는 동아시아 학자 윤여일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타자는 내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안에 있다고도 바깥에 있다고도 고정시킬 수 없는 타자에 의해 구축되는 '시차성'은 사유의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간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나 김상봉이 말하는 서로주체성이 주체 중심적 서양철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제기된 '시차적 관점'들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 등 아직까지 식민지 역사의 적폐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과 일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역사를 어떻게 다시/새로 쓸 수 있을지, 연극 <1945>가 하고자 했던 것처럼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국정화 교과서 논란에서 굴절된 방식으로 비판이 제기된 민족사관의 한계를 뛰어넘어 심판할 것들을 심판하고, 화해할 것들을 화해하고,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3 국민문학, 국민국가

 

 내게 문학이 타인으로부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준 처소이자 친구였고, 빈곤한 어휘와 무딘 언어감각을 단련시키고 연만하는 대장간이었다고 한다면 이광수에게 문학은 민족개조의 소명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자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이 끝나고 대한제국이 탄생하는 시점에 태어나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했던 이광수. 천재적인 두뇌로 사서삼경을 통달했으나 전통적인 지식이 쓰레기가 되어버린 급변하는 격동의 시기에 '힘'과 '실력'을 양성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생물학'을 모르면 안 된다는 격) <무정>의 결론이 기차역에서 만난 네 남녀는 신식 학문을 배워 민족을 부흥시키자는 계몽적 의지에 가득 차 일본과 미국으로의 유학길을 응원하며 헤어지는 게 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서 지적했듯 구텐베르크 혁명의 사회적 파급력을 현행화시키는 매체로서 신문은 '민족어'라는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민족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순국문체로 쓰여진 <무정>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언문일치, 벤야민이 그 유명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적했듯 영화의 발명으로 인해 시지각의 방식 자체에 변화가 일어났듯 말과 글이 일치된 소설 텍스트 읽기경험은 언어를 운반하고 매개하는 대리인agent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감각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입말을 문자언어로 고정하는 데 있어 표기, 글쓰기ecriture의 문제가 개입되고, 애초에 한자를 훈독하여 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고안된 한글이란 매체의 문제가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이었고, 그는 국한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이광수, 최남선을 거쳐 순국문의 언문일치라는 이상을 실현한 것은 '-다'체를 적극적으로 주장, 활용한 김동인 이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503&cid=41799&categoryId=41800)

 

 표음주의와 내면의 발견, 근대적 자아의 확립은 걸어둔 링크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단,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문자체계를 어떤 식으로 한자를 읽고, 소리를 고정할 것이냐의 관점으로 읽어낸 황호덕의 흥미로운 주장을 조금 소개해볼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sinographic cosmopolis 한문공유체에서 sinographic mediapolis한자매개체로의 이행을 논증한다(“The Geopolitics of Vernacularity and Sinographs and the Making of Bilingual Dictionaries in Modern Korea: from Sinographic Cosmopolis to ‘Sinographic Mediapolis’”.) 한문맥,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 등 동아시아를 묶는 범주로 한문공유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구라파 국가들이 라틴어라는 보편문화를 자국의 민족언어로 번역하면서 vernacular한 universality 토착적/지역적 보편성(사실 보편적 토착성과 토착적 보편성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을 구현했듯 동아시아 국가들은 한자라는 보편문화를 각자의 음성적 테크놀로지에 의해 소리를 고정시키는(문학/문쉐?/분가쿠) mediapolis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조선어-한국어의 형성과정에서 일제의 식민통치 등 정치적인 힘이 강력하게 개입했기에 mediapolis 개념은 지리정치학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규율장치로서 언어를 동아시아의 지평과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읽어내려는 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김현은 이광수에 대해 한국문학사의 너무나도 아픈 상처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1960년대 생활문화사>에 실린 글에서 표현했던 대로 한국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패배의 역사, 일본의 식민통치와 미소의 신탁통치, 6.25 동란과 이승만 독재, 군부 쿠데타 및 군부독재로 얼룩진 주인됨과 주체성이 소거된 역사였기에 이런 비극의 역사에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이광수가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을 선동하고 부역했던 사실은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에서 말한 바 있는 '부끄러운' 역사의 결정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 카뮈와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들이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종전 이후 독일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과 정리가 제대로 이뤄진 반면 한국은 제 힘으로 해방을 이뤄내지 못한 탓에 일제 시대에 근무했던 경찰이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근무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 5.18 - 6월 민주항쟁으로 상징되는 투쟁의 역사가 있어 건국 이후에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하기도 하고, 부패한 반민주주의적 정권을 민주주의의 힘으로 몰아낸 승리의 역사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런 역사의 시점에서 이광수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각자가 고민해볼 문제겠지만 후기식민적 상황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죽기살기로 생존해야 하는 헬조선에서 난민들에게 이광수는, 또 무정은 문학사에 박제된 화석이 아닌 돌, 몸속 깊숙이 숨어 있다가 고통스럽게 배출되는 결석과도 같은 게 아닐까. 이광수를 읽는다는 건 그런 돌들을 꺼내 잠복된 상처/고통과 마주하고 고뇌하는, 현재에 남아 있는 식민지의 중층적 시간성, 비동시적 동시성을 겪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s 황호덕 교수님이 언급한 1962년도 판 무정을 영상자료원에 볼 기회가 생기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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