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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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존재하지 않은 동물을 태연하게 동물 분류에 올리고 12지에 기록하고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심지어 자식들 이름으로 채용하기도 한다. ‘’. 나는 꽤 어려서부터 아무도 본 적 없는 이 동물이 인간들의 일상과 문학과 문화에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살아가는 점이 신기했다그리고 그런 사실에 구태여 반감이나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 어른들의 반응을 살피며혹시 나만 빼고 모두 다 본 것 아닌가,하는 쓸쓸한 기분을 종종 맛보기도 했다지금이야 그런 인간의 능력이 사랑스럽고 피해를 주거나 범죄에 이용하는 것만 아니라면 이 상상의 동물이건 어딘가 상상의 세계가 평행우주처럼 펼쳐져 존재하건 다 반갑고 행복한 일이라 진심으로 생각한다.

 

바닷물 속에선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기만 해서 어릴 적부터 한번 들어가면 해가 져서 부모님이 기어코 야단을 칠 때까지 나오기가 싫었다육지보다 더 넓고 넓은 바다아직도 만나본 적 없는 바다 생물들그러니 상상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가 무한보장이었다상상하는 능력이 월등할 어릴 적엔 향유고래를 따라 심해 여행을 하며 바다 생물들을 만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아무런 육체적 정서적 제약도 없이 자유롭기만 한 행복한 꿈들이었다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새 원하는 마음이 줄어들어서인지원하는 것들이 달라져서인지문득 그리워서 아무리 바라봐도 더 이상은 돌아오지 않는 꿈이 되어 사라졌다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어봐 준다면자유로운 존재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 꿈을 돌려달라고 부탁해보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은 그 꿈들 중에 언젠가 큰 조개 주변에서 만난 인어를 떠올리게 한다많은 분들도 그러하겠지만 인어라는 말에는 언제나 어린 시절 각인된 안데르센 동화가 분리불가능하게 녹아있다신비로운 존재가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결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어린 마음에도 스산한 허무감 물론그 시절엔 관련 단어조차 몰랐지만 -이 들 정도였다충격과 상처(?)라는 독특한 감상으로 남은 독서 경험이 디즈니의 유려한 애니메이션과 음악들로 흥겨운 축제의 기억으로 변모하기도 했다전혀 다른 작품이기도 하면서 연결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그리고 해리포터 작품 속의 서글플 만큼 무시무시한 인어…….

 

백어의 비늘은 백어가 처음 한 번만 주는 거야.

그것만 행운이고 나머지는 전부 불운을 가져오지.

백어의 비늘을 훔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화가 난 백어가 자기 비늘로 소금 도둑의 목을 뎅강 잘라.” 63

 

이 소설은 인어라는 명칭 대신 백어가 나온다그런데 어쩐지 내게는 다 읽기도 전에 인어가 주인공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마치 돼지와 돼지고지소와 소고기의 관계처럼인어/백어의 존재가 온전히 인간에게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딱 인간에게 필요한 용도의 그 부위만 탐나는그래서 제목이 소금비늘일 것 같은


거래와 매매와 가격과 욕망과 탐욕그 모든 것들의 그늘짐과 필연적인 불행들슬프다슬프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며 읽게 된다필력 높은 작가의 몰입도 강한 전개 덕에 약속은 언제나 제일 먼저 버려지는 육지 인간들의 세상이 가감 없이 신랄하게 드러난다잠시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동안 시원하게 느껴질 법한 가을 밤공기가 스산하고 무겁게 얼굴에 닿는 듯했다.

 

한때 그들의 현실이었으나 이제 꿈이 되어버린 곳.

꿈꾸던 환상이 현실이 되면 두고 온 현실은 다시 꿈이 된다. 208

 

안 그래도 벌써…… 재미나기만 했던 많은 것들이 모두다 조금은 서글픈 나이가 되었다신비롭고 흥미로운 장편소설일 것이라 반가웠던 이 환상 소설을 읽고 나니 새삼스럽게 현존하는 모든 것들이 언제라도 판타지로 분류될 수도 있는 현실을 늘 경험 중이라는 현실감이 든다모여서 먹고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시절그래도 사람들은 명절마다 더 이상 자신들이 바라는 원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 고향으로 가고 또 간다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 가는 것처럼집단적 환상을 보는 것처럼슬프다슬프다.

 

경복궁의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고인의예지를 4대문에 맡겨서 인간다운 가치 위에 권력과 제도를 건설하려는 꿈을 꾸던 사람들이 살았던 이곳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랐다그렇다고 그 모든 꿈들도 어느덧 환영처럼 사라진 이 물리적 공간이 내 고향이라고 절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그래서 내게는 어디든 타향이고 그 점이 막 불행하지도 않다그보다는 원하지 않는 사실은 믿지 않고 원하는 환영만을 택하는 정치권력을 지켜보는 일이 더 괴롭고 해롭다.

 

소금비늘을 훔치러 백어를 쫓아간 인간들이 어지럽힌 바다에서 그 몰염치와 탐욕에 분노한 파도가 점점 더 높이 솟아오르는 환영을 본다.

 

나는 명수(暝水)에서 왔느니라.

그곳에서 어떤 이는 등불이 되고 어떤 이는 그림자가 되었지.

그리하여 나는 처음과 끝을 모두 보았노라.

또한 한 세상을 모두 보았노라.”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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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과학자 아빠가 들려주는 우주생물학 자음과모음 청소년과학 1
이문용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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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가 들려주는 세계 각국의 우주센터와 국제우주정거장, 우주로 간 인간과 여러 생물의 생물학적 변화는 시점과 더불어 상세 내용이 무척 궁금하고 기대된다. 내가 어릴 적엔 정보 부족으로 전혀 알 수 없었던 입사 방법과 연봉까지! 충분히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고 배울 수 있는 멋진 서적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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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애할까 - 황영주 북에세이
황영주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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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그냥 좋아서 읽는다.

 

사계절을 빼곡하게 채운 책들이 인쇄된 목록에 두근거린다어떤 제목들에는 마음이 징~하고 오래 울린다독서가 연애라면 그 연애는 여타의 제한도 금기도 없어서내 연애 상대가 다른 누군가의 연애 상대가 되고 그 연애는 어떻게 했나하고 들여다보는 일도 부끄럽지 않으며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도 지난 연애를 반추할 수 있다오히려 내 연애상대들 내가 읽은 책들 -과 만난 이들에게 친근감과 호감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가 가슴 먹먹했던 일그 추억들을 기꺼워하기도 한다.

 

7월 중순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3개월간 책도 인터넷도 놓고 살았다여름날에도 한기가 드는 몸으로도 불쑥 책을 펼치고 싶긴 했지만……맥없이 떠나면 폐가 될 책짐들이 마음에 걸려 조금 기운 차린 날들에 부지런히 책들을 기증했다잠깨는 아침마다 늘 어딘가가 아프거나 더 아프거나 하지만 슬금슬금 책을 다시 읽고 싶은 기분에 처음 잡은 책이 북에세이, <우리 연애할까>. 회환처럼 치료처럼 희망처럼 새 책을 읽기 전에 지난 연애사 한 번 더 돌아보는 심정으로 목록을 추렸다연애의 형태도 내용도 깊이도 느낌도 각양각색이라 시종일관 두서없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작가의 진단병명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

독자의 진단병명우울증과 범불안장애

 

다른 상대에게 끌리는 것도 연애이지만비슷한 상대에게 느낀 친숙함과 동질감에 끌리기도 하는 것이 연애이다그래서 읽은 책병증이 비슷해서 술술 읽으면서 신나는 수다를 떤 기분이 들었다누군가는 서로의 상처를 닦아주는 척하며 공멸하는 연애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독설을 날리지만살다보니 딱 하나로 뭐든 해결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건 없다는 것이 현실 경험인지라.

 

저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고다른 사람들이 그 약한 모습을 다 알고 있을 거 같아요당당한 척 말해도 내 안의 약한 모습을 들킬 거 같은 거예요구려 보일까 봐 두려운 거죠근데 사실 아무도 저를 무시한 적 없고제가 가장 저를 무시하고 있었어요.”

 

이에 대해 그녀의 주치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예요화가 났다가도 바로 죄지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죠여기저기서 더 좋아 보이는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아서 그래요어떤 절대적인 기준의 사람이 되고 싶은 거죠하지만 힘들 땐 무조건 내가 제일 힘든 겁니다그건 구린 것도 이기적인 것도 아니에요.”

 

황현산 사소한 부탁

밤이 선생이다와 격렬한 연애를 한 기억을 바탕으로 같은 상대에게 또 다시 반하는 기분으로 읽은 책이다어느 하나 사소하지 않은 부탁들로 가득 그득한 책서늘한 가을이라 숨을 들이켜다 문득 소천하신 선생이 그립기만 하다.

 

이가라시 유미코 나기타 게이코 캔디 캔디

국민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책이다한국전래동화와 안데르센동화에 대한 독서 후 반응에 염려가 되셨기 때문일까……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쏘~~한 부모님의 축하 선물이었다스위트 로맨스물로 분류되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는데당시 나는 위험할 정도로 몰입하고 감정 동일시를 해서 누군들 안 그랬을까마는 나달나달해진 책장이 분리될 때까지그래도 매번 읽을 때마다 충격과 격동의 충격적인 대서사시로 느꼈을 것이다아주 오랫동안 인물 캐릭터의 원형적 이미지들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단지…… 빛나는 주인공이지만 캔디로 살고 싶진 않았다.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밑줄 쫙이런 입시국어교육이 시에 대한 애정을 원천 차단했다교과서에 시린 시들이란 까다로운 문제풀이 소재들이었고 시어들이 짜증스러웠다그러다보니 문학적 가치와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편견도 선입견도 뿌리를 내리려했다좋아하는 상대에게 워낙 귀가 얇고 마음이 보드라운 덕분에참 좋은 친구가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를 읽어주고 들려주는 운 좋은 환경 속에서 오래지 않아 구원을 받았다.

 

지금도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에는 일어나서 제일 먼저 시를 읽는다. 20여 년을 같은 시를 읽는데 아직도 기도의 내용처럼 반성과 결심은 반복되기만 한다더 좋은 사람이 되진 못하더라도 더 나쁜 사람은 되지 않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꼭 움켜쥐고 그렇게 읽는다.

 

백희나 알사탕

사랑해!” “보고 싶어.” “나랑 같이 놀래?”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한 마디를 전할 용기를 주는 마법 알사탕!

 

세 번이나 새로 사야 했을 만큼 온 가족이 지독하게 사랑한 책이다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사랑하는 그런 간지럽고 행복한 상황이 시기에 핑계 삼아 맛있는 알사탕들을 과소비한 기억도 함께이다다 같이 치과치료 받고 알사탕과의 연애는 차분히 끝나간 듯하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젊음은 기억 속에서도 산화되고 몸은 불가역적으로 늙어가고 기억에 오류가 생기고 몸이 아프다끔찍하게 살게 되면 어쩌나끔직하고 더한 불행이 마련되어 있다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누군가에게 한번은 따지고도 싶은 심정이니나도 술 마시기 좋은 날을 골라 주정뱅이가 되어볼까……이 연애는 주선자 작가 -를 좋아해서 시작한 연애였고그 당시엔 남의 비극들을 속편하게 읽으면 되는 쉬운 연애였는데지금은 그만두고 싶어도 성큼 파고드는 원치 않는 복잡한 연애 감정이 든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그 누구의 동정과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것 또는 가혹한 시련이다그녀는 장애인이지만 그것이 겉으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그녀는 시각장애인도 아니고 신체가 마비되지도 않았다겉으로 나타나는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따라서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된다우리 사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감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취급을 받는다. 98

 

예전에 어느 특강에서 미리 서류 작성을 하는데 장애 유무와 종류를 기입하라는 공란이 있었다성실하고 충실하게 불특정 다수의 심신장애가 있다고 기입했더니 담당자가 크게 웃으며복지부에 공식 등록된 장애 유형만 해당한다고 알려주었다농담을 해서 웃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지체장애 신체로 드러나는 장애 의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유형의 수많은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장애인 표시는 왜 항상 휠체어에 탄 모습인가요.

 

차분한 마음으로도 열렬히 반하고 감탄할 수 있다는 새로운 연애를 알려 준 대단한 작가의 귀중한 작품이다신경과 전문의가 온기를 담뿍 담아 들려주는 위로와 감동 이야기들이라니학창시절신비로운 뇌를 연구하는 의사가 되어 보는 건 어떠냐고 강요하려했던 부모님에게 느낀 반항심과 거부감이 처음으로 후회되었다부디 더 많은 이들이 이 책과 연애해보시길!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우아하고 아름답고 슬픈 매력도 있는 멋진 연애 상대이긴 했지만내 연애 상대로는 내가 턱없이 부족하고 경험이 일천했던 때에 만나 썸만 타다 끝난 것 같은 연애영화를 먼저 봐서 이미지로 간단 정리된 탓일 수도 있으려나…… 어쨌든 참 오랜만에 기억해보는 반가운 책이기도 하다. 60세까지 살아남으면 그때는 어떤 연애가 가능할지 다시 읽어 보고 싶다.

 

프레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냉소cynicism란 지성의 가장 저급한 형태라는 말이 있지만대책 없이 너무 자주 빈정거리기만 하는 건 나도 싫지만어쨌든 난 영국식 블랙유머나 냉소적 위트가 취향에 딱 맞다웃다가도 죽을 수 있다는 솔직한 두려움을 깨닫게 해 준 닉혼비의 초기작이 발작적으로 그립다..내가 이 오베라는 남자를 얼마나 찬미했는지는 자명하다스웨덴스웨덴 작가라고편견 탓에 믿을 수 없었지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꼭 오베의 이웃으로 살고 싶었다올 해까지 일 년에 한번은 읽고 있다온전한 연애라기 보단 팬심으로 하는 행복한 짝사랑이 더 맞겠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누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본관의 입원실 낮은 층 창가에 있던 사람이 잠깐 망설이더니 설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설아도 마주 흔들어주었다창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만은 다정했다이설아, 266

 

정답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도 이래야 제대로이지!’하는 삶의 양식과 방식에 대해 고집스럽게 굴던 시절이 있었다그때에는 심지어 퍼즐도 프라모델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를 못했다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져서 누군가 방 안에 뛰어 들어와 밀쳐서라도 멈춰주면 좋겠다고 맘속으로는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젊어 체력도 좋을 때라 기절도 못하고 꾸역꾸역 완성(?!)’시키려 즐거움도 없이 괴롭게 움직거렸다그래서 작가가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란 말을 붙여 내놓은 주인공이 없는 그리고 많은 이 글을 읽고 젊고 어리석던 그 시절…… 기억이 났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옥중서간

상징적 공간으로의 감옥이 아니라 실제 감옥에서 20년 20그런 저자의 목소리와 글에는 아무런 불신과 증오와 회한과 절망……이 없다어찌나 부정도 부인도 불가능한 깊이의 사색과 성찰이었는지 아무 어려움도 모르고 한창 시건방지던 애송이었던 내게도 이해불식 중에도 확실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먼 나라 철학자의 말이 훨씬 더 재밌고 짜릿했는데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이런 정조의 애정과 신뢰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당시로서는 표현할 지식도 식견도 경험도 마음가짐도 없었던 내게도 한 가지 선명한 방향타를 오래 남겨 주었다나는 꽤 오랫동안 선생 덕분에선생의 글 덕분에 타인이 미워지고 상상 속에서는 따귀를 치고 싶은 감정에 시달리는 순간이 오면 내가 타인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날 감옥에 갇혔구나.’하고 숨고르기를 했다그러고 나면 상대를 향해 솟아오르던 열기와 불꽃이 동력을 잃고 사그라진 적이 무척 많았다.

 

<더불어 숲>과 <처음처럼>을 만나고, <담론>에 이르러운 좋게 강의도 들어 보았다선생인 소천하시고 나는 이제 타인을 향해 무엇도 태울 수 없는 지친 기색의 몸덩어리로 살고 있다한 번도 따르지 못했던 서삼독(書三讀)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언젠가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불안한 기대를 걸고 있다아직은.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三讀)입니다.

 

신영복서삼독

 

앤 드루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이 책에 대해이 연애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발밑이 꺼지는 듯한 충격 속에서 완전히 낯선 다른 존재와 전면적으로 전 존재를 부딪치듯 만난 연애라면 비유가 될까올 해는 참 많은 책들을 정리했다좋은 마음으로 기증을 하고도 그런 짓(?)을 한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들이 불쑥 찾아 들던 참 어렵고 끈질긴 집착을 긁어내는 일이었지만아마 나누고 보내고 난 후 단 한 권이 남는다면 아직은여전히이 한 권(한 권이라고 했지만 1985년 출간 본부터 여러 권을 탐욕스럽게 사 모았다이 책에 대한 묵직한 소유욕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가능하다면 반드시 올 그 날에 함께 태워져 환원된 원소들이 마구 뒤섞여 공기 중으로 함께 날아오르면 좋겠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거의 모든 문명에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139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207

 

굳이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이 목표인 적은 없었지만 꽤 많이 떠돌아다니던 시기가 있었다여행이라 봐야 내가 좋아하는 건 한 곳에 머무르며 동네 사람들과 같이 설렁설렁 걸어 다니며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는 게 제일 좋아 별나게 재미날 것도 신날 것도 없지만어쨌든 지나보면 낯선 곳들에 겁 없이 가서 이런저런 곤란한 작은 일들을 만났을 때도 마법처럼 늘언제나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그래서 더 겁이 없어진 나는 세상의 온갖 선의와 호의와 행운을 믿는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좀 더 오래 살아 지금에서는 꼭 필요한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산 내가 멀쩡히 살아남은 것 자체가 수많은 다른 이들의 덕분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푹 숙여진다나는 몰염치한 빚쟁이에 가깝다.

 

쿵짝이 잘 맞는 연애는 아니었지만그래도 맛난 차를 마시는 동안 무척 즐거운 대화를 나눌 상대를 만나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그 또한 정말 감사한 일이다.

 

김중미 존재 

봄볕가을볕처럼 환하게 번지는 웃음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하는 작가슬프고 아프고 묵직하고 어려운 소재들을 다르면서도 생명력이 빛나게따스한 위로처럼 온기가 퍼지게 글을 쓰는 신비한 작가코로나가 관리 가능해지면 가장 먼저 강연 목소리를 듣고 싶은 분<존재> 이전에 이미 깊이 사랑에 빠졌던.

 

사누 씨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아프리카 속담을 소개해 주었어요. “진짜로 잠든 사람을 깨우는 건 쉽다그러나 잠든 척하는 사람을 깨우는 건 어렵다.” 저도 여러분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125

 

저는 그런 것이 작은 용기라고 생각해요그렇게 작은 용기들이그 용기가 내는 작은 균열들이 견고해 보이는 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다고 생각해요남들 사는 대로 고분고분 사는 사람보다는 좀 덜컹거리기도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해요어쩌면 글 쓰는 일도 그렇게 틈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계속 글을 써요. 163

 

책과 연애하는 황영주 작가님의 북에세이 덕분에 옛사랑에 취하는 호사를 누리는 시간을 누렸다. 체력이 더 있으면 더 많은 책들을 들춰보고 싶지만 여기까지, 아쉽다. 이 에세이에 담아 주신 황영주 작가님의 연애는 67권에 이른다. 그래도 목록을 보는 동안 책과 하는 연애는 나도 못지않게 한 기분이 들어 잠시 우쭐했다친절하고 따뜻하고 깊이 있게 쓰신 에세이의 구체적인 내용은 목록의 연애 내용에 관심이 있는 독자 분들이 찬찬히 읽으시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두서없는 내 연애 담과는 달리 간결하고 진솔하고 행복한 격려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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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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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금’이란 이름에 걸맞게 월급을 소금으로 받은 시절도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신비롭고 흥미로운 장편소설이라 반갑고 관심이 큽니다. 환상 소설이라는 분류처럼 현존하는 모든 것들이 판타지일 수도 있겠지요. 어릴 땐 재미나기만 했지만 어느덧 많은 것들이 조금은 서글픈 나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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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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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를 지었다.

3천 년 뒤매들린 밀러는 키르케를 써야 했다.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 단어가 마녀였어요틀림없이 키르케가 그런 경우죠그녀는 오디세우스와 1년을 보냈죠그렇다면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어떻게 그녀는 지금의 그런 존재가 되었을까?

 

10년도 더 전에 친구의 은사가 오랜 기간 연구하고 완역했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책을 선물 받아 아주 힘들게 읽었는데필사한 몇 구절들 이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매력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키르케>를 잘 읽어 보고 싶으니지금에 와서 <오디세이아>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몹시 아쉽다.

 

키르케의 탄생 장면과 대화들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인 성차별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외모이름능력부모의 기대 등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누가 누구를 더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인간계나 신계 역시 씁쓸한 장면이다아이들 용 책제목을 보니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마녀 키르케>라고 뜬다그 책에서는 아마 얻을 수 없는 정보 중 하나로 키르케,가 hawk라는 것을 알게 되어 뜻밖의 기분이 들었다그저 적당한 남편을 만나는 일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한 기대가 생기는 이름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지상에는 그의 뜨고 짐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라는 인간들이 있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그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최고로 존경을 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왕실에서 지냈지만아버지는 가끔 여기저기에서 미적거려 그들의 계산을 어그러뜨렸다그러면 이 천문학자들은 섬기는 왕 앞으로 끌려가 사기죄로 처형당했다.

중략.

아버지,” 그날 내가 말했다. “천문학자를 죽일 만큼 늦었을까요?”

그렇구나.” 아버지는 대답하고 짤랑거리는 고삐를 흔들었다.

빨래를 짜듯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중략.

폐하태양 자체가 늦은 게 저희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태양이 늦을 리가 있느냐왕들은 왕좌에서 대꾸했다그렇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불경죄이니라죽어 마땅하다이와 함께 도끼가 떨어지고 읍소하던 남자들이 두 동강 났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요.”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그가 말했다.

 

모두가 비슷한 성격의 자신만만한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는데자신만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불편할지 혹은 그 이상의 어려움이 있을 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이 시대의 신들이 왜 이리 무감한 성격으로 설정되어 있었을까가차 없고 냉정한 것이 신에 속하는 것이고공감 능력과 측은지심은 인간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었을까.

 

키르케는 인간에게는 늘 반가운 이름으로 기억되는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잘 알 수 없는영원한 고통이라는 상상 가능한 가장 큰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와 조우한다.

 

인간들을 도우셨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으시는 거죠.”

그렇다.”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어린아이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대답할 순 없어저마다 다르게 생겼거든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알아요하지만 죽는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해요.” 내가 말했다.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걸 거부하셨다던데 진짜예요붙잡힌 게 아니라 제우스한테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셨다는 것도요?”

그렇다.”

왜요?”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얘길 한번 들어보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로서는 대답을 알 수가 없었다신의 처벌을 자청하다니 내가 보기에는 미친 짓 같았지만그가 흘린 피를 밟으며 서 있는 마당에 내 생각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그가 말했다.

 

영웅담이나 단발성 에피소드를 읽는 것보다 주인공을 따라 중심이 잡힌 서사 속에서 그리스로마신화의 접점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다프로메테우스는 철학자의 면모를 가진 듯 생각과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키르케가 마실 것을 가져다 준 것에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다른 신들과 구분되어 보인다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프로메테우스의 질문을 받은 것처럼 나도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다는 것키르케는 프로메테우스와의 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 어떻게 변화할까어떤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상상해본다인간들을 벌레처럼 하찮게 여기는 생각과 달리 키르케는 신과 인간의 존재와 관계 맺음에 대해 다른 의미를 찾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에테스(남동생)가 내 귀에 대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길 봐다이달로스야인간계의 경이로운 작품으로 꼽히는거의 신에 맞먹는 재주꾼이지내가 왕위에 오르면 저런 자랑거리를 모아서 곁에 두고 싶어.”

그래언제 왕위에 오르는데?”

조만간.” 그가 말했다. “아버지가 왕국을 하사하시겠대.”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나도 거기서 살아도 돼?”

아니,” 그가 말했다. “내 왕국이잖아누나도 누나의 왕국을 가져야지.”

중략.

내 것 하나 없이 땅속에서 평생을 썩을 수는 없어.”

나는 어쩌라고묻고 싶었다나는 그냥 썩으라고?

 

다른 동생들이 모두 자신이 속할 곳을 찾아 자신의 몫을 챙기러 떠난 후 홀로 남은 키르케는 자신이 머물 장소도 자신의 역할도 찾지 못한 채로 홀로 남는다그러다 우연히 만난 글라우코스라는 인간과 얘기를 나누다 사랑을 느낀다그리고 그제야 프로메테우스와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해낸다인간은 나이를 먹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제발 도와주세요.” 내가 말했다. “위대한 여신이여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영생을 부여해주세요.”

그건 어떤 신도 할 수 없는 일이란다.”

저는 그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글라우코스를 내 옆에 붙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찢고 불태울 수도 있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건 내가 파르마콘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 외할머니가 지은 표정이었다.

나는 공포가 뭔지 알아가고 있었다신은 뭘 두려워할까? 나는 그 대답도 알고 있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능력.

 

똑같은 형태는 아니라 해도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을 사랑하게 된 키르케외롭지 않은 처지였다면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후에 마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이 또한 모두 정해진 운명이었을까키르케가 원한 것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일까자신이 인간이 되는 것일까.

 

문득 <개구리가 된 왕자>란 동화와 <슈렉>이 함께 생각난다슈렉의 피오나 공주는 유쾌하게도 상징적인 인물이고 반전과 파격을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인물이다틀에 얽매어 고민에만 빠져 있지도 않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택을 한다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고원하는 행복을 위해 특권을 포기하고 자립한다자신을 구해 줄 갑옷 입은 기사나 백마 탄 왕자에 완전히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구한다사랑을 위해 자유와 독립을 제한하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 반드시란 없다죽음 말고는.

 

동화든 신화든 현실이든 삶이란 본질적으로 죽음과 연결된 길이고최종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종종 매우 비극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바라고 꿈꾸는 것과 다르게 아주 씁쓸할 수도 있다그래서 어쩌면 많은 동화의 끝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그 과정을 생략하는 지도 모른다가장 확실한 운명이 죽음이라면영생을 누리는 신들에게는 삶 또한 죽음의 부재처럼 가치가 부재한 시간일 뿐일지도 모른다그래서 나는 시간의 두 축 사이과정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가장 궁금하다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성장의 신호이다.

 

파르마콘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두려워하는 신들대단한 위계적 사회이다능력이 없거나 적은 존재라면 신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불멸의 삶이 얼마나 무력한 형벌일까 상상해본다.

 

키르케의 손을 거쳐 스킬라와 글라우코스가 변신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여신의 소행이지키르케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아버지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중략.

그런 술수를 파르마케이아라고 부릅니다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쓰기 때문인데신들이 피를 흘린 곳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지상에서 지천으로 자라기도 하죠그 약초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재능이고 저 혼자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크레테에서는 파시파에가 독약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바빌론에서는 페르세스가 육신에 영혼을 다시 불어넣습니다키르케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그 아이는 내 명령을 거부하고 내 권위에 도전했소독약으로 동족을 변신시켰고 다른 반역 행위도 저질렀소.”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는 우리 이름을 더럽혔소우리가 보여준 애정에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였소그렇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제우스와 합의를 보았지키르케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무인도로 추방될 거요바로 내일.”

 

그리웠던 남동생아이에테스를 통해 아버지 앞에서 키르케와 형제 자매들의 능력을 발설되고 확인된다그리고 바로 그 일이 키르케를 각성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이제 키르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딸님프가 아니였고그제야 본격적인 자신을 찾아 본격적인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펼치기 된다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마녀 이야기.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키르케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아버지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왜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렇다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프로메테우스가 채찍질을 당했을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마치 피오나 공주처럼또한 그 자신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마녀 키르케는 유배지 섬을 감옥이 아닌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바꾼다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원망도 회복도 귀향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마법 능력을 연마한다헤르메스다이달로스오디세우스 등 쟁쟁한 인물들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그들은 키르케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들이다키르케는 아무도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는다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지키려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주술로 보호하며 양육하지만아들이 떠나려하자 순순히 보내 준다운명에 휘둘리는 것도 순종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원하는 것을 알고 얻고 지키고 또 다른 흐름에 따른다그 과정이 모두 주어진 능력이나 행운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의지를 발휘해서 도전하는 모든 과정이다신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간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하는 결심을 하는 주인공반전에 놀라는 한편 그 결심이 가장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그래도 그의 끝이 어떻게 될까 한참을 생각 속에 머물렀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저희도 압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저는 당신에게 맡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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