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다는 걸, 국민들이 이렇게 고생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특별하다. 기쁘다. 오랜만에 이런 기백*을 느끼는 분이 살아 낸 삶을 들었다. 왕조 말기, 식민지, 내전, 독재, 폐허, 가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재난을 그토록 단시간에 겪으며 살아낸, 내 조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다시 만난 듯했다. *기백氣魄: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 몸 백

 

그래서 천천히 아껴 읽었다. 그럴 수 있게 정성스럽게 자료 조사와 각주을 달아주어 감사하고 큰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삶을 우리 역사를 적은 일이라고 선명하게 인식하는 분, 대단한 성취를 해내서가 아니라, 가족사와 개인사도 민족사라고 증언하는 분이라서 읽는 동안 나 역시 역사적 동참을 하는 기분이었다.

 

역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게 다 역사예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생전에 할머니께 듣던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지면에서 다시 만나 기분이 들고, 그렇게 자긍심도 집요함도 끈기도 용기도 큰 존재들이 있었다는 걸 오래 잊고 산 기분도 든다. 우리 가족들이 남편 살려 달라고 호소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놈들이 조작한 걸 모두 파헤쳤어요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동료 시민을 만난 감사도 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되지 못한, 발치도 못 미치는 나이만 먹은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어째 이럴까... ... 게으르게 산 것도 아닌 듯한데... 기대 수명에 기댄 변명을 오늘의 다짐처럼 기록해보다. 어쩌면 나도 여한이 없다고 느낄 생의 마지막 시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나한테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무 여한이 없어요. 아무 것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치동 1등급 고미정이 망하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우신영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세 고시라 불리는 영어 레벨 테스트를 앞둔 유치원생부터 암소고시를 준비하는 초등학생들까지, 10월이면 이 골목은 키즈 카페가 되었다.”

 

초가공 식품으로 채워진 매대에서 고르고 삼킬 짧은 시간, 제한된 선택의 자유만 누리고 사는 아이들, 그건 거대한 식품 산업과 허술한 사회 시스템이 합작한 삶의 풍경이다. 식사만 그런게 아니라, 나머지 시간은 지옥 같은 입시 공부에 시달린다. 단 한 번의 실패가 남은 삶을 결정한다는 무서운 협박에 익숙해진 채로.

 

K- 뭐뭐뭐 등이 찬란하게 각광 받을 때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들 생각을 한다. 이런 세상에서 소위 어른들이 참 무감하구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부족하구나. 그건 내가 사랑하는 십 대 두 명이 늘 겹쳐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건 거듭되는 악몽처럼 멈추지 못한, 그래서 십대들을 망가뜨리고 죽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성공의 방식에 대한 깊은 불만과 고민이다.



 

제목보다는 덜 서늘하고 더 생동감이 있고 더 다정한 내용이라서 읽을수록 안도감이 퍼진다. 작가가 아이들을 염려하며 보내는 간절한 기도처럼, 이토록 척박한 토양에서도 이야기 속 아이들은 말랑하고 따뜻한 우정을 피워내고 나눈다. 소설이라서 아쉽고 동시에 소설이라서 누군가의 상상력과 희망에 더 다채로운 불을 피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함께 든다.

 

꿈 없음, 그러니까 무몽증(無夢症)은 이 동네 아이들 사이에 도는 전염병이었고, 대치동은 무몽동이었다.”

 

63일은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다. 지자체장과 교육감을 새롭게 선출한다. 삶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회위원이나 대통령선거보다 더 중요한 선거일 수 있다. 지자체와 교육시스템은 한국에서 가장 깊고 크고 멀리 보는 공동의 고민과 계획 재정립이 필요하다.

 

그 기회가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4세부터 잠을 줄이고 시험을 마주하는, 한국의 교육 풍경과 일상의 풍경과 굳은 인식을 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저항과 관성이 한반도 지각 변동에 버금갈 것 같지만, 절망을 반복할 새 이유는 없다. 파란만장해서 더 선명한 이 이야기를 통해 어른 독자도 청소년 독자도 변화를 바라게 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 파란 - 제19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47
유지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 인류의 모습으로는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다.”

 

지구가 물에 잠겼다. 핵폭탄으로 절멸되지 않고 인류는 수중 생활이 가능하게 진화했으니 지금 상상하는 미래보다 더 낙관적인 설정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상당히 개연성 강한 미래 풍경을 엿보는 것 같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미래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달라질 거라고 바라는 것들 중 더 간절한 것은, 어린이들을 이토록 괴롭히는 경쟁과 평가 시스템이다. 그래서 여전히 기록과 등수와 진로로 인해 아프게 흔들리는 내용이 꽤 쓰리고 아프다. 거의 모든 SF 영화에서 여전히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장면들을 보는 익숙한 절망 같달까.

 

우리 엄마는 나에게 뭐든지 선택할 수 있는 나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 열아홉은. (...) 무언가를 냉큼 그만두기 어려운 나이라는 거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일은, 그 실패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그래서 두 번의 기회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비용에서 더 결정적인 것은 때론 돈보다 시간(나이)일 때도 있다.

 

한시적인 기회란, 조바심을 부르고,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면 뭐라도 재미있게 하기 어렵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어른들은, 충분히 시도도 실패도 해보지 못한 성장기에 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저 견디다가 점점 더 깊이 가라앉게 된 슬픈 존재들.

 

문제를 고치겠다고 지난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계속 나아가야 했다. (...)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공은 영웅적 성공을 전시하지 않지만, 주저앉지도 않는다. 그 설득력있는 변화가 이 작품을 좋아하게 만든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는 무시무시한 자유의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계속 살아보는 것이다. 아무리 상상해도 짐작해도 공부해도 그 도착지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구가 물에 잠겨도, 다름이 차별이 되는 일은 있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고민에만 친착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유려하고 은근하나 강력한 설득을 펼친다. 일상의 모든 계기와 기회를 통해, 서로 직접 만나고 뭔가를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된다고. 삶을 배우지 말고 겪으라고.

 

지나간 시대는 소멸하지 않는다. (...) 전해진 과거의 것들이 세상에 계속 남아서 어딘가를 메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상하는 마음 - 고요 속에서 온전한 나로 빛나는 시간
이치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여기에 투항하듯 힘을 빼고 다만 존재해 있음을 연습합니다.”

 

2000년대 뉴에이지 열풍은 내게는 재난 같았다. 사상이든 이념이든 뭐가 되었든 의사소통이 가능한 방식의 언어와 대화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서유럽인들이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대상화된 면면이 내게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 귀찮고 난감했다.

 

그래서 프랑스에 살며 영국을 방문한 틱낫한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강의 주제에 큰 관심을 없었다. 그래서 각자 시끄러운 마음으로 조용한 방에 모여서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지듯 질문했다. 그리고 내게 딱 맞는 평생 할 수 있는 걷기 명상을 배웠다. 생각지도 못한 명상 스승이 생겼다.

 

명상의 목적은 음악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음악은 침묵을 향해 흐릅니다.”

 

음악을 만드는 저자의 명상 이야기는 음악이 더해진 만큼 다채롭다. 음악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문장들에 가만가만 위로 받으며 감사히 읽는다. 다만, 군사 용어들 - 투항, 항복 등 - 이 눈에 띄어서, 명상은 평화를 지향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로서 아쉬웠다.

 

그럼에도, 저자가 생각에 잡아 먹혀 곧 그 생각이 나라는 오해로 더 괴로워지는 상황을 정확히 분석해주는 내용이나, 명상이 나를 잘 알기 위한 수행이라고 해서, 내 욕망 목록을 정리하는 일은 아니라는 내용 등은 환기가 필요하고 유용한 지적이라서 반가웠다.

 

죽음을 명상한다는 것은 삶의 본질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명상하지도 못하고 애도도 충분히 하지 못한 탓에 여전히 상실과 부재에 휘둘리고, 죽음에 가까워진 분들에게 별 위안과 의지도 되지 못하는 처지라서, 이런 시기에 명상 이야기를 다시 만난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호흡도 고르고 걷기 명상을 좀 더 명상답게 해보았다. 올 해는 진짜 봄을 못 만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살았는데, 걷다가 내려다본 땅 위에도 올려다본 하늘에도 멀리 내다본 풍경에도 꽃이 만개해 있어서 뭉클하고 반가웠다. 한반도 전역에 시차 없이 피었다는 소식이 좀 서글프긴 했지만.



 

바빠서 숨 가쁜 모든 분들이 잠깐만 멈춰서, 이 계절의 꽃과 풍경을 보고 가시기를. 그런 순간이 가장 좋은 그날의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고마운 명상 동료인 저자의 음악도 찾아 들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니토
빅터 D. O. 산토스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이지원 옮김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에는 제때가 있잖아. 그렇지?”

 

표지를 보고 한참 상념에 빠졌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순차적으로 들고 나는 시간은 얼마나 더 오래 가는 걸까. 기억은 계속 재구성되니, 데이터의 입력과 출력처럼 항상적이지 않다. 다행인 것은 더 아름답게 - 기억하기 덜 고통스럽게 - 바뀐다는 점이다. 재현이 생생할수록 그 끝이 더 슬펐는데, 이제 어떤 장면들은 분량도 색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전시회에 혼자 가서 가만히 오래 보는 것처럼 그림책을 넘겨보았다. 문자를 따라 빨리 삼키는 방식이 아닌 독서가 주는 위안과 즐거움이 오랜만이라서 더 크다. 다정한 대화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 했다. 생각도 감정도 호흡도 차분해져서 그만큼 수명이 늘어난 기분.

 

마지막 숨을 다 쓰고 나면 삶은 끝에 이르는 거야. 피니토.”

 

그림책 덕분에 잠자리에서 심호흡과 이완 명상을 했다. 근육과 장기가 이때다 싶게 통증을 호소하더니, 호흡을 계속 하니 점차 편안해졌다. 하루종일 앉거나 서서 살아서, 움츠리거나 웅크리고 살아서, 긴장과 수축된 몸을 훌륭히 자가 치료한 기분이 들었다. 통증이 사라지니 무언가 달콤한 감각이 채워진다. 그리고 긴 꿈을 꾸었다.

 

이런 현실이면 좋겠다 싶은, 깨기 싫은, 매일 다시 꾸고 싶어진 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도, 상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다른 감각이 따스한 꿈. 언제 이렇게 들썩이게 즐거웠을까 까마득한... 참 좋은 휴식 같은 한낮의 꿈, 좁아진 시야가 확 밝아지고 시원하게 넓어져서 온갖 마법 같은 자연을 알아볼 수 있는 꿈.


어쩌면 그 생각 하나로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가장 아끼는 기억 하나마저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오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그렇게 기억이 헝클어지는 아끼는 분들을 보면서 내가 기억하는 그분들의 젊은 시간, 크게 웃던 순간을 자꾸 되감아 본다


생명 있는 개별 존재들은 아무리 간절해도 필멸하고 말지만, 생명의 순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고 이어진다. 형태를 달리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은 삶과 죽음을 경험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맙게도 슬픔이 옅어진다. 기억하지 못해도... 또 만날 수는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