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을 잇는 바다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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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북이라 제목이 궁금했습니다. 이런 색감의 표지, 이런 파랑을 잇는 바다였네요. 단편이 다섯 편이나 담긴 새 소설집, 넉넉한 준비를 마친 계절처럼 든든한 기대가 차오르는 기분입니다. 


📖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동해가 천오백만년 전까지 계속 확대되면서 일본열도가 지금 위치까지 이동하게 된 거예요.”

 

표제작을 먼저 읽고 싶은 버릇과 욕망을 단단히 누르고 실린 순서대로 읽었다. 처음 만난 작가의 글인데... 친근하고 강렬하다. 글에 미혹된 정신이 중심을 벗어나 날아가려는 힘이 불쑥 커지곤 했다. 무리가 가지 않게 호흡을 거듭 골랐다. 작품의 분위기도 인물들도 오롯이* 당당하다. * 고요하고 쓸쓸하게, 모자람이 없이 온전하게

 

각자가 각자의 이유로 선택하는 ‘일’이 그대로 존중받는 삶이면 좋으련만,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가벼운 평가들로 시끄러운지... ‘이 일을 하니 살 것 같다. 인간답게 사는 것 같다’...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무엇이 부족한 건지. 이런 뾰족한 생각을 하며 중요하지도 않은 이들의 평가에 휘둘리던 젊은 나를 떠올린다.

 

“요시노 삼나무가 높은 품질을 유지해온 것은 산지기를 통해 대대로 전수된 고도의 육림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0세기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듯한 배경과 내용이다. 인간에 의해 파헤쳐져서 이제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야생이란 하나도 남지 않은 건가 싶어서 ‘늑대(혼혈인 개)’ 이야기가 숲 속 공기처럼 서늘하고 설렜다.

 

이곳 말고, ‘돌아갈’ 다른 야생이 있으면, 인간도 얼마쯤은 무리에서 이탈하고 싶을까... 나도 그래서 문득 집이 낯설어지곤 하는 건가 생각했다. 인간의 눈치를 살피며 사는 인간도, 인간의 눈치를 살피며 사는 법을 터득한 동물도, 삶이 고단해 보인다.

 

“바다거북을 늘리려면 연구자를 내쫓지 말고 제방부터 없애야죠.”

 

드디어 표제작, 기대가 컸는데... 울 뻔 했다. 회귀하고자 하나 장소가 사라진 바다거북도, 떠나고 싶으나 아직 어디로도 혼자 떠날 수 없는 아이도, 확실한 건 없지만 몸속에 내장된 듯한 지도를 따라 원류로 회귀한 이방인도... 그리움과 쓸쓸함이 각자 다른 비율의 양념처럼 섞여 혼미한 맛을 뿌린다.

 

“파랑을 잇는 바다”는 현실에서도 작품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사연을 실어 나른다. 알고 보면 생명의 조건을 서로 빌려 사는 생명들을 해류를 따라 내보내기도 하고 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실은 아무도 헤어지지 않고 이 지구상을 유영 중이라고 생각하니, 아주 조금, 아주 잠시 덜 쓸쓸하다.

 

“우리 인간도 똑같아.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드는 곳, 거기서 살면 돼. 자기가 태어난 곳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대상이 누구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지,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 채로만 산다. ‘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리 많지가 않다. 그 헛헛한 관계의 진실에 대한 위무일까, 작가는 참 많은 자료, 조사 기록, 조언, 정보들을 성실하게 수집하고 참고했나 보다. 이토록 탄탄하게 아름다운 위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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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B급 홍보 개척사 - 한 소도시를 당대의 히트작으로 만든 홍보의 전설, 제13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종합 부문 대상작
조남식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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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보장 확실하다고 해서 그 점에 가장 끌렸습니다. 크게 웃어보고 싶었거든요. 기대 충만!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단지 재미를 공유한다.”

 

‘충주’를 방문한 기억이 안 나서 - 정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단 말인가 - 살짝 당황하면서, 낯선(?) 도시 충주를 처음 배워가는 기분으로 읽었다. 모르는 것은 지역뿐만이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의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수명이 짧고 매 시기 바쁜 이유는 늘 있지만, 내가 경험한 장소도 그에 따른 사고도 이렇게 협소하구나 새삼 느낀다.

 

고마운 점은 약속 받은 대로 배를 떨며 자꾸 웃었다는 것이다. 파워포인트로 저런 그림을 그려서 행정 업무를 홍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진짜 못했다. 깜짝 놀랄만한 저 색감들이 웃음을 키운다. 당시 목격한(?)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또 즐거웠을지 상상하는 순간도 큰 재미다.

 

“총괄이란 말은 꽤 매력적이다. 굉장히 권한이 커 보이고 능력 있어 보인다. (...) 그러나 대부분의 실무 현장에서 총괄이라 함은 담당자가 한 명이라는 소리다.”

 

더구나 SNS도 홍보 경험도 없는 공무원이었다니! 역시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직책은 단 한명이 업무를 다 책임지는 ‘총괄’이었지만, 그 점이 이런 파격 홍보와 성공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본다. 순서대로 결제를 다 받아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업무란, 문서 작성부터 시행 직전까지 하염없는 기다림과 지연이 필수니까.

 

그렇게 충주시 SNS가 대단한 성공을 거뒀는데, 당시 나는 전혀 모르던 소식이라서 실시간 추억이 없어 좀 아쉬웠다. 그때도 무성의한 만큼 공격적인 댓글들은 없지 않았지만, 지역기반 업무와 행사의 잇따른 성공이 실체가 불분명한 그런 공격쯤은 잘 견뎌낼 힘이 되어 다행이다.

 

“공무원이 전출 심의를 받았다는 것은 네가 간다면 막지 않고 보내주겠다는 뜻이지 갈 곳을 알선해주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도 홍보를 잘 할 줄 모를뿐더러, 과한 홍보의 세상에서 사는 일이 피곤하다. 의심과 불만으로 보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제철 옥수수와 고구마를 잘 판매하는 일이라면 반가울 따름이다. 당시 대중문화나 유행어도 잘 모르지만, 기어코 각인시키고 호감을 갖게 만들겠다는 담당자의 의지가 확실히 느껴지는 것이 매번 감동이다.

 

혼자서 잘 모르는 업무를 맡아 고민한 여러 날들이 솔직하고 재밌게 드러난 글이다. 마치 이것이 현실 홍보라고 당당히 연설하는 듯하다. 담당자가 가진 기세, 그 분위기가 유쾌하다. 고민을 나눌 공무원 독자들이 있다면 더 공감하고 이해하며 큰 재미를 느낄 듯하다.

 

“일과 상황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진정성에서만큼은 (...)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행동 기준이고 원동력이었다.”

 

‘복명하복 무사안일’보다 더 유명한 말이 공무원 업무의 성격으로 새로 정의되길 응원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더 많은 사례들이 언젠가 더 많은 책들로 소개되길 바란다. 충주 사과, 고구마, 옥수수, 잘 기억해 두었다가 꼭 맛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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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스
이승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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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스>의 야간근무자로 선발되었다. 오래 전 밤샘 근무가 떠올라 무섭... 내가 쓰게 될 야근근무 결과 보고는 어떤 내용일지 기대된다.



 

“잠을 안 자는 사람들이 자기 잠을 팔고, 잠을 자는 사람들이 그 잠을 사고 있었다.”

 

진하고 굵은 펜으로 죽죽 써내려간 듯 선명하게 집중되는 글이다. ‘스마트 물류센터와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라는 대조적 배경’은 (자발적 형식을 취하나) 잠을 빼앗긴 21세기 물류 노동자들과 영원한 잠에 든 고대인들의 대조라는 인상적인 설정을 이룬다. 결말 부분에 이 시공간이 어떻게 뒤섞이는 가는 특히 강렬한 풍경이다.

 

잠을 줄이는 이유는 다양하고 많다. 얼핏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는 이유들도 실은 사회 시스템이 강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밤을 밝힐 수 있게 된 인간은 밤을 줄이고 밤을 없애기도 하며, 수면을 통제했다. 종종 ‘꿈과 미래’를 위해서란 달콤한 이유로.

 

“노동자들의 피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직감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 수면을 박탈당한 혈액에는 정상인의 혈액에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예외가 되는 사회에서는, 잠을 자는 행위가 심지어 죄책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잠을 자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생명체임에도, ‘스스로 내면화한 논리로’ 잠을 줄이고 몸을 착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이제는 잠을 줄이고도 피로를 느끼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있는지의 여부가 관심사가 된다. 물류센터의 잠을 자지 않는 노동자들은 ‘뇌가 잠을 요구하지 않으니 일이 즐겁다‘고 느낀다. 고용인은 잠과 꿈을 잃은 이들을 “꿈의 노동력”이라 부른다.

 

“나한테 왜 잠을 자느냐고 물어요. 잠을 안 자면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왜 자느냐고. 바보냐고.”

 

잠을 안 자게 해줄 수 있다는 브로커가 등장하고, 이들의 혈액을 활용한 상품을 강남 부자 고객들에게 팔아 빚도 갚고 성공하고 싶은 전직 의사는 의학적 문제들을 알아차리지만 수익 프로젝트 성공에 집중한다. 이 팍팍하고 피곤한 이야기가 얼마나 더 잔인해질지 기분이 서늘해졌다.

 

“아르고스가 그걸 일부러 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희망이 면역 반응처럼 등장하면서 반전을 맞는다. 같은 조건에서도 잠을 빼앗기지 않은 이가 있다. 그의 의심은 어쨌든 과학적 상황 이해와 분석이 가능한 전직 강남 피부과 의사와의 협력으로 믿을 만한 가설이 된다.

 

물류 센터와 고분군이라는 장소는 극적인 타격과 변화를 맞게 되지만, 이 작품의 힘이자 묵직한 감동은 영화 <테미네이터>와 같은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소설이지만, 속보로 뜬 현실 르포 같기도 하고, 초근미래 예언서 같기도 해서 무섭다.

 

인간은 실망보다 더디게 성장하고 변화한다. 하나의 경험으로 도덕적 성장이나 선한 존재로 변하는 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방법을 알고서도 전혀 행동하지 않는, 한심한 상태에 머무는 선택이 가장 흔하다(다... 제 얘기입니다.). 그러니... 잠을 자야 살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계산으로 올바른 행동에 도달했다. 도덕이 아니라 생존이 나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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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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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석 반가운 기분이 솟는 정희진 선생님의 신간이다. 이번에도 가차 없이(?) 직시直視부터 시키시겠지만, 늘 그렇듯 다 읽고 나면, 또렷하고 가는 희망이 보일 것이다.



 

“인간은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여러 해 전 책들만 속 답답할 때마다 거듭 펼쳐 복습한 기분이라, 신간 소식이 심장이 살짝 아프도록 좋았다. 슬쩍 모른 척 하고 살면 혹시 뭔가가 그새 바뀌었을지도 몰라, 하는 헛된 망상 같은 바람은 이번에도 잘근잘근 부서졌다. 그걸 기대하고 아픈 매를 자청하는 것처럼 반기나, 매번 참 아픈 것도 여전하다.

 

개인으로든 학자로든 글을 쓰는 이유, 연구 목적이 언제나 선명하고 솔직하다. 그래서 부끄럽고 동시에 존경한다. 변함없이 (어떤 이유로든 다양한) 약자들이 마주한 문제들, 오해, 생존을 두고, 인간관계와 삶을 다룬다. 이번에는 가장 긴급한 문제, ‘소통’이다.

 

“사실 많은 사회문제들이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대안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끝내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조그마한 현실도 꾸며서 위무하는 법이 없다. 진실과 거짓의 구분에 관심이 없어지고, 악의와 범죄와 저열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시대, 그 기세가 커질수록 공동체는 허약해져간다. 그렇기에 평화학자가 전하는 이 치열하고 불편한 긴장감이 ‘진정한 평화’라고 나는 느낀다.

 

“문제는 진실이 있어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회, 사실보다 내 편의 말이 더 중요한 사회라는 데 있습니다.”

 

고단한 학습과 주장이 없이도, 누군가 명명하기만 하면, ‘~주의자’가 되어 부당한 오물을 덮어쓰기도 하는 시대, 책임 없는 비방이 난무하는데도 여전히 ‘표현의 자유’를 울부짖는 소음이 요란하다.

 

인류는 사피엔스 한 종이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은 젠더, 계급, 지역, 성정체성, 인종, 장애, 연령 등이 다양한 사회적 모순과 결합되어 있는 복합적 존재”라서 ‘소통’은 본질적으로도 현상적으로 불가능하게만 보인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 이 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대체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걸까요?”

 

각자도생, 능력주의, 수익구조가 주문처럼 울려 퍼져도, ‘소통’하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공부가 - 학문이 - 필요한 걸까. 이해관계와 권력의 복잡한 그물망은 어떻게 직시할 수 있을까, 지배 이데올로기 하에서도, 우리의 상상력과 용기는 재발견과 재해석을 기어이 해낼 수 있을까, 질문은 걱정과 두려움만큼 많다.

 

그래도 한 페이지마다 배우고 기억할 것들이 가득한 든든한 이 책을 의지 삼아 며칠을 살았다. 수많은 유사 대화들이 소통은커녕 오히려 “불평등과 억압, 불편한 상황을 강화하는” 장면들을 목도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회가 제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담지 못할 쪼그라든 그릇이 되는 건가 두려워하면서.

 

희망이 있다면, 삶이란 매순간 새로 경험하는 시간이므로 인간은 항상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소통을 위한 언어 행위도 “지속적이고 상반되는 자기변신”일 수 있다. 부디 그렇게 함께 만드는 “소통의 지도”가 표현의 책임을 질 줄 아는 이들의 영역을 다 담아줄 수 있기를, 더 나은 소통을 바라는 이들이 끝내 지지 않기를 바란다.

 

“평화는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갈등 상황을 견디는 힘입니다. 새로운 말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새로운 인간성의 출현을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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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 오디세우스의 방랑과 모험 ㅣ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서양 고전 시리즈
아우구스테 레히너 지음, 김은애 옮김, 호메로스 원작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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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간의 증오와 잔인함, 탐욕이 초래한 끔찍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십 대에 처음 읽었을 때는 서양 전래 동화처럼 읽었고 관심사가 아니었던 스토리라 딱히 큰 재미가 없었다. 20대에 재독을 시도했는데, 내 탓인지 번역 탓인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영화로 만들어졌대서 편하게(?) 서양 고전을 다시 만나보자 싶었고, 내 기억보다 훨씬 단순해진 주인공 캐릭터에 살짝 지루하고 재미가 덜했다.

 

전공자가 아니라 훼손 없는 원작 그대로를 고집할 이유는 없어서, 독일에서 교과서로도 사용된다는,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재구성된 이 번역서가 끌렸다. 결과는... 원작 완역서보다 영화보다 더 재밌었다. 번역에 대한 저항 없이 엄청 재밌게 읽었다. ‘아우구스테 레히너’와 ‘김은해’ 조합으로 출간된 시리즈를 다 읽어보고 싶다. #강추

 

“병사들은 (...) 제발 계속 항해나 하자고, 이제 더 이상 괴물의 화를 돋우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나이 덕분인지 호기심에 호승심에 자만심까지 가득한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이번엔 잘 보였다. 친구가 되고 싶진 않지만, 이런 성향인들이 세상을 덜 지루하게 만든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그 대가가 주변인들의 엄청난 피해와 희생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나는 현재의 상황이 그런 성격 - 성향 -을 거의 자제하고나 저항하지 못한 인류의 선택이라고 파악한다. 어떤 아이디어의 위험성을 아무리 누군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고 해도, 대개 ‘인간’은 듣지 않는다. 혹은 듣지 못한다. 오래 전, 유전공학 학회에서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어떤 파국이 있더라고 일단 실험을 해보고 싶다고 하는 발언들을 들으며 모골이 송연해지던 기억이 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 중 불사의 여신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마다할 자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작품에서 오디세우스는 “인간 중 가장 현명한 자”로 불린다. 그에 걸맞게 오디세우스는 반성도 결심도 할 줄 안다. 문제는 새로운 상황에서 또 잊고 또 유혹당하고 또 결과가 좋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답다. 내 모습과도 내가 경험한 다른 인간의 모습과도 흡사해서 허탈하게 웃다보면 정감이 가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다 알고 있던 사실들을 다시 짚어가며, 인간이란 생명체의 ‘디자인’은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싶다. 그때도 지금도 인간이 중요한 것들을 망각하게 하고 하고자 하는 걸 멈추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나 불행보다 쾌락과 편안이다. 고난이 심할수록 오디세우스는 재빨리 상황을 탈출한다. 귀가 시간이 이토록 늦어진 대부분의 이유는 고통을 동반하는 악재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영원한 생명과 젊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겐 각자의 ‘이타카’가 간절할 지도 모른다. 모든 시기 누구에게나 ‘목적’과 ‘목표’가 반드시 선명하게 존재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한번뿐인 삶에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향하고 마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 끈질긴 질문과 지향은 ‘인간’만의 특징이기도 하니까.

 

간결하고 아름다운 번역 문장들 위로 삶과 죽음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친절과 환대와 폭력과 피가 구분할 수 없이 섞인다. 신의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지만, 인간 자신의 광기에 사로잡히면 감각도 판단도 리셋 되고 만다. 이런 것이 삶... 무시무시하다. 그러니 우리는 이 짧은 삶을 사는 동안 한 번 더 애써서 서로에게 친절해야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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