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일기 - 코로나19로 봉쇄된 도시의 기록
팡팡 지음, 조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저자 팡팡은 2020년 우한 봉쇄 사흘째부터 우한의 참상중국 정부의 진실은폐왜곡관리들의 부실 대응그리고 시민들의 절규를 기록하기 시작했고총 60편의 글들을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올렸다그의 글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각국에 알려지자 중국 정부는 검열을 시작했고 글은 차단되었다그리고 서프라이즈처럼 나온 책이 [우한 일기]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출간되지 못한 책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정말 놀랐다문학동네가 아니었다면 읽어볼 생각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단순한 팩트라 하더라도 제대로 전달되었을 지를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오래 전 과거의 사건이라도 관련된 인물이 남은 경우알아도 진상을 제대로 밝히기가 얼마나 지난하고 고단한 일인지 보고 들은 경험이 지겹도록 많아서 더 그렇다.



......


[우한일기]는 우한 지역에 최초로 코로나가 확산되고 봉쇄된 76일 간을 다루고 있다지만이 짧은 제목처럼 단일 사건도 특정 지역에서 그친 일도 아니다코로나 바이러스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사스도 메르스도 신종 코비드19에 비하면 얼마나 만만한 상대였나 싶다.

 

일 년이나 지났는데지난해의 마지막까지 믿고 싶지 않아서 믿기지 않아서 그래도 순진한 희망을 품고 기다렸다솔직히 지금도 계속 그러고만 싶다그래서 지금도 매초마다 전 세계 누군가의 생사를 가르는 이 판데믹 재난의 시작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인지 책을 받아 들고도 고민을 멈추지 못했다.

 

재난이란 무엇인가?

 

마스크를 쓰거나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거나 단지에 들어갈 때 통행증이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재난이란병원에서 예전에는 몇 개월에 한 권 쓰던 사망자 명부를 지금은 며칠에 한 권씩 쓰는 것이다.

 

재난이란예전에는 화장터에서 관에 담긴 한 구의 시신을 한 대의 운구차로 옮겼다면지금은 비닐로 싼 시체 몇 구를 포개어 쌓아서 화물트럭에 실어가는 것이다.

 

재난이란당신의 집에서 한 명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며칠 혹은 보름 안에 전부 사망하는 것이다.

 

재난이란당신이 아픈 몸을 끌고서 춥고 비가 내리는 날 사방을 뛰어다니며 자신을 받아줄 병상 하나를 찾아다녀도 끝내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재난이란새벽부터 병원에서 줄을 서고 번호표를 받아도 다음날 새벽에야 진료 순서가 되거나 혹은 순서가 여전히 오지 않아 길바닥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다.

 

재난이란당신이 집에서 병원의 입원 통지를 계속 기다리다가 통지가 왔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재난이란병원으로 이송된 중증 환자가 사망하면 병원에 들어간 그 순간이 가족들과 작별한 순간이 되어 서로 영원히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재난 속의 세월은 고요하지 않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들의 죽음과 가슴을 도려내는 가족들의 아픔죽음을 향한 생존자들의 삶이 있을 뿐이다.

 

며칠 전 한국의 의료에 대한 고민을 다룬 책을 읽으려 관련 자료들을 보다가 중국 우한의 상황에 대한 보도 자료를 읽고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 놀라웠다이전까지는 우한의 사람들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고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깨달았다판데믹을 겪으면서 글로벌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실제로 나의 시야와 관심의 집중도는 점점 더 구체적인 사적 공간과 사적 관계들로 좁혀지고 있었다.

 

명목상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의 의료가 거의 민영화되었다는 사실도 코로나를 겪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인구 1200만 명이 사는 우한시에서 코로나 확산 시기에 환자를 받은 병원은 단 3나머지는 다 영리병원즉 민간병원이었다고 한다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을뿐더러 국가가 의료문제를 포기한 상태라는 의견도 들었다끔찍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답답했던 건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곳에 국가라는 시스템의 비가시성 혹은 부재였다그에 비해 지나치게 게으르고 손쉬워 배려라곤 없이 시행되는 공권력의 행위들에는 더욱 분노하게 된다뒤늦게 방역을 한다고 나선 당국이 한 일이라곤 인구 1000만 명이 살고 있는 거대 도시를 통째로 완전히 봉쇄하는 것이었다.

 

"사람 간에 전염이 되지 않는다막을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중국 정부의 주장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기사 보도로 이름만 기억하는 의사 리원량은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인지하고 최초로 경고한 죄로 중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코로나에 기인한 병증으로 인한 비극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릇된 혹은 무능력한 대처방식으로 인한 피해들이다일일이 적기에는 너무 잔혹한 참상들이다……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정면으로 대항할 방법이 없지만상식을 갖추고 거짓과 선동을 멈추는 일은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아닌가더 어려운 일인가……지옥의 한복판에 버려진 채로도 독거노인들의 간장 뚜껑을 열어 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 이야기에 울컥하고 눈물이 고인다.

 

이 책의 저자이자이전부터도 작가인 팡팡은 중국 정부를 고발하고 비난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바로 이런 사회와 권력이 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비극을 언제든 재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전하려한다제발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은 하지 말라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그 반대가 되었을 때 어떤 참상이 벌어지는 지를 바로 보라고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하려한다.

 

한 나라의 문명 수준은

높은 건물강한 무기위협적인 군대진보한 과학기술경제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

바로 약자들에 대한 국가의 태도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고개를 들고 희망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중략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스스로를 지키고가족을 돌보는 것이다.

지시에 따르고 절대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문을 닫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목숨 건 사람들의 노력을 절대 헛되이 할 수 없고,

또 이렇게 버틴 스스로의 노력도 허투루 만들 수 없다.

 

비상사태가 닥치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거대한 선과 악이 전부 드러난다.

당신은 그 안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경악하고 탄식하고 분노하고그리고 익숙해질 것이다.

 

나는 생필품을 파는 상인들에게 이럴 때 문을 열면 감염될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덤덤했다.

우리가 여기서 버티고 있어야 당신들도 버틸 수 있잖아요.”

 

코로나 판데믹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작가 팡팡이 감당해야할 고초도 아직 진행 중이다나는 이 작가의 근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할 일에 포함시키려 한다.




정말 다른 의도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면책이 우한일기든대국항역이든 무슨 상관인가무슨 책을 내든 이용하려 할 텐데안 그런가누군가 이용할 거라서 책을 안 낸다고언제부터 중국인들이 그렇게 외국인을 두려워했나음모론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그저 소설 쓰는 데 소질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이 책은 반려견과 집에 단 둘이 남게 된 작가 자신을 위한 생존 일기이고,

고통스러운 고발 보도 자료이고,

죽거나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한 추모와 위로의 문학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이 재난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즐겁게 지내면서 [우한일기]를 2020년의 역사적 자료로 다루는 미래를 희망한다


2020년 9월 작가 김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의 레시피 - 딸에게만 알려주고 싶었던 비밀
나카가와 히데코 지음 / 이봄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을 만드는 데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니까.”

 

실수란 건 의도한 일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그것마저 조심하며 살아온 분의 인생과 레시피라 절로 경건해지는 기분이 든다.



각종 레시피북들은 저엉말 많지만,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이렇게 반가운 책은 처음이다그 음식에 대한 따뜻하고 향긋하고 배부르고 걱정 없이 나른한 그리운 추억이 있어서 더 그럴 것이다.

 

레트로라 이름 붙인 메뉴들이 내 현실에선 미슐랭보다 귀하게 느껴진다재료도 맛도 다를 테지만 맛을 아는먹으며 성장한 메뉴들과그리운 이들그리운 시절에 모두 떠오른다.

 

디저트를 빼고는 모두 다 요리할 수 있을 메뉴들이라 감개무량하기도 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맛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읽자 40여 년 전 처음 맛본 [비엔나롤빵]과 흡사한 빵 맛이 떠오른다가끔 빵집에서 소시지빵에 막 끌리는데 무척 예스런 입맛이라고 친구들에게 놀림도 받았다 어린 시절 덜컹덜컹 기차 여행 당시의 훈제 소시지 향도 생각나고 처음부터 거부감이 없었던 머스터드 향도 떠오르고 그런다.

 

자금에서야 생각해보니 그래서 한 때 쏘야 소시지야채볶음 같은 훈제 향이 나는 음식을 맥주 안주로 막 좋아했나 싶기도 하다재료와 만드는 법이 놀랄 만큼 간단해 보여벌떡 일어나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해지는 위험한 레시피이다.




[나폴리탄 스파게티] 이 메뉴는 들을 때마다 허기가 돈다.

 

어릴 적조부모님 댁에서 지내던 시절오후에 두 분 산책가시는 길에 따라 나서면 동네한방차집에 가셔서 주인과 담소를 나누곤 하셨다매캐한 한약재 향이 떠도는 장소에서 유일한 어린이메뉴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해주시면 언제나 만족스럽게 배불리 먹고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다 잠이 들기도 했다.

 

재료나 만드는 법을 여쭤본 적은 없지만아버지의 레시피의 스파게티보단 케첩 양이 더 많았을 거라 짐작해본다비엔나소시지에 이어 케첩 중독 역시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었구나새삼스럽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허기가 느껴진다매일 무언가를 핑계로 만들어 먹고 싶은 메뉴이다.




초등학생중학생 때까지 방학 중에 그냥 저 크레이프만 구워서 속재료 없이 잼을 발라 먹기도 했다구울 때 왜 자꾸만 가장자리가 말려 올라오던지……지금도 이유를 모른다어쩌다보니 크레이프보단 월남쌈을 더 자주 먹고 살았다보드랍고 상큼하고 달콤한 행복한 맛일 거란 생각에 언젠가 반드시 시도하고 말 테다!라고 결심해본다.




원래도 좋지만 겨울에는 특히 묵직한 느낌의 파운드케이크가 더 끌린다체온 유지를 핑계로 살찌우는데 이만한 음식도 없는 듯.ㅎㅎㅎ 버터 듬뿍에 구운 아몬드 잔뜩레몬 껍질이 상큼하게 씹히는 [아몬드 파운드케이크]는 겨울에 최적화된 메뉴이다죄책감이 들 정도의 두께로 잘라 따뜻한 소금 약간 우유나 산미가 있는 커피나 달지 않은 글루바인과 함께 먹으면 추위가 가시고 몸보다 마음이 더 노곤해진다.

 

아버지와 함께 베이킹을 해본 기억은 없어서저자의 기억 속 시간들이 어땠을까 상상만 해보았다.

누구랑 만들든혼자 만들든 갓 구운 빵이나 케이크가 오븐에서 나올 때 퍼지는 향기는 정말 황홀할 것이다.

행복하고 따뜻하지만 그리운 일들이 잔뜩 생각나서 슬픔도 차오르는 특별한 책이다.

그래도 이 책은 책장에 꽂을 장식이 아니라 만들고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 가득해서 정말 신이 난다


최고 최애의 레시피북이다

................................


자, 그럼 현실은......



나폴리탄쯤이야, 자신만만했는데,
이 그냥 토마토 스파게티는 뭔가요.
제가 만든 기억은 납니다만......
재료가 달라져서라 위로해봅니다.
자신만만했던 레시피 하나 실종!


레몬 없어서 오렌지 껍질 썼어요.
음... 처음 맛보는 케익이예요.
아몬드 다 어디로 갔어,
버터 다 어디로 갔어,
오렌지 왜 너만 느껴져......
레시피 두 개째 실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오아물 루 그림,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 탄생 120주년을 맞아 1946년 프랑스어 초판본이 수록된 '어린왕자'를 새롭게 출간했다고,  


중국 출신 세계적 일러스트레이터인 오아물 루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삽화 30여점이 함께라고,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번역가'로 유명한 김석희씨가 맡았다고,


번역된 원고 뒤로는 프랑스어 원서가 함께 실려 이중언어의 차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하여


평생 단 하나만! 이라는 조건이 붙은 명품을 손에 넣은 듯 그렇게 책을 열었다.



습관이 중요해


'습관'이 뭔데?


어느 날이 여느 날과 다른 것, 어느 시간이 여느 시간과 다른 것은 습관이 있기 때문이야.


오래된 습관들조차 산산 조각난 일 년을 보내고 이 뜻을 이제야 이해하는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터 - 근대의 문을 연 최후의 중세인 클래식 클라우드 26
이길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rte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재색겸비를 갖춘 책들이랄까군더더기도 과장도 없는 팩트 제공에 적절하고 반가운 사진과 그림편집 방식까지 눈에도 마음에도 반갑고 어여쁘다그러니 책 읽는 일에 힘이 덜 들고 즐거운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분에 적극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일조차 힘겹다면 [루터] 읽기는 오디오클립도 제공되어 있어 여러모로 좋은 배움의 기회이다.

 

저자와 저서와 대표적인 업적을 줄긋기로 외우던 교과서의 단편 지식으로 만나애써 제대로 공부해본 대상이 아니라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잘 아는 것 같은 인물들 중 한 명이 루터이다몇 해 전인가 [위대한 여정]이란 영화로 유럽의 종교 개혁 당시의 분위기를 엿본 적이 있지만 그 역시 제한적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정치혁명이나 과학혁명에 비해 저평가된 역사적 사건들은 무수하다그 중에서도 조선의 한글창제를 떠올리게도 하는영향을 미친 범위와 역사를 보자면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지식혁명과도 같았던 루터의 종교 개혁은 인류사에 좀 더 진한 필체로 기록해 두어야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집 안 분위기라 아주 어릴 적엔 할머니께서 차분하면서도 곱게 차려 입으시고 미사 보러 간다.”고 하시면 누굴 보러 어디를 가시는지 궁금하기도 했다좀 더 커서 그 표현이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로만 통용되던 성서와 미사예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보러’ 갈 수 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것 마냥 놀라기도 했다.

 

지금도 글을 모르는 분들이 계시니 천주교가 선교 전파되던 그 시절엔 마치 중세 유럽처럼 한동안 미사를 보러 가서 말씀을 듣는 것 이외에는 접근이 어려운 시절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미사는 동서양에 거쳐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은 그저 보러’ 가는 그들만의 잔치였다.

 

그러니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유통함으로써 비로소 많은 이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든 루터의 업적은 저평가할 수 없는 위대한 개혁사의 기록이자 역사적인historic 인물의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밖으로 나가 가정의 아낙네들거리의 아이들,

시장의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보았다가 그런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자기들에게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제임스 레스턴루터의 밧모섬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번역하라는 것은 현대라면 도서정가제로 인한 판매수익을 위해서라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으로 파격적인 사고의 전환이고 실행이었을 것이다더구나 스스로 성서 번역을 하면서는 삽화들을 넣어 메시지를 전하고 찬송가 역시 쉽게 읽히고 따라 부를 수 있게 한 옥타브의 음계로만 작곡했다고 하니루터는 단지 독일인답게(?) 성실한 것만이 아니라 천재적인 미션 수행자로 보인다.

 

이렇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는'이가 세상을 바꾼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달리 표현해 독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번역된 성서를 펴내어 누구든 읽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국 독서를 통한 소통의 승리다.

 

문득 새 시를 한 편 쓸 때마다 시장 상인들을 찾아가 자신의 시를 들려줬다는 두보가 생각난다. "뭔 소리냐"는 핀잔을 받으면 "좋다"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시 호흡을 좀 고르고업적으로 달려가기 전에 당시 전반적인 유럽의 상황을 차분히 살펴보면 루터라는 역사적인 인물의 성향과 결심과 목표가 더 선명하게 이해된다.

 

페스트는 유럽에서는 14세기 처음 발발했고, 1340년대에 대략 2500만 명의 유럽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당시 유럽 인구가 75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중 3분의 1이 이 병으로 죽어 간 셈이다정작 이 병이 페스트라는 이름의 균 때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무려 500년 정도가 지난 뒤였다수많은 이들이 죽어 갔지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2020년 말에 잠시 확인해보니 어느 날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들 중에 9초에 1명씩 사망한 분들이 있었다고 한다지금도 상황이 더 좋아지진 않았을 것이다작금의 현실과 겹쳐져 페스트에 당하던 유럽사회의 모습이 더 이상 과거에 종결된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다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도구들이 부재해서 더 두렵고 종교와 미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비해지금은 그래도 백신과 치료제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형편이 조금 나아보이긴 한다하긴 그 정도 여유라도 있으니 온갖 패악들이 여직 그치지 않는 것일 테다.

 

중세라는 유령의 숲에서 루터는 죽음과 질병에 대한 공포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신앙인이었다루터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하여 지속해서 신을 찾았다남들보다 몇 배 이상 많은 시간을 고해실에서 보낼 정도로 그는 신에게 집착적으로 매달렸다하지만 그때마다 신은 엄중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오죽하면 그는 그러한 심판의 신을 저주했다고까지 했을까.

 

결국 루터가 갈구한 구원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것이었다전통적 신앙 방식이 주는 편안한 형식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양심의 불편함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다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신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어쩌면 그의 이런 불안한 양심이 그로 하여금 세속적 출세가 보장되는 법학도의 길을 걷지 않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이다그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가 세속인으로 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즉 루터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이 절정에 달한 엄혹한 시절에 태어나 문득 이 세 가지가 인류사에서 중단근절된 것이 있었던가 싶다만 지긋지긋한 클리셰처럼 당연히 귀족들은 부어라 마셔라 화려한 삶을 살면서 현생의 부도 천국의 자리도 우리끼리 차지하자는 욕망이 가득한 불평등한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자꾸만 이 시대상이 고치지 않고도 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듯해서 소름이 돋는다죽음을 신의 형벌로 선전하며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행위가 여전히 예수천국 불신지옥 등등으로 온존하니 그 오랜 세월이 무색하다.

 

그런 기독교 계급이익공동체에 반해 루터에게는 오히려 인간개인나 자신양심이라는 근세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각이 생겼다그들의 신에만 의지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삶보다 불안하지만 현명하고 올바른 성서 제대로 읽기와 번역과 유포를 통해 성서에 충실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목적에 보다 적합한 종교를 향한 루터의 선택과 여정이 뭉클하다.



루터는 성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513년부터 성서학 교수로 비텐베르크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탁월한 소통 능력 덕분에 교수 루터는 큰 인기를 누렸다그는 강의 시간에 독일어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당시 대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였지만루터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독일어에 가끔 욕설까지 섞는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이러한 행동은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계산한 것이었지만그의 불같은 성정도 한몫했을 것이다그 어려운 스콜라철학마저 루터의 입을 통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이런 인기 덕분인지 유럽의 많은 학생들이 비텐베르크대학에 입학하고 싶어 했고, 1515년부터 1520년 사이에는 그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이 점 역시 대학을 세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매우 흐뭇한 일이었고루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 주요 이유였다.

 

선구자나 개혁가가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이야기들은 읽기가 우울하고 힘겹다다행히 루터는 자신의 노력이 가장 큰 동력이자 이유이지만 소통능력이 탁월하고 독일어를 사용했음에도 명강의로 평가받고 필요한 지원도 확보했다니 읽는 마음도 편안했다역사 속에 이런 일이 당연한 듯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즈음 그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제대로 푸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게 되었다성서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신의 뜻이 아주 분명하고 선명하게 담겨 있는 책이다성서만이 성서의 메시지를 풀어내는 최고의 근거가 되었다루터에게 성서란 전혀 어렵지 않으며 노력하여 기록된 문자와 그것의 문법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성서의 메시지는 분명히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 루터는 확신했다.

 

이렇게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완성해 갔다성서를 원문으로 읽으며 얻은 자긍심과 권위까지 갖추게 된 루터는 중세의 한복판에서 매우 낯선 주체적 개인이 되어 갔다.

 

외부의 영향이나 다른 계산다른 목적의 동기 부여 없이 연구 대상만을 보고 제대로 탐구해보는 드물고도 귀중한 기회 역시 가능했다루터의 능력으로 이룬 일이겠지만가짜뉴스가 바이러스 확산 속도보다 더 빠르게 유통되는 기막힌 현실에서사실과 진실이 정답이자 가장 힘이 세다라는 역사적 사례를 읽게 되어 기운이 난다.

 

누군가 알려 준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원전을 읽고 내용을 확인해서 성서에 기록된 신앙의 핵심을 정확히 깨우치고 그것을 다시 글로 옮겨 전한 것이 오랜 세월 모르고 살았던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의 전체적인 모습이자 요체였다.

 

다시 한 번 ~카더라…… 아무리 폭력적이고 악의적인 내용일 지라도 망설임 없이 유통되는 작금의 사태에 비해 남들이 오도하는 말 말고 내가 직접 읽고 확인하고 오류를 고쳐 세상에 전하는 일그 바로잡음이 역사를 바꾼 중요한 실천이라 믿는다.

 

지금의 우리가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려면 '루터'라는 한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곤란하다그보다는 그가 어떤 시대어떤 문화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런 일을 했는지를 반복적으로 되물어야 할 것이다결국 인간은 역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저물어 가는 중세의 끝자락에서 올곧게 한목소리로 신의 은총을 기리는 주체적 자아를 외친 루터를 잊어서는 안 된다아울러 성서를 읽으면서 찾아낸 진리를 이웃으로 확장하려 했던 그의 투지도 기억해야만 한다



드디어 조각지식정보들이 온전히 자리를 찾아갔구나 싶어서 읽고 나니 기쁘다이 책이라면 도전한 누구라도 힘들지 않게 잘 읽고 배울 수 있을 듯해서 또 기쁘다이제야 영화의 제목이 왜 [위대한 여정]이었는지 감정 이입이 좀 된다시대를 도저히 거스르며 나아간 긴 여행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과 깊은 의미에 감동받을 수 있어 벅찼다참 오랜만에 거대담론의 분위기에 취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쉽게 읽는 여행지리, 파리 문화예술 탐방기
이두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차를 보고 저자의 생각이 얼마간 짐작된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이 책도 그러한데 여행가이지만 누구보다 더 파리의 지리역사감수성까지 상세히 담아 주려는 에너지 가득한 시도가 빼곡하다당연히 도시 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파리의 문화와 예술 콘텐츠들을 아우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신난다제 여행을 가서는 한 줄도 글을 쓰지 않으면서 남의 여행기 읽기를 무진장 좋아하지만 힐링 여행기는 안 읽는다.

 

그 장소를 몇 번을 갔건 얼마나 오래 살았건 그곳을 안다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한 때 틈만 나면 영국을 벗어나고 싶어서 기회만 있으면 가서 머물려 했으니…… 횟수로도 여러 번어느 해 겨울은 센 강 옆 세모난 아파트를 세 얻어 셰익스피어앤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까지 왔다 갔다 하릴 없이 강변을 걸어 다니며 지내기도 했다.



부지런함과 기록의 부재로 온갖 가지 장면들만 난무하지 그토록 배울게 지천이라는 곳에서 뭘 배우진 못했다인상주의 화가들 작품 몇 개 구경하는 것 말고는 오르세Musée d'Orsay에서도 스케치하는 화가 지망생들 작품들만 내내 구경하며 멍 때리기만 한 것 같다어차피 거대한 규모의 오르세나 루브르Musée du Louvre는 나 같은 길치가 다니기에는 아주 위험한 장소이다그나저나 유리 피라미드 뭡니까왜 그런 겁니까.

 

어느 날은 파리10대학에 유학 중인 친구와 에펠탑에서 야경 보며 수다 떨고 있는데 직원이 조용히(?) 승강기 멈추고 조명 다 끄고 퇴근해서 어둠 속 회전계단을 더듬어 1층까지 내려와서 탈출(?)한 적도 있다꽤 오래 걸렸습니다에펠탑은 높은 건축물이 맞습니다. 여행의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게 없어서 당시에도 파리에서 머무는 일은 땅을 발로 꼭꼭 밟으며 걸어 다니는 속도에 맞추어 곳곳에 기록된 역사적 의미를 떠오르는 대로 새기는 재미가 컸다.

 

집시들이 다 사라진 몽마르뜨도 한산했고 해질 무렵의 샹젤리제 역시 천천히 걸어 지나기에 최적으로 설레는 곳이었다노트르담 대성당Place du parvis de Notre Dame은 완공된 게 아니었나 싶게 몇 해에 걸쳐 갈 때마다 공사 중이었고…… 그땐 욕 많이 했는데 작년에 화재로 첨탑이 전소되는 장면을 보고 정말 슬펐다성탄절이 가까워질수록 연주회가 많아져서 가끔 중간에 적당한 성당에 들어가 잠시 들으며 몸을 녹이기도 했고뱅쇼Vin Chaud를 여기저기서 맛보다 어느새 알코올중독처럼 매일(?) 마시게 되었다.




어디서 사먹든 빵과 오믈렛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지만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별 매력도 없던 파리가 언제 다시 갈지 모른다 싶으니 라고 조용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고 그립다그리운 건 그 시절과 사람들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이어서 들지만어쨌든마음이 살살 에이는 것을 불안하게 감지하며 이러다 훌쩍거리는 거 아냐싶은 주책없는 생각도 하며 천천히 읽었다.




파리의 역사는 기원적 3세기경부터 시테 섬을 거점으로 시작되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강 중류의 거주지란 뜻의 루테티아(Lutetia)라고 불렀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도시로 성장하였다.

시테 섬은 센강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요새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3세기부터 이름 붙여진 파리(Paris)’는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갈리아 부족인 파리시(Parisii)에서 유래하였다. 19

 


프랑스어로 공을 뜻하는 불(boule)은 프랑스 빵을 통칭하기도 한다.

일찍이 음식 문화에서 빵이 주류를 이루었던 프랑스에서는 제빵사를 밀가루를 공 모양으로 반죽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불랑제(boulanger)라고 불렀다.

빵은 무게와 길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바게트(baguette)는 긴 빵을불은 둥근 모양의 빵을 의미하며바게트와 불 중간을 바타(batard)라고 한다버섯 모양의 빵은 생피뇽(champignon), 길고 통통한 빵은 파리지엔(parisien), 바게트보다 가늘고 짧은 빵은 플루트(flute)라고 한다. 39

 

가장 관심이 있는 건 여전히 파리의 역사 조금과 빵밖에는 없는 건가.

보고 싶은 풍경도 여전하다.

편애와 편식은 아직도 나의 모든 출발이자 도착이다.

 

두근거림과 설렘이 없어진 건 여행을 멈췄기 때문이다란 생각이 확신범처럼 들었다이전에도 온전히 즐기기 위해 다녔던 경우는 거의 없지만 즐거움과 죄책감을 매번 저울질하다 긴 비행이 필요한 비즈니스가 아닌 여행은 그만하자고 결정한 것이었는데 어쩐지 삶의 활력도 재생과 보충을 멈춘듯했다언젠가는 심장이 정말 뛰고 있는 건가 진심으로 의심(?)이 되기도 할 만큼 그렇게 설레는 일 또한 사라져갔다.

 

아니었는데 지금도 아닌데이 모든 게 다 코로나 때문이에요, 라는 선동들도 꽤 들리는데나도 코로나를 핑계 삼아 아몰라 작전으로 예전 소원처럼 여행을 하다 길 위에서 삶을 마쳐보도록 할까사춘기도 갱년기도 아닌데 이런 무책임하고 도발적이고 발작적인 생각이 떠오른다.

 

새해가 365일 중에 5일밖에 안 지났는데 참으로 위험하고도 멋진 책을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