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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토
빅터 D. O. 산토스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이지원 옮김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모든 것에는 제때가 있잖아. 그렇지?”
표지를 보고 한참 상념에 빠졌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순차적으로 들고 나는 시간은 얼마나 더 오래 가는 걸까. 기억은 계속 재구성되니, 데이터의 입력과 출력처럼 항상적이지 않다. 다행인 것은 더 아름답게 - 기억하기 덜 고통스럽게 - 바뀐다는 점이다. 재현이 생생할수록 그 끝이 더 슬펐는데, 이제 어떤 장면들은 분량도 색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전시회에 혼자 가서 가만히 오래 보는 것처럼 그림책을 넘겨보았다. 문자를 따라 빨리 삼키는 방식이 아닌 독서가 주는 위안과 즐거움이 오랜만이라서 더 크다. 다정한 대화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 했다. 생각도 감정도 호흡도 차분해져서 그만큼 수명이 늘어난 기분.
“마지막 숨을 다 쓰고 나면 삶은 끝에 이르는 거야. 피니토.”
그림책 덕분에 잠자리에서 심호흡과 이완 명상을 했다. 근육과 장기가 이때다 싶게 통증을 호소하더니, 호흡을 계속 하니 점차 편안해졌다. 하루종일 앉거나 서서 살아서, 움츠리거나 웅크리고 살아서, 긴장과 수축된 몸을 훌륭히 자가 치료한 기분이 들었다. 통증이 사라지니 무언가 달콤한 감각이 채워진다. 그리고 긴 꿈을 꾸었다.
이런 현실이면 좋겠다 싶은, 깨기 싫은, 매일 다시 꾸고 싶어진 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도, 상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다른 감각이 따스한 꿈. 언제 이렇게 들썩이게 즐거웠을까 까마득한... 참 좋은 휴식 같은 한낮의 꿈, 좁아진 시야가 확 밝아지고 시원하게 넓어져서 온갖 마법 같은 자연을 알아볼 수 있는 꿈.
“어쩌면 그 생각 하나로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가장 아끼는 기억 하나”마저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오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그렇게 기억이 헝클어지는 아끼는 분들을 보면서 내가 기억하는 그분들의 젊은 시간, 크게 웃던 순간을 자꾸 되감아 본다.
생명 있는 개별 존재들은 아무리 간절해도 필멸하고 말지만, 생명의 순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고 이어진다. 형태를 달리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은 삶과 죽음을 경험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맙게도 슬픔이 옅어진다. 기억하지 못해도... 또 만날 수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